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 정세규(鄭世規)는 병자호란때에 충청감사로 있었다.
이때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한창 급하므로, 승려를 모집하여 줄에 매달려 성을 넘어가 근왕의 군사를 부르게 하였다.
그 중이 공주감영에 당도함으로써 정감사는 변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진이 무너져 죽게 되었다가 다행히 면하였다.
정공의 생각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니 의리상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것이었으며, 약한 군사가 강한 도적을 대항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르는 바 아니었다.
죽음을 기약했는데 죽지 않은 것은 행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도 그를 충인이라 여겼다.
그 뒤에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덕과 지위의 성함이 당세에 비할 자 없었으니, 싸움에 패하고서도 공이 된 것은 천고에 이 한 사람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