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7,23-28
복 음 : 루카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무지無知의 악惡
-약藥은 예수님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말씀 묵상중 도달한 결론이자 강론 제목은 ‘무지無知의 악惡-약藥은 예수님뿐이다’입니다.
치유 받아야할 악惡이자 병病이요 죄罪가 무지라는 것이며 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의 약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악惡’과 ‘약藥’의 발음이 비슷하여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의 약은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를 저는 이렇게 알아들었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정말 무지의 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 편에 서라는 촉구말씀입니다.
중간은 없고 예수님 편에 서느냐 반대편에 서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빛이신 예수님뿐입니다.
하여 새삼 미사은총이 얼마나 깊고 고마운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비로소 무지의 악은 치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악이 바로 악의 현실을 입증합니다.
선을 향하지만 악으로 기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창세기의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6,5).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8,21).
얼마 전 예레미야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17,9-10)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되는 부정적 악한 인간현실입니다.
이런 악한 현실은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에서도 루카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오늘 인간현실에 대입해도 그대로 통하는 주님의 탄식입니다.
복음에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대해서도 무지의 눈먼 이들의 악한 반응이 눈에 띱니다.
군중은 놀라워 할뿐 믿음으로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그들 중 몇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치유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표징인데 무지의 편견에 눈멀어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모실 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것입니다.
무지의 악을, 무지의 어둠을 퇴치할 수 있는 분도 빛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악의 정체는 헛것입니다. 헛것에 휘둘리는 무지한 인간입니다.
악은 탄로되면 저절로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나도 성폭력을 고발한다!’ 라는 여성들의 ‘미투me too’운동이요 신자들의 고해성사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어둠의 악, 무지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입니다.
이 또한 부정적 인간의 정의입니다.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지금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야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하느님을 떠나 있으니 무지의 어둠, 무지의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라는 악과 병의 치유에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주님은 예례미야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들어라-걸어라-잘 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성서는 온통 ‘들어라!’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분도 규칙 역시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들어야 회개요 무지의 악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들어야 주님과의 관계도 깊어지기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의 요약이자 사순시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 마라.”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영원한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주님 향해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께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들을 때 은총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무지의 악을 폭로하여 헛것임을 드러내는 영원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 영원한 포로가 된 무지의 악입니다.
빛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어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예수님과 일치뿐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할 때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온유와 겸손, 사랑과 진실, 지혜와 자비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목표입니다. 아멘.
완고함을 버리고 온유하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예레 7,2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고”(7,24),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습니다.”(7,26)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주님을 차지하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겨 버렸습니다(7,28).
그들은 완고하여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이자 행동 규범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
곧 성령의 힘으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루카 11,14).
그분께서는 이 치유로 자신이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거나,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11,15-16).
완고하여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 사이에 가림막을 쳐버린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의지하고 신뢰하려는 생각과 행동이 바로 완고함입니다.
완고한 사람은 자기 힘과 뜻이 중심을 이루므로 유연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셉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을 듣고 받아들일 여백이 적습니다.
그래서 온유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습니다.
완고함은 나를 보호해 주거나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고유함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독이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완고함은 하느님을 밀어내고 자기 뜻을 내세우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한 사람은 자신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님과 단절된 감옥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완고함의 감옥에서 나와 온유의 옷을 입어야겠습니다.
온유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가난한', '비천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곧 온유해진다는 것은 가난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도 완고함과 고집의 가림막을 찢고 가난하고 온유한 자 되어,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간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하고 있던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감정 코치인 존 가트맨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습니다.
“부부간의 긍정적인 소통과 부정적인 소통이 5:1일 때 결혼 생활이 순탄할 확률이 높고,
이 비율이 1:1일 때는 이혼하게 될 확률이 높다.
직장에서도 긍정과 부정의 소통 비율이 3:1을 웃도는 팀이
못 미치는 팀보다 월등히 높은 생산성을 발휘한다.
부정적인 소통이 잦은 팀은 성장이 멈추었고, 생산성도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긍정적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발표입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마음이 삶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삶 안에서 활력을 보입니다.
이 활력을 보고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새로운 기회와 생각 그리고 놀라운 정보가 유입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곁에 오랫동안 있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 곁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긍정적 심리학이 요즘에 큰 두각을 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도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하는데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을 향해서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듯이, 마귀들이 인간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자기편을 없애버려는 어리석인 행동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말을 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요?
마귀를 없애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을 향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마음 자체를 갖지 않으려고 하고, 무조건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니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직접 오신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생을 잃은 것입니다.
이 과정이 너무 억울했기에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슬퍼할 수는 있지만 분노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큰 지혜가 보이는 말씀입니다.
분노할수록 제대로 된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분명히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십니까? 내가 바라보는 시각을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제 손으로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 1987년이 처음입니다.
그전에는 체육관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투표할 나이가 되지 않아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저는 군에서 투표를 하였습니다.
민주 정의당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당시 야당은 통일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평화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가 있었습니다.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기를 바랐지만 단일화는 실패하였고,
더 많은 득표를 야당 쪽에서 하였지만 결과는 민주 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3당 합당을 이룩한 민주 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김종필 후보와 합당을 이룩한 새정치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는 3번의 선거를 보면서 분열하면 실패하고, 단합하면 성공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매년 사제 서품을 통해서 새 사제들이 사목을 시작합니다.
만일 새 사제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서울대교구는 곧 늙은 사제들만 있는 교구가 될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가 지금 그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가 있던 캐나다도 그런 상황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새 사제들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직자들의 가족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청하도록 하십시오.’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장에서 나와 온 몸을 돌아다닙니다.
신선한 공기와 영양분을 공급해주고 노폐물은 정화시켜서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피’입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아직도 피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에 부족한 피는 다른 사람들의 헌혈을 통해서 채워집니다.
우리 몸에 다른 이들의 피를 받아들이는 것을 ‘수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피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혈액형으로 피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A, B, AB, O’형의 혈액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RH라는 혈액형도 있습니다.
수혈을 하기 전에 우리는 꼭 혈액형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혈을 해도 소용이 없고, 잘못하면 오히려 생명이 위험해 지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분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진실, 역사의 왜곡입니다.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박종철 고문은 진실이 왜곡으로 바뀌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간첩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송과 언론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봄비가 밤 내내 새벽까지 촉촉이 내리고 있습니다.
사순시기에 떠오르는 시 이 재무 시인의 “봄비”의 시 한 구절입니다.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루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 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보이며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그렇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봄의 새로운 새싹이 생글생글 돋을 것입니다.
곧 그 부활이 오면, 꽃들로 만발할 것입니다.
우리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꼭 그리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인 것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대적하며 악담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모아들이는 삶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모아들이는 삶은
인내로이 기다려주고
사랑으로 가꾸는
구원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아프게 버려진
소중한 이웃들을
다시 모아들이십니다.
밀알이
되지 않고서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서는
결코 모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늘 모아들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우리들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은총의 사순입니다.
아무 것도
건져 올리지 못한 까닭은
예수님과 함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모아들임의
새로운 역사에
기쁘게 참여하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를 살리기 위해
흩어진 우리들을
모아들이십니다.
모아들임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혀의 칼
전삼용 요셉 신부
저는 금니를 두 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군대에서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조금 떨어져 나갔는데
때우기가 불편해 갈아버리고 금으로 씌워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얼마나 딱딱한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욱신거려 가 보았더니 치아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씹으면 더 갈라지고 더 아팠던 것입니다. 금으로 씌우고 나니 갈라질 일은 없어 다행입니다.
저는 어떤 단체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이면 갈라졌던 치아를 생각합니다.
갈라진 치아로는 김치 하나 씹을 수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치아 하나가 갈라지니 그 쪽 다른 정상적인 치아들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체가 갈라지면 그 단체를 통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오히려 신경만 쓰이게 됩니다.
대천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만에 의해 하느님과 갈라졌던 사탄은
그 무리들과 함께 인간도 끊임없이 갈라지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를 교만으로 유혹하여 하느님과 분열되게 하고
남자와 여자가 분열되게 하고 형제들 간에 또 나아가 나라를 분열시키게 만듭니다.
물론 가장 먼저는 자신 안에서 영혼과 육체의 분열을 체험하게 합니다.
즉, 마음은 하고 싶은데 몸이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님은 갈라진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힘이십니다.
마치 갈라진 치아를 덮는 금니와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금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7가지의 금 촛대와 금으로 도금된 약의 궤와 예루살렘의 금으로 된 광장 등이 다 성령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이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자상하게 어떤 나라도 갈라지면 망하게 마련이고 마귀들도 갈라지지 않고 서로 하나가 되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모독해도 성령님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서 나오는 힘은 바로 성령님의 힘인데 그것을 사탄의 힘이라 모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욕을 먹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욕하는 것은 못 참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고 사랑은 갈라진 것을 하나 되게 합니다.
마귀는 그 반대로 사람들이 갈라지게 만듭니다.
둘은 우리 안에서 항상 싸움을 합니다. 즉, 하느님과 사탄만이 그 안에 온전한 일치가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고 사탄에게는 빛이 전혀 없으니 그 안에서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분열만을 좋아하는 마귀가 서로 갈라질 수 없는 이유는 공공의 적이 있기 때문이고 공공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목적이란 인간을 서로 갈라놓는 일입니다.
둘은 인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성령님과 악령을 무기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도 이것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선입관을 갖게 하여 다른 사람과 갈라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혀가 가장 무서운 사탄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담이나 고해보는 것이 아니라면 암시적으로라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누구에게든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착했다가 최후의 만찬 때 돌변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겼을까요?
사람은 절대 그렇게 빠르게 변하지 않습니다. 바오로조차도 회개하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요한의 말대로 유다는 처음부터 도둑이었고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가는데 제자들이 아무도 말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배신당할 것을 감수해가면서도
유다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행동이 어리석어보이지만 예수님은 사도단이 갈라지는 것보다는
당신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다른 이들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사람을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항상 말을 조심하여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