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편함, 고통, 슬픔, 아픔, 상처, 답답함, 불안함 등.. 은 흔히들 피할 수 있음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간혹 새해 덕담을 주고 받다 보면 꼭 "행복한 일만 있길 바래요" 라는 인사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편리함,안도,편안함, 기쁨, 행복, 해소감, 안정감.. 도 없음을 이젠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불편함, 불안함, 고통, 슬픔, 아픔, 상처들을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다. 여기서 불편함이란, 육체적 불편함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불편함이 더 어울릴 듯하다. 육체적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는 건 익숙하니깐 말이다. 즉, 이런 것들도 연습이 필요한거 같다. 이런 연습은 그 크기가 작을때 부터 시작해야 할거 같다. 예방이라는 건 더 이상적이지만, 그건 누군가의 가이드나 조언이 필요하니깐, 혼자서라면, 조금 아프고, 조금 불편하고,조금 슬프고,조금 답답하고,조금 불안할때 이를 다루는 연습을 해야할거 같다. 적고 보니, 조금이라는 말이 참 말이 안되는 말인거 같다. 처음 겪는 아픔은 당사자에게는 후에 그것이 별거 아니고, 작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당시에는 가장 힘들고 아프고 괴로울테니 말이다. 그러면 그 때 마주해야할것이라는 말이 어울릴 거 같다. 요리저리 피하는게 아니라, 그 아픔을 마주해야할거 같다. 왜 내가 아픈지 정확히는 당장 알지 모를지라도, 마주하며 고민하고 나름 노력을 하는 것은 피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다. 피한다는 것은 그 원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망각은 가능하지만 계속 피하다 보면 어느새 그 원인이 눈덩이처럼 커져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 원인이 본인의 어떤 생각때문이든 실제 어떤 문제 때문이든 말이다. 물론 정확히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 잠시 피하는 건 다른 거 같다.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문제때문인 경우는 당연히 피하는게 상책인거 같기도 하다. 말을 하다 보니 심각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 같지만 생각해보면 어릴때 아이들이 태어나서 느끼는 불편함, 고통, 아픔, 답답함은 연령에 맞게 심리발달 단계별로 원인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때는 본인의 심리발달에 과정에 맞게 마음의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불편함이나 답답함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하려고 돌아가려는 자정작용을 하게 될거 같다. 그 자정작용을 위해 자연스레 위에서 내가 말한 연습을 하는거 같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자연스런 자정작용을 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거 같다. 아님 방해하는 요소가 많은거 같다. 아니 적절한 가이드가 없기 때문이거 같기도 하다. 아니 그런 연습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거 같다.
우리 반에 2학년 남자아이 한명이 있다. 한번씩 억울하다거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불공평하다거나 뭐 이런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하게 교실에서 표출을 한다. 크게 소리를 내거나 주위 친구들을 때리거나 한다. 그럴 때 처음에는 나도 당황해서 우선은 사고가 나지 않도록 그 아이를 잡거나, 하지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조용할 뿐 내가 돌아서면 더 크게 심하게 했다. 수업하고 있는 중이라 최대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하고 그냥 수업을 하려고 했지만, 수업을 할 수 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판단해, 아이들에게 자습을 시켜놓고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차분히 앉아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니가 그래서 그랬구나, 라고 말을 했더니, 신기하게 아이가 고분고분해졌다. 그리고는 아무리 억울해도 친구들을 때리거나 니 맘대로 다른 친구들이 있을때 화풀이 하는건 잘못된거야,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런일이 2번 더 있었다. 2개월에 한번 꼴로 있었던 거 같다. 각 에피소드를 다 쓰려니 너무 길어진다. 어쨌든 이런일이 있으면 몇번은 부모님께도 알린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 아이가 들어오자 마자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저 어제 ADHA약을 안 먹어서 그런거였어요! " ...... 아... .내가 보기엔 넌 니가 틀렸다 생각하는거에 스트레스 받아 그 표현이 좀 커서 그렇지 약은 안 먹어도 될거 같은데, 그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면 좋을텐데 라고 말하며 그냥 넘어갔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남편도 오랫동안 약을 먹었다. 물론 현재 안먹은지 3년은 넘은거 같다. 남편이 말하길, 이런 약을 먹을때 얼마나 스스로가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아냐고, 내가 이런걸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해진다고 했다. 물론 그 약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입장도 안다, 하지만, 그 당사자도 내면에서는 얼마만큼이 내가 노력을 해야되는 부분이고, 얼마만큼이 본인도 어쩔 수 없다고 내려놓아야 하는 부분인건지, 혹시 단순한 게으름 때문은 아닌지, 기준이 없으니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냥 힘든 느낌이 들면 무조건 다 내려놓는 자신이 언젠가부터는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고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일인거 같았다. 하지만, 연습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 조차 힘든 것이 당연한것이다. 애초에 그 연습을 양육자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말 달라질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이기에 이 연습을 어떻게 보는것도 다 다를수 있겠지. 오히려 잘못된 가이드보다는, 차라리 가이드가 없는게,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습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아이는 약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안할지 모른다. 당연하게 먹을지 모른다.)
내가 재미있게 보고있는 책 중에서 "The giver"가 있는데, 거기서도 '다름'의 불편함, '욕'의 양면, '감정'의 양면, '생각' 의 양면 으로 인해 이런것들을 모두 약물로 다 통제하고 있다. 질서는 있지만 감정과 생각이 없는 공동체 모습을 그린책이다. 인간사에서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다 차단해버리는, 없애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다른것이겠지만 말이다. 콩을 가득담은 양동이에 죽은 파리한마리가 있다고 그것만 빼기가 힘들어 그냥 콩까지 다버리는 꼴이 된 것이다.
가끔은 아이들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구누구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누구는 이 수업 안들었음 좋겠어요.. 그래, 자기와 다르면 처음에는 불편하다. 이 이야기는 다음 수필에서 또 풀어 봐야겠다. 너무 길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