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이야기-강동구⑤] 노옥당과 동명 대장간
일요서울 2023.06.02
십자성마을 다음 목적지는 노옥당 한약업사다. ‘한의사’, ‘한약재사’, ‘한약사’는 들어봤다. 아니 귀한 대접을 받는 직업이니 누구나 알 것이다. ‘한약업사’, 그 이름이 생소하다. 사전을 찾았다. 옛 이름이 한약종상(韓藥種商)이라고 했다. 풀어서 얘기하면 한약방이다. 한약업사는 한약방 혹은 한약방 주인을 뜻한다. 거의 사라져 가는 이름이다. 사라져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과 존재가 흐려지고 결국 없어지고 있는 상태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에 더 의미를 두려고 한다. 그렇다. 노옥당 한약업사도 ‘서울미래유산’이다.
동명대장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1930년 개업 동명대장간 주인 불꽃 흉터...노포의 자부심 느껴져
십자성마을에서 카카오 지도를 검색했다. 천중로 35길 우회전 후 95m 이동 → 상암로 좌회전 후 382m 이동 → 구천면로 광진교 방면으로 좌회전 후 334m 이동 → 천중로 올림픽로 방면으로 우회전 후 274m 이동 → 천중로 16길 좌회전 후 240m 이동. 길치인 필자는 카카오 지도의 안내를 따라 목적지에 간신히 도착했다.
# ‘서울미래유산’ 무색한 한약업사 ‘노옥당’ 풍경
그런데 노옥당 한약업사는 없다.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위치를 물었다. 다들 모른단다. 난감해하고 있던 순간 식사 중인 한 아주머니가 “되돌아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라”라고 일러줬다. 명예스러운 서울미래유산과 어울리지 않은 골목이다. 골목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노옥당 약업사’라는 현판이 2층에 걸려있다. 겉으로 보아서는 노옥당의 역사와 전통을 알 수 없다. 1985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때문이다.
1975년 손기수 씨가 천호시장 초입에서 ‘노옥당 한약업사’라는 이름으로 약초를 팔았다고 한다. 특히 강동구에서 유일하게 소매와 도매를 취급하는 대표적인 약재상이었다. 노옥당의 명성은 꽤 높았다고 한다. 노옥당은 약초를 재배했던 전남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의 앞 글자인 '노'와 '옥'을 딴 거라고 한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문은 닫혀 있다. 그 역사를 찾을 길이 없다. ‘서울미래유산’이라고 했는데 상징 도안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에 붙어 있는 ‘노옥당약업사’라는 낡은 목재 현판뿐이다.
노옥당 한약업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약방은 현대 의료체계가 도입되기 전인 ‘조선시대의 병원’이었다. 약초가공 공장이기도 했다. 한약종상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의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한약업사였다. 이 때문에 일경에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우리 한방을 보다 체계화하기 위해 ‘한의과대학’ 설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 한의사들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한약업사가 사라질 위기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 역시 노옥당 한약업사에 있는 다양한 한약재를 구경도 할 수 없는 게 아쉽다.
# 한약방, ‘조선시대의 병원’역할...사라질 위기
다시 길을 걷는다. 동명대장간을 둘러볼 예정이다. 동명대장간은 1930년대 말에 개업했다. 거의 100년 동안 3대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 대장간이다. 천호동의 옛 이름은 ‘즈믄마을’이다. 즈믄은 천(千)의 우리말이다. 흔히 1,000가구가 사는 큰 동네라는 뜻이다. 꼭 1,000가구만 살았을까. 그만큼 동네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랬다. 동명대장간으로 가기 위해 지도를 다시 봤다. 그런데 노옥당 한약업사가 바로 천호공원 인근에 있는 게 아닌가. 천호역-강동역-고분다리역을 돌아 다시 천호역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았다. 여행길이 쳇바퀴라고 해도 그것은 전혀 따분하지 않다. 길에는 예상하지 못한 기쁜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천호동 냉면거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천호동 삼거리로 향하는 길에 독특한 조형물을 만났다. 젓가락으로 면을 든 모양이었다. 조형물 기둥에 ‘냉면거리 입구’라고 적혀 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필자는 냉면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냉면 골목은 보이지 않았다. 조형물 건너편 공사장 가림막에 냉면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글씨가 보인다. ‘천호동 냉면거리 100m ↲’가 그것이다. 되돌아서 100m 가라는 뜻인 듯했다. 궁금한 맘을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4차선 직선로를 따라 충분히 걸은 듯하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금세 끝났다. 냉면집도 많아 보이지 않는다. 대여섯 개에 불과했다. ‘냉면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골목 입구는 공사가 한창 중이다. 주택 정비 공사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냉면집에 들어갔다. 여성 주인에게 “냉면 골목이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였다.
# ‘천호동 냉면거리’ 초라해도 ‘맛’은 일품
냉면 골목이 생겨난 것은 약 30년 전인 1990년대 초라고 한다. 천호동 시장 주변에서 포장마차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한 둘씩 모여 냉면 골목을 형성했다고 한다. 냉면 맛을 봤다. 아! 명성은 규모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맛이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마포구의 ㅇ, 중구의 ㅍ, ㅇ, ㅎ 등 미식가의 성지인 냉면 전문점의 맛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천호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했다. 큰길을 따라 수백m를 걸어 올라갔다. 천호동 삼거리는 공사 중이었다. 길을 따라 강동천호 행복주택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길 건너편은 천호4촉진구역 도시환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가림막 뒤로 거대한 크레인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크레인은 이곳이 얼마나 번화하고 변화에 민감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물이다. 바로 이곳에 100년 가까이 전통 방식으로 쇠를 달구는 동명대장간이 있다. 가게를 둘러보기도 전에 동명대장간의 앞날이 걱정됐다.
동명대장간 입구 모습.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동명대장간 문이 열려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인 ‘칼 가위 갈아 드립니다’였다. 그런데 대장간은 외부인의 출입을 경계하고 있었다. 손과 땀으로 만든 낫, 호미, 괭이, 삽 등 농기구와 다양한 공구가 가지런하게 정돈된 수납장은 대장간의 내부를 감추고 있다. 그런데 상호가 보이지 않았다. 상호 없이 ‘철물 대장간 공구’라고만 쓰여 있다.
모두 다 아는 노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한쪽 구석 유일하게 비어 있는 유리창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백년 가게’, ‘우리마을 자세히 알기’ 등 3개의 상징 도안이 붙어 있다. 상호를 대신해도 충분한 자랑스러운 증표다. 그런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칼 가위 갈아 드립니다’라는 홍보문구 옆에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번갈아 ‘동명대장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 서울백년가게, 서울미래유산 ‘나홀로’ 주인 반겨
동명대장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 안으로 고개를 살며시 들이밀었다. 주인인 강영기 씨는 홀로 야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동명대장간으로 들어갔다. 대장간의 공간에는 사람을 위한 자리는 오직 의자 하나뿐이었다. 풀무질-달금질-집게질과 메질-담금질하기 위한 공간만 있을 뿐이다. 화로, 다듬질 기계, 망치와 집게……. 쇠를 화덕에 넣어 달구고 두드리고 늘이고 담금질하는 대장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도 손님이 있는지 궁금했다. 강영기 씨는 무심하게 “손님이 없으면 문을 열어 놓겠느냐”고 말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노포의 주인의 자부심도 느껴진다. 문을 나서며 강영기 씨의 손을 봤다. 어두운 대장간 안에서도 불꽃의 흉터가 보였다. 흉터는 곧 그의 삶이었다.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동명대장간은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 대장간은 생산지로서 서울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로써 지방 대장간과 구별되는 특징을 인정받았다. 동명대장간은 1930년대 말에 개업했다. 거의 100년 동안 3대에 걸쳐 명맥을 면면히 이어져 오다. 고 강태봉 씨가 1930년대에 동명대장간을 강원도 철원에서 창업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곳으로 옮겼고 아들이 강영기 씨가 14살부터 대를 이어 아버지를 도왔다. 지금은 창업주의 손자인 단호 씨가 아버지 영기 씨를 돕고 있다.
# 100년 동안 3대에 걸쳐 명맥 유지 동명대장간
동명대장간 내부모습.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동명대장간, 이런 것이 추억과 향수인가. 필자의 숨통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십여 년 전에는 나무통을 맨 사람이 “칼 가위 갑니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장간을 꾸릴 돈이 없는 사람의 생계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대장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10여 년 전에 천호동에만 세 개의 대장간이 있었다. 동네마다 한 둘씩 있던 대장간이 중국산 제품과 경쟁력에 밀려난 것이다. 평일에는 강 씨 부자가 노포를 지키는 일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