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943"('4 marzo 1943'('4 March 1943')이라고도 함)은 Lucio Dalla와 Paola Pallottino가 작곡한 1971년
노래입니다. 이 곡은 제21회 산레모 뮤직 페스티벌에서 Lucio Dalla와 Equipe 84의 더블 공연으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노래는 Dalla와 Pallottino가 Tremiti 섬을 여행하는 동안 작곡했습니다. 성공적인 라이브 공연 후 RCA Italiana
는 Sanremo Music Festival에서 노래를 발표하기로 결정했지만 처음에는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Age, Alberto
Bevilacqua, Vittorio Caprioli, Tonino Cervi, Fernando Chiglia, Sergio Corbucci, Mario Landi, Ubaldo Lay
및 Piero Vivarelli가 구성한 특별 "혁신 위원회"에 의해 선정되었으며, 이들은 4곡 선택을 담당했습니다. 예술적
관련성 때문에 축제에 추가될 가치가 있습니다. Sanremo 페스티벌 규칙에 따라 노래가 이중 공연으로 발표되도록 규정
함에 따라 Bobby Solo 및 Edoardo De Angelis를 포함하여 Dalla의 다양한 파트너가 테스트되었습니다. Dalla의
첫 번째 선택은 Duilio Del Prete였으며, Johnny Dorelli의 무대 회사와의 계약상의 의무로 인해 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Lucio Dalla OMRI(이탈리아어 발음: [ˈluːtʃo ˈdalla]; 1943년 3월 4일 – 2012년 3월 1일)는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
터, 음악가, 배우였습니다. 그는 또한 클라리넷과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달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테너 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에게 헌정한 노래 "Caruso"(1986)와 "L'anno che verrà"(1979)의 작곡가였습니다.
달라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볼로냐의 재즈 밴드에서 어린 나이에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미래의 영화 감독인 Pupi Avati와 함께 Rheno Dixieland Band라는 지역 재즈 밴드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Avati
는 Dalla의 재능에 압도되어 밴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영화 Ma quando arrivano
le ragazze? (2005)는 Dalla와의 우정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밴드는 프랑스 앙티브(Antibes)에서 열린
첫 번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했습니다. Rheno Dixieland Band는 전통 재즈 밴드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Second
Roman New Orleans Jazz Band라는 로마 밴드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Dalla는 1961년에 첫 번째 음반을 녹음했으며
그의 미래 음악인 RCA 레코드와 처음으로 접촉했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지노 파올리(Gino Paoli)는 달라의 보컬 능력을 듣고 소울 가수로서 솔리스트 활동을 시도해볼 것을 제안
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의 1965년 칸타기로 뮤직페스티벌 데뷔는 당시로서는 너무 실험적이라고 여겨졌던 그의 음악적
외모와 외모로 인해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첫 번째 싱글인 미국 전통 표준인 "Careless Love"를 이탈리아어로 연주
한 것은 실패였으며, 이듬해에 발매된 그의 첫 번째 앨범인 1999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다음 앨범인 Terra di Gaibola
(볼로냐 교외 이름에서 유래)는 1970년에 발매되었으며 초기 Dalla 클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히트곡
은 "1943년 4월 3일"로 산레모 페스티벌에 힘입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노래의 원래 제목은 "Gesù
bambino"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여전히 노래 내용에 대한 엄격한 검열 통제가 있었고
제목은 Dalla의 생년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4 Marzo 1943
- Lucio Dalla -
Dice che era un bell'uomo e veniva, veniva dal mare
parlava un'altra lingua, pero sapeva amare
e quel giorno lui prese a mia madre, sopra un bel prato
l'ora piu' dolce, prima d'essere ammazzato.
북풍에 눈보라 휘날리는 그 어느 날 밤에
버려진 돌멩이인 양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흐르는 눈물을 손등에 닦았다네
Cosi lei resto sola nella stanza, la stanza sul porto
con l'unico vestito, ogni giorno piu' corto
e benche' non sapesse il nome e neppure il paese
mi aspetto come un dono d'amore, fino dal primo mese.
세월이 흐르고 또 산천이 수없이 변해도
떠도는 철새처럼 나는 살아왔다네
단 한번 사랑한 그녀마저도 내 곁을 떠난 뒤
아픈 맘 달래며 흐느껴 울었다네
Compiva sedici anni, quel giorno la mia mamma
le strofe di taverna, le canto a ninna nanna
e stringendomi al petto che sapeva, sapeva di mare
giocava a far la donna, col bimbo da fasciare.
하늘엔 초록별 땅 위에는 아름다운 초원
아무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 뿐이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서
푸르른 대지를 웃으며 보고있네
E forse fu per gioco, o forse per amore
che mi volle chiamare, come Nostro Signore
della sua breve vita il ricordo, il ricordo piu' grosso
e' tutto in questo nome, che io mi porto addosso
세월이 흐르고 또 산천이 수없이 변해도
떠도는 철새처럼 나는 살아왔다네
단 한번 사랑한 그녀마저도 내 곁을 떠난 뒤
아픈 맘 달래며 흐느껴 울었다네
e ancora adesso che gioco a carte e bevo vino
per la gente del porto mi chiamo, Gesu Bambino
e ancora adesso che gioco a carte e bevo vino
per la gente del porto mi chiamo, Gesu Bambino
지금도 카드놀이를 하거나 와인을 마실 때면
항구 사람들에게 내 이름은 아기 예수다
지금도 카드놀이를 하거나 와인을 마실 때면
항구 사람들에게 내 이름은 아기 예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