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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을 거닐며
차가운 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던 날, 사랑스런 제자들과 상당산성 등반에 나섰다. 등반이라기보다는 거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남문에서 출발하여 산성을 도는 등산로가 여러 갈래인데, 그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코스를 택하여 등반키로 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산등성이엔 말라가는 낙엽들과 앙상하게 헐벗은 나뭇가지들만 보였다. 찬바람이 불어올 매서운 날들을 담담하게 기다리는 듯, 숲길은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밤사이 모진 날씨에 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들,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추억의 파편들이 허공 속에 맴돈다.
지난여름 태풍으로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잘라 놓았다는 나무토막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문득 과거를 떠올리며 땔감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땔감으로 쓰지 않고 그냥 쓸모없이 버려지고 있다. 아깝다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나무토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잘려진 단면으로 나이태가 보인다.
너 몇 살이니? 아무런 응답이 없다. 묻고 또 물어봐도 묵묵히 제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대답이 없다. 갑자기 이방객이 찾아와 말을 건네니 낯선 탐이 많은 그 녀석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말을 건 내가 잘못인가 싶어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모퉁이 돌아서는 길,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소나무들이 멋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낙엽이 흩날리는 벤치엔 소곤 소곤거리는 얘기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햇살을 향해 뻗은 꽃나무 가지들이 눈부시다. 노란색 단풍잎도 간혹 눈에 띄었다. 색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지금 손 놓고 있는 연필 스케치,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화폭에 담기위해서다. 아쉽지만 오늘은 눈으로만 담아보기로 했다.
하산 길로 접어드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야 ~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린다. 올해의 첫눈이다. 첫눈치고는 제법 많은 눈이 내리는 것 같다. 순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감정을 억제 해 보지만 조절능력의 한계에 부딪친 모양이다. 옆에 지나가는 등산객이 놀라 물끄러미 쳐다본다.
주위시선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첫눈이 온다는 사실을 저 멀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환희도 잠시 뿐이었다. 눈송이가 차츰 작아지면서 눈이 그치기 시작한다. 아쉬움 속에 식당 앞에 도착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점심 때가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등산을 마치고 온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저기에서 위하여~ 건배소리가 요란하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자고 하는 걸까.
행복, 건강 또는 건승? 무엇이든 다 좋다. 듣고 또 들어도 싫지 않은 외침이다. 그것이 바로 민초들의 합창이기 때문이리라.
짐을 풀고 컬컬한 막걸리에 목을 축이니 이 세상 무엇 하나 부러울게 없다. 한 잔술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들, 조금 전 걸어왔던 상당산성의 고요한 숲길, 수북이 쌓인 낙엽, 그 아름다운 모습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인생과 낙엽의 의미를 생각 해 본다.
세월은 흘러 사라짐에 소리 없고, 나뭇잎은 때 따라 떨어짐에 소리 없고, 생각은 사람의 깊은 흔적에 소리 없고, 인간사 바뀌며 사람 짐에 소리 없다.
아~ 이세상 사는 자 죽는 자 그 풀밭 사람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 그토록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하였더니 이제는 말없이 사라져 가고 있구나.
우리 인생도 낙엽과 다를 바 없다. 잠시 왔다 가는 인생이 아니던가, 단풍이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듯이 우리도 남을 위해 배려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겨울의 문턱에서 산성을 거니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라지만 숲속을 거닐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 해 보는 시간이다. 우리의 삶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질풍같이 달려온 지금은 풍요롭다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잃은게 많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이뤘다곤 하지만, 우린 혼을 놔둔 채 여기까지 뛰어왔다. 그저 뒤도 안보고 달려온 길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언젠가는 속도가 버리고 간 삶의 방향을 잃은 채 가난한 왕자처럼 우린 스스로의 행복을 이미 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린 찬란한 네온 불빛에 휘청거리는 취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린 불그레한 샴페인에 이미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혼이 건강해야 건강한 행복이 있다. 이제 더불어 살아가는 멋을 배워야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맛을 배워야한다. 오늘, 상당산성을 거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於 有餘堂 隨筆文學家/ 度談 林栽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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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작가님 근교산행 했군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