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남파랑 길> 제7차, 여수에서 광양 망덕포구까지
2023년 9월 넷째 주 주말인 9월 22일(금요일) 24일(일요일)까지 여수시 소호 요트장에서 나로도를 거쳐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까지 답사할 예정입니다. 서해 해남의(땅끝)에서 해 뜨는 동해(부산 오륙도)까지 아름다운 바다 다도해와 한려수도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이번 기행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를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학의 현장들을 답사하면서 실시 될 예정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여수는 동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00리인데, 본래 여수현麗水縣이다”라고 실려 있는 여수 돌산대교를 지난 끝자락에 향일암向日庵이 있다
해돋이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영구암靈龜庵은 돌산읍과 용림리 금오산 중턱에 있는 절로, 사람들에게는 향일암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선덕여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을 당시에는 원통암圓通庵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윤필거사가 중창한 뒤에는 금오산의 이름을 따서 금오암金鰲庵으로 바꿔 불렀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영구암이 향일암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였다는 말이 있다. ‘일본을 바라보자’는 뜻에서 향일암이라 했다는 설과 한려수도 중에서도 가장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 떠오르는 천하절경의 해돋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향일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가파른 진입로에는 사람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다. 15분쯤 오르면 금오암의 일주문을 대신하는 바위문이 나타나고, 두 개의 바위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란 기이한 문을 지나면 영구암이 나타난다. 대웅전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는 나직하게 넓고, 눈 아래 기암절벽에는 동백나무 숲이 꽃을 피우고, 마을 쪽을 더 자세히 보면 거북이 불경을 등에 지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세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
여수시 군자동 중심가에 세워진 진남관은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2년에 삼도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세웠다. 임금이 사용하던 궁을 제외하고 지방에 세워진 목조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진남관은 길이 75미터, 높이 14미터에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총규모가 75칸에 이르며, 둘레가 2.4미터나되는 기둥만도 68개에 이른다. 연건평 240평에 이르는 이 건물은 고을마다 세웠던 관사로서 전주 객사처럼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를 영접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이곳에 궐패(闕牌, 임금을 상징하는 ‘궐’ 자를 새긴 위패)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참배하였다고 한다. 진남관 앞에는 일곱 개의 석인상石人像이 서 있었다는데, 지금은 여섯 개가 사라지고 한 개만 홀로 남아 진남관을 지키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석인상은 무인이 아닌 문인의 모습이다.
여수麗水는 ‘아름다운 물’이란 뜻이다. 섬이 점점이 떠 있고 산들이 둘러선 여수는 바다가 호수다. 여수 아닌 다른 곳이 여수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부끄러울 법하다. 월출산이 아닌 산이 월출산 이름을 가지기 힘든 것과 다르지 않다.
여수시 동산동에 있는 종고산鐘鼓山은 여수의 진산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던 날, 이 산이 은은한 종소리 같기도 하고 북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3일간에 걸쳐 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종고산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산은 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산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보효대報效臺와 북봉연대北峰烟臺라는 이름의 봉수대가 있었다. 여수는 세 마리의 용이 어울려 여의주와 같은 장군도를 두고 다투는 형국이라고 한다. 첫째 용은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종을 때리는 타봉처럼 생긴 남산동의 예암산隸巖山이고, 둘째 용은 돌산도, 셋째 용은 경호도鏡湖島라고 한다. 해발 219미터인 종고산은 종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 원래 소리가 쉽게 나고 쉽게 끊기는 종을 닮아서 여수 땅에서 모은 재물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여수 사람들 중에는 ‘종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 여수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동안 모은 재물을 깡그리 잃는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서 한밑천 잡으면 부랴부랴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여수가 수산업을 중심으로 발달한 항구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할 터인데, 현재는 그런 말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여수에는 거북선을 만들던 선소가 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 이가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를 충무공의 도시라 하나 여수는 충무와 나란히 충무공의 혼이 밴 곳이요, 충무공의 기개가 서린 땅이다. 충무에는 한산도의 고뇌와 수심이 깊었으나, 여수에는 종고산의 종과 북이 천지를 진동한다.
일본 도쿄 인근의 닛코에는 일본 영웅의 신사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절정에 이른 무인시대를 끝내고 일본에 전란이 없는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는 사당이다. 일본은 이 사당으로 일본 문화의 진수를 극진하게 펼쳐냈다. 일본의 지인에게 죽기 전에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 후지산이 아니라 닛코라는 말에 놀란 일이 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전란을 없애고 평화를 들인 공에 기인함을 알고 수긍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지켜냈다. 마지막 전쟁으로 전란을 종결지었고 마지막 전쟁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전력 열세에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혼과 기백이 웅혼하게 천지를 진동하는 곳이 종고산이요, 그 산자락에 전라좌수영의 본거지 진남관이 서 있다. 바다호수를 가르며 우뚝 솟은 종고산에 종소리,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선소에서 출발한 거북선이 바다호수를 가른다.(...)
진달래 꽃이 아름다운 흥국사,
진달래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취산 자락 여수시 중흥동에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흥국사 사적기〉에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택지를 택해서 가람을 창설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이 흥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절은 나라의 번영을 위해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에 보조국사 지눌이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 있을 때 큰 절을 세울 터를 찾기 위해 날려 보낸 비둘기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내려앉은 곳에 지은 호국 사찰이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암대사가 이 절의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임진왜란 당시 절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인조 2년 계특대사가 중건하였고, 1760년경에 총 건평 624평에 승려 649명이 상주하는 큰 사찰이 된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등 15채이고, 그 밖에 홍교(무지개다리, 보물 제563호)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만나는 유물은 계곡 양쪽에 걸쳐 있는 홍교다. 인조 때 만들어진 이 다리는 길이가 40미터, 높이가 5.5미터, 폭은 11.3미터, 내벽이 3.45미터로, 남아 있는 무지개다리 중 나라 안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부채꼴 모양의 화강석 86개를 맞추어 틀어 올린 홍교는 완전한 반달을 이루고 있고, 단아하고 시원스러운 다리 양옆에는 학이 날개를 펼친 듯 둥글둥글한 잡석으로 쌓아올린 벽이 길게 뻗어 있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측면의 석벽은 이른바 난적亂積 쌓기로 무질서하면서도 정제된 석축의 미를 보여주는데, 끝부분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곡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미를 잘 보여준다. 다리 밑에서 보면 다리 한복판에 양쪽으로 마루돌이 돌출되어 있고, 그 끝에 양각으로 새긴 용두가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흥국사 홍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난에 대비하여 흥국사에 주둔했던 승병에 불안을 느낀 관아에서 지맥을 끊고자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3백 명이나 되는 승병이 하는 일 없이 놀며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여수 북동쪽에 광양만이 있다. 광양만에 자리한 광양의 백제 때 이름은 마로현馬老縣이었다. 신라 때 희양晞陽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신영손의 시에 “땅이 남쪽 바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된 광양의 진산은 백운산에 맞닿은 백계산白雞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백계산을 두고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머리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샘이 있으며 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난다. 무릇 비는 것이 있으면 문득 효험이 있고 재계齋戒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샘이 마른다.”라고 하였는데,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이 산의 지세가 왕성함을 보고 이 곳에 머무르며 옥룡사玉龍寺와 중흥사를 창건했고, 72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경상도의 하동 땅과 마주 보는 다압면은 봄의 전령인 매화와 매실로 소문이 자자한 청매실 농장과 섬진나루가 있는 곳이다. 길이가 28킬로미터로 나라 안에서 가장 긴 면이며, 이곳에 있던 섬진나루에 섬진강의 유래가 서려 있다.
섬진강의 단군 조선 때 이름은 모래내 또는 모래가람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모래가 자꾸 쌓여 다사강이라 하였고, 지금도 하동 부근에는 모래가 많다. 고려 초에는 두치강이라고 부르다가 고려 말인 1385년에 섬진강으로 고쳤다. 그 후 중상류 지역에 민둥산이 많아 여름이면 홍수가 나서 붉은 흙탕물투성이라 적강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섬진강의 섬은 두꺼비 섬蟾 자다. 그 이유는 고려 때 어느 한여름 장마철에 두꺼비가 줄을 지어 몰려들었는데 얼마나 많았는지 늘어선 길이가 자그마치 10리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이 지역에 침입하자 금 두꺼비들이 몰려들어 시끄럽게 울어대니 왜구가 불길함을 느껴 물러났다고 하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모래가 많다는 뜻의 다사강 또는 대사강이라는 이름 대신 섬진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전라도 여수와 광양
여수 밤바다로 이름난 여수와 광양 일대를 답사하는 남파랑길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1. 일시: 2023년 9월 22일(금요일)-24일까지(일요일)
2. 출발 시간 및 장소: 서울 저녁 7시, 양재역 12번 출구 서초구청 앞
전주 저녁 9시 20분, 전주 월드컵경기장 싸우나 입구,
3. 참가비: 20만원
4. 어디로 가나요: 남파랑 길 56코스에서 49코스까지.
여수 소호 요트장, 여수항, 진남관, 향일암, 흥국사, 홍교, 순천 왜성, 광양, 배일도,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윤동주 유고 보존가옥, 섬진강 휴게소,
5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신 택리지( 전라도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코로나 접종을 마친 사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참가합니다/김순복/안성출발
참가합니다/임영남,박선자/여/전주.
임영혜 안성 출발
참가합니다 / 정애자 / 양재 출발
참가합니다/ 박현임, 신종인/ 죽전
참가합니다. 전주. 남.
ㅁ이동심참석합니다 ~
벼리, 푸르니, 하이디 참석합니다. 전주
이준태 참석합니다.
참가합니다 / 장상수 / 서울
참가합니다
정순연,이찬호/서울
참가합니다/손남순/전주
참가합니다/이광호/서울
참가합니다 ,매버릭 전주
소백산 회비로 대체바랍니다
김경자 김희영
참가합니다
이경찬 양재탑승 입금완료
참가합니다/한차수(남)/정숙녀(여)/양재탑승
참가합니다/고문규/양재/입금완료
참가합니다/ 전주 유정옥 /여 / 지난번 회비로 대체바랍니다
참가신청합니다
입금완료 / 전주출발
참가합니다/이대주/양재/남/입금완료
최명희(여) 양재탑승 입금완료
김철수 참가 양재
김정주 / 양재 참가합니다
참가합니다/박해숙/전주 입금합니다.
참가합니다/양재/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