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 어느 순간, 사람들은 글을 발명합니다.
글은 손의 연장으로 간주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글은 거의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신체와 직접 연관된 소통 기술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 되고 나면 우리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이것은 바퀴를 발명한 것과도 같아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바퀴는 선사 시대의 그것이에요.
반면 영화, 라디오, 인터넷 같은 현대의 발명품들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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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이러한 가속화 현상은 기억의 소멸에 일조하고 있어요.
이것은 아마도 우리 문명이 안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일 겁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과, 지식을 저장하고 운반할 수 있는 온갖 형태들을 발명해 내고 있어요.
이러한 점은 각종 기억술에 의지해야 했던 시대에 비하면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지요.
그때의 사람들은 필요한 지식을 언제라도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으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기억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의 도구들이 소멸되기 쉬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에요.
또 우리는 우리가 산출해 내는 문화물들에 대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해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위대한 만화 창작물들의 원본은 엄청나게 비싼데, 그 이유는 아주 희귀하기 때문이에요
(지금 알렉스 레몽의 만화 원본 한 장의 가격은 엄청나답니다).
왜 그렇게 희귀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들을 발행하는 신문사들이 일단 원판이 인쇄가 되고 나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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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만큼은 그렇지 않지요.
박물관에 가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침대가 작은 사이즈라는 사실, 즉 옛날 사람들은 더 작은 체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의 음성이 다른 음색을 지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나는 카루소의 낡은 음반을 들을 때마다 자문하게 됩니다.
그의 목소리와 요즘의 위대한 테너 가수들 사이에 보이는 차이는 단순히 녹음과 저장 매체의 기술적 질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20세기 초반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인가 하고요.
카루소의 목소리와 파바로티의 목소리 사이에는 수십 년 동안 쌓여 온 각종 단백질과 의학의 발전이 놓여 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미국에 도착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160센티 미터밖에 안 되었다고 해요.
지금 그들의 손자들은 벌써 180센티미터에 도달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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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우리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현대의 매체들은 빠른 속도로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죠. 이런 물건들은 금방 읽을 수 없는 것, 짐만 되는 잡동사니가 될 수 있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현대의 문화 산업이 지난 몇 년 동안 시장에 쏟아 낸 모든 물건들보다 책이 우월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내가 쉽게 운반할 수 있고, 시간의 파괴 작용에 대한 저항력을 증명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책을 선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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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이미지의 세계, 특히 영화의 세계는 테크놀로지의 기하 급수적 가속화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영역 같습니다.
당신과 나는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언어들을 발명해 낸 세기에 태어났습니다.
만일 우리의 이 대담이 120년 전에 행해졌다면, 우리는 단지 연극과 책만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라디오, 영화, 목소리와 음향의 녹음, 텔레비전, 합성 이미지, 만화 같은 것은 언급되지 않았겠죠.
그런데 어떤 신기술이 출현할 때마다, 그것은 자신만큼은 과거의 다른 모든 발명품을 구속했던 규칙과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마치 신기술에 대한 적성은 자연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 적성까지 습득하게 되어 그 사용법을 배울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마치 신기술을 소유하면 새로운 재능을 저절로 얻게 되는 듯이.
그렇게 신기술은 이전의 모든 것들을 쓸어 버리고, 감히 자신을 거부하는 모든 이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문맹으로 만들어 버릴 듯한 기세를 보여 줍니다.
나는 평생 이런 <협박>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와는 정반대였죠.
모든 신기술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긴 입문 과정을, 우리 정신이 이 신기술에 앞서 사용된 언어들에 맞춰 <포맷>되었기 때문에 더 길 수밖에 없는 입문 과정을 요구합니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영화라는 새로운 언어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반드시 배워서 습득해야만 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소설가들이 자신은 소설의 글쓰기에서 시나리오의 글쓰기로 자동적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상상했지요.
그건 오산이었죠. 그들은 이 두 형태의 글 - 소설과 시나리오 - 이 사실은 전혀 다른 두 형태의 글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기술이란 결코 편리하기만 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입니다. 라디오 극 한 편을 쓰는 것처럼 복잡한 것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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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나 역시 같은 이유로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어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뻔뻔스러울 정도의 장수가 지식의 세계는 끊임 없이 변혁되고 있다
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세계의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정된 시간 동안만이라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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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언자이든 가짜 예언자이든 간에, 예언자의 본질은 바로 틀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어요.
<진정한 미래는 항상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다.>
항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래의 위대한 특질입니다.
내가 항상 놀랍게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어요.
20세기 초반부터 1950년대 말까지 계속된 그 위대한 공상 과학 문학 중에서, 현재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플라스틱을 상상한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허구나 미래 가운데 우리 자신을 투사합니다. 하지만 미래란 기지의 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이점에 대해서는 무수한 예를 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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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분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볼테르가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십니까?
<Arrete, il faut choisir et passer à l'instant / De la vie à la mort ou de l'être au neant/(잠깐, 선택을 하고 당장에 넘어가야 한다. / 삶에서 죽음으로, 혹은 존재에서 무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꽤 괜찮지 않습니까?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의 제목을 이 볼테르의 번역에서 따왔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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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당신은 현재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단지 유행들이 지속되는 시간이 예전에는 30년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30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물건들의 조속한 노후화 문제이기도 하죠.
예전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인생의 단 몇 달만 투자하면 충분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배우고 나면 그건 영원히 유효했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두 달을 들여서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지만,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다룰 즈음이면 다시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따라서 현재의 부재, 어떤 집단적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재 자체의 불안정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차분하게 안정되어 있는 현재 속에 살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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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그렇습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사들의 딜레마가 있어요.
초등학생들이나 그 상급 과정의 학생들은 과제를 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얻곤 하는데, 그 정보들이 정확한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리합니다.
사실 그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교사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낼 때 다음과 같은 조사를 시키라고요.
즉 제시된 주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열 개의 다른 출처를 찾아내어 그것들을 서로 비교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학생은 인터넷에 대한 비판 감각을 훈련함으로써, 아무 정보나 덥석덥석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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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현재보다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보다도 더 많은 놀라움을 감추고 있지요.
갑자기 로마적 색채를 띠게 된 이 불가리아에 대한 얘기를 마치면서, 독일 희극 배우 카를 발렌틴의 말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미래조차 더 좋았다.>
또 다음의 기막힌 말도 그가 했다고 하죠.
<모든 것은 이미 말 해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 의해 말해진 것은 아니다.〉
자, 어쨌든 우리는 똑똑한 - 우리가 볼 때 똑똑한 - 기계한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기억해 주는 임무를 맡길 수 있게 된 역사의 이 시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미셀 세르는 르몽드 드 레뒤카시옹 Le Monde de I' Educationg지에서 실린 한 대담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가 더 이상 이 기억화의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지성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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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히려 인문학이야말로 자신의 역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한번은 한 분석 철학자가 내게 묻더군요.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왜 자기가 골치 아프게 들여다봐야 하느냐고요.
우선, 그들이 한 말이 어리석은 소리라면, 자기들로서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반대로 그것이 어떤 타당한 생각이라면, 어차피 자기들 중의 누군가가 조만간 그것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스토아학파가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폐기되었지만 실은 매우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이것들부터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봤다면, 왜 유럽에서는 바보도 이미 알고 있는 이 아주 오래된 생각을 어떤 미국 천재가 다시 발견해 내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는가?
반대로 과거에 표명된 그런 생각의 전개가 논리적 궁지에 부딪혔다면, 아무런 소득도 없을 길을 다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알아두는 게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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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에르 - 이렇게 여과의 개념에 대해 토론하다 보니, 우리가 여과하여 마시는 포도주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요즘에 나온 어떤 포도주는 여과되지 않은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답니다.
이 포도주는 불순물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고, 바로 그것들이 - 여과하면 걸러져 버리는 - 아주 특별한 풍미를 가져다주는 거지요.
어쩌면 우리는 학교에서 지나치게 여과되어 불순한 맛들을 상실해 버린 그런 밍밍한 문학을 맛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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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을 1909년 12월 31일에 경축한 것은 전혀 타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20세기의 진정한 끝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12월 31일에 경축했어야 옳았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가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에코 - 그건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요?
10은 첫 번째 십 년에 속합니다. 따라서 100은 첫 번째 백 년에 속하지요.
새 로운 백 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1500년의 - 100년이 15번이면 1500년이죠 - 12월 31일에 도달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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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이탈리아의 한 작가는 「위대한 불가리아 시인이란 있을 수 없 다」는 아포리즘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생각 자체는 약간 인종주의 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작가는 아마 다음의 두 가지 중의 하나, 혹은 두 가지 모두를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가리아 대신에 그 어떤 다른 작은 나라를 넣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첫째, 불가리아에 위대한 작가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불가리아어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인을 만나게 될 기회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대함>이 유명함을 의미한다면 좋은 시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유명한 시인, 즉 <대시인>은 될 수 없는 거죠.
내가 그루지야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누군가가 루스타벨리의 「호랑이 가죽의 사내」는 자기네의 국민시로서 어마어마한 걸작이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그 사람 말을 믿긴 하지만, 셰익스피어 같은 엄청난 국제적 명성은 이 시인에게는 없는 겁니다.
두 번째로, 한 나라가 보편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적 대사건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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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물은 이렇게 말하죠.
<불행에 처한 우리를 받아 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책의 권위요, 친근함이요, 시사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책을 펼치면, 책은 우리에 대해서 얘기해 주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 왔기 때문이며, 그런 우리의 기억들이 책에 덧붙여지고 섞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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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모나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빈치는, , 예를 들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 「흰 담비를 안은 부인」 같은, 내가 생각하기에 훨씬 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었지요.
하지만 「모나리자」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해석을 받았고, 이 해석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치 퇴적층처럼 화폭 위에 내려앉아 그것을 변형했습니다.
T. S. 엘리엇은 『햄릿」에 대한 글에서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논한 바 있었지요.
사실 「햄릿」은 걸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원천들을 조화롭게 정돈해 내지 못한 산만한 비극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알쏭달쏭해졌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것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햄릿이 걸작인 까닭은 그것의 문학적 질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걸작이 된 것은 바로 우리의 해석에 저항하기 때문이죠.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어 놓으면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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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물론입니다. 또 그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더 큰 반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로마인들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바울에서 나온 전통에서, 즉 복음서들에서 빌라도는 비겁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죄인은 아닌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정말로 책임이 있는 것은 유대인이었죠.
카리에르 - 그리고 아마도 바울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을 거예요.
즉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새로운 신, 유일한 신으로서 팔지 못하리라는 점이죠.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로마의 종교는 완전히 쇠락해 있었던 반면에, 유대교는 아직 새로운 종교, 심지어는 정복적이 고도 전도열에 불타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와는 달리 로마 문명 자체는 아직 쌩쌩했어요.
그것은 고대 세계를 체계적으로 변형하고 또 단일화하고 있었으며,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지속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부과하고 있는 중이었죠.
정복적이긴 했지만,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면서 만인에게 통용될 수 있는 문명을 기반으로 한 평화였습니다. 부시의 미국은 이런 종류의 평화를 제안할 능력이 전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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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풍경은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요.
이런 가르침들은 그리스의 과학을 불태워 버린 바울의 그것과도 비교될 수 있겠죠.
신앙이란 언제나 지식보다 강한 것이었죠.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통탄하기도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겁니다.
하지만 이런 비뚤어진 가르침들이 세상 만물의 흐름을 뒤엎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에요. 아닙니다. 세상 만물은 항상 그것 자체일 뿐입니다.
볼테르가 예수회 수사들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죠.
에코 - 위대한 무신론자들은 모두가 신학교 출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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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종교적 부흥은 몽매주의 시대들과 연결되어 있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시대 같은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시대에 번성하죠.
그것은 거대 이데올로기들이 끝날 때에, 도덕적 해이가 극도에 달하는 시대에 일어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언가를 믿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기 때문이죠.
기독교도들이 떼 지어 카타콤에 내려간 것은, 로마 제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 다시 말해서 원로원 의원들이 입술에다 루주를 바르고 매춘부를 끼고 돌아다녔던 때였습니다.
그것은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한 움직임들로, 어떻게 생각하면 정상적인 현상이에요.
이러한 신앙의 필요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로 과학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뉴에이지 사상을 신봉하기도 합니다.
요즘 재연되고 있는 다윈 이론에 관한 논쟁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개신교의 근본주의 자들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들이기도 하죠(요즘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톨릭교회는 오래전 부터 진화론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며, 따라서 창조의 엿새는 지질학적 시대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미 교부 시대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창세기도 사실은 매우 다윈적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동물들 가운데 가장 나중에 출현했고, 또 진흙으로 이 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에서 말하듯) 인간은 땅의 산물인 동시에, 진화의 정점인 거죠.
여기서 신자는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보해 두고 싶어 했지요.
즉 이 진화는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라, 어떤 <지적인 계획>의 결과라는 점만큼은 잃지 않기를 원했던 겁니다.
하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단순히 <의도>만이 아니라, 다윈 이론 전체를 문제 삼고 있 습니다. 즉 지금 우리는 세상이 퇴행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신기술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화 가운데서 피신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드롬은 파드레 피오 같은 인물을 숭배하는, 그런 케케묵은 형태를 다시 취하고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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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에르 - 그래도 관점을 약간 달리하여,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을 모든 죄악의 원천으로 고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요.
하지만 1933년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때부터 20년 후에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의 수가 지구 전체를 통틀어 1억여 명이나 됩니다.
인류 역사의 다른 모든 전쟁에서 죽은 사망자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많은 숫자일 겁니다.
그런데 나치즘과 마르크스주의는 두 무신론적 괴물이라 할 수 있어요.
대학살을 겪고서 아연실색하여 깨어난 사람들이 종교로 돌아온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죠.
에코 - 하지만 나치는 <고트 미트 운스Gott mit uns(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라고 외치면서 일종의 세속 종교를 실행했어요!
소련 같은 곳에서 무신론이 국가 종교가 되었을 때, 신자와 무신론자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차이가 없지요.
거기서는 둘 다 근본주의자 또는 탈레반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예전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은 정확하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아편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고, 마비시키고, 잠들게 합니다.
아니에요. 종교는 민중의 코카인입니다.
그건 군중을 흥분시키죠.
카리에르 - 이를테면 아편과 코카인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지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전투적인 무신론의 횃불을 이어 받은 듯이 보이고, 돌이켜 보면 마르크스주의와 나치즘은 두 기이한 세속 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어쨌든 지독한 학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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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그렇다면 우리의 정의를 약간 수정하기로 하죠.
바보짓이란 어리석음을 거만하고도 줄기차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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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우리 둘은 접근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 근본적인 관점은 일치하는 것 같군요.
장필리프, 당신이 전에 <죽음과 불멸성>이라는 주제로 백과사전을 만들면서 내게 그 결론을 부탁했을 때, 나는 대략 이렇게 썼었죠.
<우리가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뒤에 남는 모든 인간은 한심한 작자들뿐이며, 따라서 그들과 함께 더 이상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해 보면, 적어도 우리는 평생을 인류의 위대한 미덕들을 함양하며 살아왔다는 뜻도 됩니다...
인간은 진실로 굉장한 존재죠. 그는 불을 발견했고, 도시들을 세웠고, 눈부신 시들을 썼고, 세계에 대한 해석들을 행했으며, 신화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동류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오류를 범했고, 또 자신의 환경을 파괴해 왔지요.
이 드높은 지적 미덕과 한심한 짓거리를 서로 견주어 보면 거의 비등비등하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바보짓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반은 천재이고 반은 바보인 존재에게 바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지게 되면 - 바로 지금 우리 두 사람이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한심한 짓거리
가 미덕보다도 더 우세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물론 자신을 위로하는 최상의 방법이지요.
어떤 배관공이 우리 집 욕실의 새는 곳을 수리하러 와서 돈을 왕창 뜯어 갔습니다.
그런데 가고 나서 물이 여전히 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겠습니까?
‘그자는 천치야.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욕조나 고치고 - 그것도 형편없이 - 다니겠어?
볼로냐 대학 기호학과의 교수가 되어 있어야 옳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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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에르 - 나는 우리 시대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건 너무 쉽고도 흔한 생각이거든요.
하지만...여기서 미셸 세르 Michel Serres가 한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상황이었 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어떤 기자가 아스완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일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가 한 대답이었죠.
당국은 댐 건설을 위해 위원회를 발족하고, 수력학 기사들, 각종 재료 전문가들, 콘크리트 기사들, 심지어는 생태학자들까지 다 불러 모았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철학자도, 이집트학 전문가도 없었던 겁니다.
미셸 세르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기자는 세르가 놀라는 걸 보고 오히려 놀라는 거예요.
그는 물었습니다. 「이런 위원회에 철학자가 무슨 필요가 있나요?」
미셸 세르는 이렇게 대답했죠.
「여기에 이집트학 전문가가 빠졌다는 사실을 지적했지 않았겠소?」
아닌 게 아니라 철학자는 왜 필요할까요?
미셸 세르의 대답은 지금 우리의 주제, 즉 어리석음과 기막히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체 몇 살에,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며, 우리가 평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그 어리석음과 천박함과 멍청하고도 잔인한 고집과 만나야 하는 걸까요?
프랑스에는 철학에 입문할 수 있는 나이에 대한 논쟁이 -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죠 -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리세의 테르미날 과정에서 철학을 발견 하죠.
하지만 왜 좀 더 일찍 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왜 아이들에게 인류학에 입문시켜 주지 않는 겁니까?
인류학은 문화적 상대주의에 이르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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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사실, <빼기>에 의한 검열은 제거할 수 있지만, <더하기>에 의 한 검열을 제거하기란 훨씬 어려운 일이지요.
미디어가 이 <더하기 검열>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정치인이 어떤 신문사에 서한을 보내어, 지금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는 자신의 부패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신문사는 이 서한을 발표하지만, 이 기사를 바로 그 정치인이 어떤 스낵바에서 타르틴을 먹고 있
는 장면을 잡은 사진 바로 옆에 배치합니다.
그럼 끝난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이미지는 공금을 집어삼킨 한 남자를 암시하게 되니까요.
이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나라의 국가 수반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내일 미디어의 머리기사로 뜰 수 있는, 나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기사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 나는 오늘 밤, 중앙 역사에다 폭탄을 하나 장치해 놓는 겁니다.
그럼 내일 신문들은 머리기사를 바꾸게 되지요.
나는 어떤 테러 사건들의 숨은 이유는 바로 이런 차원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911 테러의 실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식의 음모론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고요. 이런 종류의 음모론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충분히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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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러한 테러 행위들은 때로는 아랍-이슬람 문명의 전부인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부정적인 모습들이 이 문명이 과거에 지녔던 위대함을 거의 다 가려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의 그 잔혹한 희생 의식들이 수 세기 동안 이 문명의 모든 아름다움들을 가려 왔듯이 말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피정복 문명의 잔혹한 이미지를 크게 증폭했고, 마침내는 이 잔혹한 희생제들 의 집단 기억이 그 문명에 대해 간직한 거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스페인 사람들은 이 문명의 흔적들을 쉽게 지워 버릴 수 있었죠.
오늘날 이슬람 역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장차 그것은 우리의 기억 가운데서 이 테러 폭력의 이미지로 환원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란 우리의 뇌와 마찬가지로 환원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는 선택과 환원을 통해 나아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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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에르 - 15세기 말경에 스페인 재정복이 완성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의 자문관이었던 시스네로스는 그라나다에서 발견된 모든 이슬람 서적을 의학 서적만 몇 권 남기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게 했습니다.
바에스의 말로는, 이 시대에 산출된 수피즘 시의 절반이 그때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류의 책을 파괴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라고 항상 주장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서구인들 역시 이 지식과 아름다움의 파괴에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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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베르길리우스는 임종의 순간에 『아이네이스』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지요!
이 파괴의 몽상들 속에 <세계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불에 의한 파괴>라는 원형적 관념이 숨어 있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즉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세계가 죽는다>라는 관념이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으로 히틀러도 세계 전체에다 불을 놓은 뒤 자살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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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 그렇습니다.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는 물론 창조가 있지요
(예술가의 창조, 제국 창건자의 창조, 사상가의 창조 등등).
하지만 창조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파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술 작품, 혹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거지요.
에로스트라트Erostrate의 경우를 봅시다. 그의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된 것은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 테미스 신전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오로지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목적으로 방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아테네 정부는 그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 금령은 충분치 못했지요. 그 증거로, 지금 우리는 에페수스의 신전을 지은 건축가의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에로스트라트의 이름만큼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로스트라트에게는 물론 수 많은 후계자들이 있었지요.
그들 중에서 우리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자신이 오쟁이 졌다고 떠들어 내는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겠죠. 그것은 자기 파괴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기사에 뜰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하기 위해 결국 발각되기를 원하는 연쇄 살인범도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카리에르 - 앤디 워홀은 이 욕망을 <15분 동안의 명성>이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지요.
에코 - 또 텔레비전에서 어떤 사람을 촬영하고 있을 때, 그 뒤에서 손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동일한 충동에 이끌리고 있 는 거지요.
겉보기에는 천치 같은 행동이지만, 그에게는 영광의 순간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