노거수 / 성주향
칠백 살 사는 동안 등 굽은 회화나무
뼈마디 금이 가고 허리도 휘어있다
폭풍우 격전에서도 무장武將처럼 버텼던
사람은 고작해야 백 년 안 일생인데
저 어른 대를이은 고서古書만 산만할세
오늘은 금낭을 풀어 추억 들춰 보겠네
어떻게 사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귀 씻는 새 소리에 해와 달 품에 안고
수백 년 마을 당산에 생불生佛되어 살겠네
광역철을 타고 / 성주향
수채화 그려가듯 비 오는 여름날에
책 한 권 달랑 들고 광역철 타러 가면
선로에 깔린 침목枕木들 필름처럼 흐른다
달리는 유리창이 동영상을 보여줄 때
녹이 슨 파란 대문 그 골목 끝 집에서
준석아 크게 부르면 맨발 달려 나올 듯
해안가 간이역에 기차가 멈춰 서면
고개를 갸웃갸웃 누구냐 묻는 갈매기
동해선 광역전철길 꿈만 같은 여행길
색안경 / 성주향
두 눈이 아파와서 안경을 바꾸었다
티비를 시청해도 길거리를 걸어가도
찔러 온 폭언의 가시 눈물 자주 훔쳤다
나는 파리라 하고 너는 벌이라 하고
물들인 유리알로 바깥세상 다시 보면
황사로 먼지 끼 티가 괜한 오해 불렸다
자고 나니 거짓처럼 통증이 가라앉아
올려 본 하늘 저 쪽 꽃구름 환히 밝다
그렇지 생의 정답은 덧셈 혹은 뺄셈이다
황갯다리 / 성주향
강물 바닷물이
여기와 하나 되는
달려온 너와 나도
둘이 아닌 우리였네
무지개
다릿발 아래
오색 마음 흐른다
느티 블로그 / 성주향
마음속 그 무언가 흘러가지 않을 때는
누구든 여기 오면 무상의 펜션 드리지요
잎사귀 너울 파도가 시원스레 할 겁니다
혹 불이 꺼져 있어 대답이 없더라도
따뜻한 문패의 집 손잡이를 당기세요
한 번의 클릭만으로 물소리가 쏟지요
먼길 굽이돌아 힘겹게 오신 당신
볼륨 조금 높이면 매미 울음도 들릴 겁니다
쉬었다 나가실 때는 댓글 잊지 마세요
배냇저고리 / 성주향
한뼘도 채 안 되는 인형의 웃옷인듯
누렇게 얼룩이 진 색바랜 무명 자락
가만히 펼쳐보고는 생의 비밀 엿본다
감아댄 발자취를 가만가만 풀어보면
뽀송한 햇살 밟고 아장아장 걷는 아가
환하게 펼친 꽃대궐 어머니가 보인다
급물살 징검돌을 밟고 서는 길목에서
수만 번 수천 옷을 걸쳐 입고 갈아 입고
마지막 한 벌을 위해 힘든 고개 넘고 있다
그 어느 봄날 / 성주향
화단에 심고 가꾼
부부수夫婦樹 왕벚나무
바람에 하르르르
꽃비가 날리던 날
그이가
다시 온 듯이
휠체어가 환하다
코스모스 / 성주향
아직도 너는 거기 꽃양산 들고 섰다
눈부신 흰 가운이 빛나던 그 시절에
마음속 그리움 꺼내 편지를 쓰게 했던
내 가는 곳 어디든 따라왔던 앳된 미소
먼 야전병원에서 붕대도 감아줬고
어떨 땐 날고 싶어서 바람개비 돌려댔지
햇살 같은 석류알 그 투명한 어느 가을
앵글에 들어와서 박제된 한순간이
보풀진 책갈피 속에 환하게 웃고 있다
- 『바람인가 봐』(2023. 돌담길)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바람인가 봐』_성주향
한내
추천 0
조회 6
24.01.13 12:12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