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네스 슈나이더(Hannes Schneider) =
-근대 스키의 아버지(The Father of Modern Ski)-
지난 2001년 3월 9일~10일 이틀 동안 뉴햄프셔 주 노스 콘웨이란 마을에 있는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Mt. Cranmore, North Conway, VT)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곳, 버몬트 주의 벌링턴(Burlington, VT)에서 3시간 거리에 떨어진 조그만 마을, 리프트 5대에 슬로프가 기껏해야 10 여 개 정도인 작은 스키장입니다.
가까운 거리에, 공짜로 탈 수 있는 슈가부시(Sugarbush) 스키장이나 유서 깊은 아름다운 스토우(Stowe) 스키장을 지나서 혼자 이 곳으로 달려간 이유는 여기에 살고 계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허버트 슈나이더(Herbert Schneider).
'근대 스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대한 스키 마이스터(skimeister), 한네스 슈나이더의 외아들로서 1900년대 초 알파인 스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스트리아 생 안톤(St. Anton am Arlberg: 2001년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가 열린 곳) 스키의 계보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분입니다. (그림 1:Hannes Schneider, 1890~1955)
사실 재작년 버몬트로 유학을 오기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여기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꼭 가서 만나야 겠다는 생각을 숙제처럼 갖고 있었습니다. 이왕이면 스키 시즌에 방문한다는 것이 작년에는 할아버지께서 오스트리아를 장기 방문하시는 바람에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올 시즌 들어 적당한 시간을 고르던 중, 제가 슈나이더 일가의 역사에 관심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뉴잉글랜드 스키 박물관 사무장 제프 리치(Jeff Leich)가 이 곳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에서 '한네스 슈나이더 추모 스키 대회(Hannes Schneider Meister Cup Race)'가 열린다는 것을 알려 주었고, 덕분에 프레스 자격으로 방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웬 사이비 기자?^^)
제가 한네스 슈나이더의 일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처음 스키 부상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들춰 보는 과정에서, 현재의 스키 부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00 여 년에 걸친 근대 스키 장비 및 기술의 발달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스키 역사에 관련된 서적 및 문헌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구할 수 있는 자료가 한정되어있던 까닭에 외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는 어김 없이 박물관이나 서점에 들렸습니다. 특히 이 곳 버몬트 주변의 오래된 중고 서점에서 재미있는 자료들을 많이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뉴잉글랜드 스키 박물관에서는 영문으로 쓰인 최초의 스키 책인 'The Winter Sport of Skeeing'(by Theodore A. Johnson, 1905 *당시에는 'Skeeing'이라고 표기했습니다.)의 보존판을 구했고, 중고 서점에서는 30년대에 나온 유일한 스키책인 'Modern Ski Technique(by Otto Schniebs, 1932)'과 'The Art of Skiing(by Charles N. Proctor, 1933)'을 단 돈 5불에 살 수 있었습니다. 1938년 보이스카웃 교과서를 8불에, 1938년 패트롤 시스템의 창시자인 챨스 돌(Charles Minot Dole)이 만든 NSPS(National Ski Patrol System)의 매뉴얼 등 귀한 책들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골동품, 미술품 등을 수집하는 일을 비생산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이런 분들의 마인드를 전혀 이해 못했었는데, 이러다 보니깐 차츰 '수집(collection)'이란 것을 조금 알게 되더군요. 그리고 만일 이게 책, 문헌을 넘어서서 실물을 수집하기 시작하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거슬러 올라가 보니 장비, 기술과 부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며 변해 왔고, 그 무대에는 첨예한 경쟁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두 나라가 주연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도 이전, 알파인 스키의 태동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알베르그 지방의 생 안톤이라는 마을이 등장하고, 맨 위에는 전설적인 스키 마이스터, 한네스 슈나이더 선생님이 우뚝 서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서구 스키의 발생지는 노르웨이입니다. 여기서는 알파인 스키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한네스 슈나이더는 1890년 오스트리아 알베르그 지방의 스투벤(Stuben am Arlberg)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기 말 스키 기술은 노르웨이 텔레마크(Telemark, Norway) 지방의 노르하임(Sondre Norheim)이 개발한 '텔레마크 회전(Telemark turn)'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절입니다.(그림 2-1,2: 노르하임과 그가 개발한 스키) (그림 3: 노르웨이에서 유래한 텔레마크 턴과 크리스차이나 턴의 모식도)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완만한 산에 비해 가파르고 험한 알프스를 내려오기에는 당시의 텔레마크 장비와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알프스 지역 사람들에게는 보다 효과적인 회전 방법이 필요하였습니다. 결국 1890년대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 알프스 지역인 릴리엔필드(Lilienfeld)에 살던 짜르스키(Mathias Zdarsky)에 의해, 스키를 벌려 제동을 거는, 초기 단계의 '푸르그 보겐(pflug bogen)'과 '스템 턴(stem turn)'이 개발되었던 것입니다.(그림 4: 짜르스키의 스킹)
슈나이더는 14세가 되던 해 짜르스키의 영향을 받아, 릴리엔필드 스타일의 기술, 즉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추고(crouching), 스키를 벌려 회전을 하는(stem) 방식의 스키를 배웠습니다. 이 기술은 이후 그가 정립하는 '알베르그 시스템(Arlberg system)'의 기초가 됩니다. 스키에 심취한 슈나이더는 17세가 되던 1907년 치즈 생산업을 이어 받으라는 아버님의 뜻을 어기고 생 안톤(St. Anton am Arlberg)으로 가서 스키 강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당시 알프스 지역에서 스키라는 운동의 인식은, 오스트리아에서 조차 약간 맛이 간 아이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마치 스노우보드가 처음에 박해를 받았듯이^^) 그래서 아버님은 당연이 슈나이더가 포기할 줄 알고 "너 스키 강사 해서 한 시즌 동안 돈 못 벌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빠랑 치즈 만들기 계속하기다…"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알베르그의 스키 학교에서 뛰어난 지도 능력을 발휘하여 스키어들을 가르쳤고, 돈을 벌어 계속 강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몇 년 동안 그는 타고난 능력에 노력을 더한 결과, 스키 기술 및 강습 방법을 체계화하여 '알베르그 시스템(Alberg system)'을 정립하게 됩니다.
슈나이더의 알베르그 시스템은 무릎을 구부려 중심을 낮춘 크라우칭(crouching) 자세와 다리를 벌리고 몸을 회전 방향으로 돌리는 '로테이셔널 스템(rotational stem)' 기술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급경사에서 유연하면서도 더욱 적극적인 회전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림 5: 알베르그식 스템 턴의 모식도)
새로운 기술이 항상 겪어왔듯이, 슈나이더의 알베르그 시스템도 처음에는 기존의 텔레마크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스키 대회에서 슈나이더는 특유의 묘기로 관중들을 매료시켰고, 곧 대세는 알베르그 시스템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림 6: 슈나이더의 점프 묘기, 1911년)
알베르그 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간 데에는 기술의 우월성 뿐 아니라 슈나이더가 체계화한 강습 방법과 그의 스타 기질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슈나이더는 스키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역학적 분석을 하였고, 그 결과를 강습 방법으로 체계화 시켰습니다. 또 1910년부터는 강습생들이 늘어나자, 여러 반으로 실력을 구분하여 나누어 강습을 진행하는 방법을 최초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알베르그 스쿨의 강습 체계, 즉 'snowplow - stem turn - stem christiania - parallel swing turn'을 차례로 연습하는 방법은 현재도 스키 강습의 기본 틀로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그림 7: 알베르그 스쿨의 강습 장면)
알베르그 스쿨의 강습 분위기는 매우 엄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의 기술을 거의 한 시즌 내내 연마하였으며, 한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기 전에는 다음 단계의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 년을 뼈 빠지게 연습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리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강습생들을 따라다니면서 "Bend ze knees!"(무릎 구부려!)를 외쳐대었고, 자세가 좀 서게 되면 바로 폴이 종아리에 날라왔다고 합니다. 라이벌 기술이었던 텔레마크 자세가 나오면 당장 쫓겨났겠죠.^^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강습을 통해서 알베르그 시스템은 알파인 스키 기술의 기본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됩니다.
1914년 일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슈나이더와 그 제자 들은 알프스의 산악 군단에 들어가 이태리와의 전쟁에서 전과를 올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생 안톤으로 돌아온 슈나이더는 그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기반으로 더욱 명성을 높여갔습니다. 또 의사 출신의 독일 영화 제작자인 팽크 박사(Dr. Arnold Fanck)와 제작한 스키 영화들이 큰 인기를 얻자, 슈나이더는 대중의 스타로도 떠 올랐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묘기들은 사람들에게 스키의 즐거움을 알려 주어 스키 스포츠의 붐이 일었으며, 그의 명성은 이제 유럽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실제 당시 영화 중에는 현재의 기술에 전혀 손색이 없는 놀라운 아크로 및 에어 장면 들이 등장합니다. (그림 8: 영화 'White Art' 중에서 한네스 슈나이더, 1924년)
이런 과정에서 한네스 슈나이더는 1920년대에 들어와 세계 스키계를 완전히 평정하게 되고, 그의 스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인해 많은 스키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여러 편의 스키 책 및 영화를 발표하여 스키의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작은 알프스 산골짜기 마을인 생 안톤의 스키 학교는 슈나이더가 키운 강사만 해도 30명이 넘게 일하는 세계 스키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강사들이 미국, 일본으로 건너가 알파인 스키 기술을 전파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에 와서 '알베르그 스쿨'을 전파한 오스트리아 출신 강사들에는 Otto Lang(유명한 영화 제작자), Sig Buchmayr(미국 최초의 스키 학교인 'Peckett's-on-Sugar Hill'의 설립자), Benno Rybzka(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 한네스 슈나이더 스키 스쿨 설립자), Toni Matt(1939년 Inferno Race에서 우승한 전설적인 레이서), Friedl Pfeiffer(선밸리 스키 강사, 아스펜 스키장 개발자), Sepp Ruschp(스토우 스키 학교 창설자) 등등. 결국 미국 및 일본의 스키 역사는 오스트리아 알베르그 스쿨 출신의 슈나이더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슈나이더의 알베르그 스쿨은 1930년대 중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나찌는 오스트리아를 장악하자,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슈나이더를 나찌에 가입 시키려고 협박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굴복하기 싫어하는 성격의 슈나이더는 이를 모두 거절하였고, 이내 나찌는 슈나이더를 체포합니다.(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비슷한 상황) 슈나이더는 투옥,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고생을 했지만, 정작 그를 가장 마음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자식처럼 키운 제자들이 나찌에 가담하여 스승인 자신을 모함하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한네스 슈나이더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사람은 미국의 뉴햄프셔 주의 노스 콘웨이(North Conway, NH)가 고향인 하비 깁슨(Harvey Dow Gibson)이란 은행가였습니다. 깁슨은 이미 1930년대 중반 자신의 고향인 노스 콘웨이에 있는 크랜모어 마운틴(Cranmore Mt.)에 스키장을 만든 다음, 슈나이더의 제자들을 초청하여 '한네스 슈나이더 스키 학교 미국 분교'를 운영하고 있던 슈나이더의 열열한 팬이었습니다. 스키를 사랑했던 그의 사업적 아이디어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뉴욕에서 노스 콘웨이를 왕복하는 'Eastern Slope Express'라는 '심야 스키 열차' 상품을 개발하여 운행하였습니다. 저녁 9시 뉴욕의 Grand Central Station에서 스키를 싣고 출발하여 침대차로 밤 새 달려 아침 7시에 뉴햄프셔의 노스 콘웨이에 도착, 아름다운 'Eastern Slope Inn'에서 아침을 맛있게 먹고 하루 종일 스키를 탄 다음, 같은 코스를 이용하여 뉴욕으로 돌아오는… 말하자면 요즘 '당일 스키 패키지'와 비슷한 상품을 이미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에는 세계 최초 이자 마지막이었던 'Ski Mobile'이란 재미있는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9: 스키모빌) 1939년 제작된 'Ski Lark'라는 기록 영화를 보면, 밍크 코트를 입은 아줌마가 스키모빌에서 스키를 들고 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옛날에 별 짓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줍니다.
깁슨은 슈나이더가 나찌에 의해 구금되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구명 운동에 나섭니다. 그 결과 나찌 정부가 자신에게 진 빚의 이자 상환을 연기해 주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슈나이더를 석방시켜 주도록 하였고, 슈나이더는 결국 자신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생 안톤을 뒤로 한 채 아내(Ludwina), 아들(Herbert), 딸(Herta)과 함께 미국 뉴햄프셔 주의 노스 콘웨이로 오게 됩니다.
1939년 2월 11일 새벽. 슈나이더는 뉴욕에서 출발한 '새벽 스키 열차'를 타고, 이미 이곳에서 '한네스 슈나이더 스키 학교 미국 분교'을 운영하던 제자들과 이들이 가르친 스키학교 학생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으면서 노스 콘웨이의 'Victorian Train Station'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림 10: 도착 환영식) (그림 11: 현재의 역사 전경) (그림 12: 도착 당일 아침 Easter Slope Inn에서. 좌로부터 Toni Matt, Benno Rybzka, Hannes Schneider, Herbert Schneider, Otto Tschol)
점심을 먹고 처음으로 미국 스키장에 올라간 슈나이더는 생 안톤에 비하면 동네 언덕 수준인 스키장 앞에 서서 어디가 산인 지를 몰라 물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한네스 슈나이더는 그의 스킹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관중 앞에 서서, 아들인 허버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Come on Herbert, we better put our best foot forward because everybody's going to watch us, how we ski." "It's not St. Anton, but we’re going to love it here…"
깁슨은 슈나이더에게 스키장 및 스키 학교의 운영을 맡겼고, 슈나이더 일가는 낯선 미국 스키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미국에 온지 6개월 만에 아내인 Ludwina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었지만, 슈나이더의 타고난 카리스마와 지도력, 그리고 끊임 없이 연구, 노력하는 자세는 미국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크랜모어 마운틴에서 스키를 지도하던 슈나이더는 광활한 알프스에 비해 트레일이 좁은 미국 스키장을 보고, 이듬 해부터는 나무를 잘라 트레일을 넓히고, 기계를 이용하여 바닥을 다듬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최초로 스키장의 정지 작업(grooming)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은 이러한 슈나이더의 명성과 노력 덕분에, 1936년 생긴 선밸리(Sun Valley, Idaho) 스키장과 함께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미국의 대표적인 스키장으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1939년 이차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유럽 산악지역에서의 전투를 대비하여 산악 부대(10th Mountain Division)을 창설하였습니다. 이 부대에는 나찌를 피해 고국을 등지고 미국에 건너온 많은 유럽인들이 자원하여 입대하였고, 여기에는 상당 수의 스키 강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네스 슈나이더의 아들인 허버트 슈나이더도 1943년 이 부대에 자원, 이태리 전선에 배치되어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때 사용된 스키 장비들은 전쟁 후 스키 시장에 흘러 나와 스키 붐을 일으키는데 한 몫 하였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서 스키어들에게 퍼졌으므로 한국 스키 발전에도 일부 기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림 13: 10th Mountain Division의 복장과 장비) 전쟁이 끝나고, 1946년 노스 콘웨이로 돌아온 허버트 슈나이더는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 학교를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운영하였습니다.
"절대 왕조는 부패한다…"
1907년 한네스 슈나이더가 생 안톤에서 강사를 시작하며 알베르그 시스템을 정립한 이래, 근 30년 간을 부동의 기술로 전수 내려오던 알베르그 기술은 1930년대 중반 처음으로 위치가 흔들리게 됩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알베르그 시스템의 근본은 무릎을 구부리고(crouching), 회전을 시작할 때 다리를 벌리며(stem), 상체를 회전 방향으로 돌리는(rotation) 방법이었고 거의 모든 선수들이 이런 방식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6년 가미쉬(Garmisch)에서 열린 제 4회 동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알파인 스키 종목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손기정 옹께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시던 해 겨울에 히틀러가 주최한 이 대회는 활강과 회전을 합친 성적만 계산하여 남녀 한 개 씩의 금메달이 수여되었는데, 우승자는 히틀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준 독일인 남녀들이었지만, 더 관심을 모았던 선수는 회전 종목에서 1위를 한 토니 질로스(Tony Seelos)라는 오스트리아 선수였습니다. 토니 질로스는 회전 부분에서 공식 우승자를 무려 5초 차이로 따돌렸는데, 이 때 그는 알베르그 방식과는 달리 완전한 평행 회전(parallel turn) 기술을 구사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런 기술을 따로 연마한 것이 아니고, 선천적인 스킹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토니 질로스의 스킹은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프랑스 대표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땄던 에밀 알레(Emile Allais)가 토니 질로스의 평행 회전 기술을 연구, 개선함으로써 '전면적인 평행 회전 방식(all parallel doctrine)'을 특징으로 한 프랑스 기술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미국에도 프랑스 기술이 들어옴으로써 드디어 오스트리아/프랑스 간의 오랜 '스키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스포츠로서의 스키가 수년 간 중단되고, 슈나이더를 비롯한 많은 스키 지도자들이 모국을 떠나버려 조직이 와해된 오스트리아는 1940년대 후반, 알베르그 기술이 프랑스의 신 기술에 밀려 프랑스 선수들이 스키 대회를 휩쓰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를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암흑기'로 표현한다는데, 나찌즘과 전쟁에 휘말려 국가가 분열되었던 이유 뿐 아니라 프랑스에게 스키의 주도권을 내 주었다는 것을 치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프랑스의 도약에 충격을 받은 오스트리아는 1950년대에 들어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스키 기술 연구에 돌입합니다. 여기에는 스키 강사, 대학 교수들이 대거 참여 하였는데, 그 결과 1957년 인스부르크 대학의 크루켄하우저(Stefan Krukenhauser) 교수의 주도하에 'New Austrian ski system'이 발표됩니다. (그림 14: New Official Austrian Ski System, 1958년)
새로운 오스트리아 기술은 과거 알베르그 시스템의 스템 기술을 강습의 중간 과정에 필요한 기술로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지도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초점은 사이드 슬립에 의한 방향 전환과 이를 위해서 어깨를 회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방법, 즉 '카운터 로테이션(counter-rotation)'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이드 슬립과 카운터 로테이션을 이용한 빠른 회전 기술을 '베데른(wedel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그림 15: 1950년대 오스트리아 교본에 수록된 베데른 모식도) 그 동안 세계에 퍼져나간 오스트리아 강사들은 이 새로운 오스트리아 기술을 바로 받아들여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comma position'에서 사활강을 배우고, 이어 푸르그 보겐(pflug bogen, snowplow), 스템 회전, 단일 평행 회전을 차례로 익힌 다음, 마지막 단계에서 웨데른(wedeln)이라 명명한 연속 평행 회전을 익히는 것으로 되어있는 이 오스트리아 기술 체계는 상당 부분 아직도 스키 학교에서 기본 강습 시스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국가적인 노력에 힘입어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 Italy)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오스트리아의 토니 자일러(Tony Sailer)가 최초로 알파인 삼관왕에 오르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림 16: 토니 자일러)
한편 독립적인 자신들의 스타일을 항상 추구하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는 거의 반대의 신체 동작 메커니즘을 고수하였고, 1950년대에는 두 나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스키 기술이 발달해 나갑니다. 즉, 프랑스는 회전 시 어깨의 로테이션 포지션 유지, 스템을 철저히 배제한 패러럴 스윙, 업 언웨이팅 배제한 '아베르망(Avalement, sitting back technique)'을 상징으로 한 기술을 쓴 반면, 오스트리아는 어깨의 카운터 로테이션 유지, 강습 과정에서 스템 기술을 중요시 하였고, 업 언웨이팅 등의 동작을 이용하여 '베데른'을 상징으로 한 기술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는 스킹 모습만 보아도 어느 나라 출신의 강사에게 스키를 배웠는지 단번에 구분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림 17: How to Ski New French way, 1967년, 표지 모델 Jean Claude Killy) (그림 18-1,2: 로테이션/카운터 로테이션)
1960년대로 들어와 다시 프랑스의 스키어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두 나라 간의 스키 전쟁은 지속되었지만, 메탈 스키를 거쳐 파이버글라스 스키가 나오고, 부츠가 플라스틱으로 바뀌는 등 장비의 혁명이 일어나, 과도한 상체 모션 없이도 회전이 가능해지자 국가간의 기술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인터 스키에 의한 스키 기술의 교류가 활발해 지자, 기본적인 자세는 국가간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그림 19: 1960년대 최고의 레이서들의 회전 자세를 합성한 사진. 거의 차이가 없다. 좌로부터 Guy Perillat-프랑스, Jimmy Heuga-미국, Karl Schranz-오스트리아)
한네스 슈나이더는 1955년 4월 26일 65세의 나이로, 제2의 고향 노스 콘웨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미국에 온 후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면서 자신이 정립한 알베르그 시스템이 프랑스 기술과 새로운 오스트리아 기술에 의해서 쇠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였지만, 그는 죽기 전날 까지도 크랜모어 마운틴에 올라가 새로운 스키 슬로프를 구상하는 등 일생 동안 스키를 사랑하고 생각하였던, 진정한 스키 마이스터(skimeister) 였습니다. (그림 20: 슈나이더의 말년)
한네스 슈나이더가 사망한 후 1963년부터는 아들인 허버트 슈나이더가 크랜모어 마운틴 스키장을 경영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허버트 슈나이더는 1984년 스키장에서 손을 뗄 때까지 스키장 운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스키장 산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재도 스키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서, 2001년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를 생 안톤에 유치하는 데에도 공헌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파인 스키 역사의 산 증인인 슈나이더 일가의 내력을 알고있는 저로서는 허버트 슈나이더 할아버지를 꼭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가족이 사는 곳으로 가는 길이,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이산 가족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허버트 할아버지가 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 콜로라도에서 스키장 운영학을 공부 중인 박수철 데몬 때문이었습니다.
1998년에 제가 주최하였던 '스키 심포지움' 행사 중, '스키와 스키 부상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다가 한네스 슈나이더의 사진이 나왔을 때 유난히 큰 얼굴이 박수철 데몬과 닮았다는 농담을 했었고, 박데몬과 심포지움이 끝난 후 '근대 스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나눴었습니다.
이후 박데몬이 'iski' 비디오를 촬영하러 오스트리아의 생 안톤을 방문하게 되었고, 생 안톤 시장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한네스 슈나이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온 스키어가 생 안톤의 전설인 슈나이더에 대해 자세히 알고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시장님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마침 생 안톤을 방문 중이던 한네스의 두 남매, 허버트와 허타 슈나이더(Herta Schneider) 할아버지/할머니를 불러내었고, 모두 같이 한네스 슈나이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박데몬이 허버트 할아버지에게 한국에 슈나이더 일가에 관심이 많은 이상한 정형외과 의사가 있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박데몬은 당시 허버트 슈나이더 할아버지를 촬영한 내용을 'iski'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하였습니다. 정말 얽히고 섥히는 인연입니다.
박수철 데몬이 전해드리라고 준 'iski' 비디오와 스키를 챙겨 아침 일찍 노스 콘웨이로 향하였습니다. 가는 길은 전형적인 뉴잉글랜드 지역의 시골 길. 쌓인 눈과 교회의 뾰족탑, 빨간색 지붕의 곡창, 젖소들이 정말 잘 어울리는 풍경입니다. 사실 자연 경관만 따지자면 우리 나라의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 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착하여 슈나이더 가족이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곳에 도착했던 기차역, 한네스 슈나이더의 동상, 스키장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스키장은 작은 규모이지만 뉴욕과 메사추세스 사람들이 휴가차 들리는 가족 중심의 리조트로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그림 21: 한네스 슈나이더의 동상)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1939년 가설되었던 전무 후무한 '스키 모빌(ski mobile)'을 몇 년 전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무작정 보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려고 일부러 이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 운영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슈나이더 할아버지도 이 점을 무척 아쉬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용평의 레드 라인 좌측에 돌아가던 빨간색 일인승 리프트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앞에 대문짝 만하게 '우리 나라 최초의 의자식 리프트. 어쩌구 저쩌구…' 써 놓으면 사람들이 "역시 용평이야…" 하면서 거기에 왔다는 뿌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뉴잉글랜드 스키 박물관 사무장인 제프와 같이 오후 스키를 타다가 슬로프에서 드디어 허버트 슈나이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81세의 고령이었지만 아직도 정정하게 스키를 타고 계셨습니다. "Finally we get together…"라고 연신 이야기 하시면서 처음 한네스 슈나이더가 나무를 자르고 바닥을 정리했던, '슈나이더'라고 이름 붙은 슬로프에서 같이 스킹을 즐겼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할아버지의 옷차림... 빽 도리구찌 모자에 스키화 속으로 구겨 넣은 기지 바지, 촌스런 파란색 스키장 직원 파카로 이어지는 절묘한 패션… 모든 것이 신기해서 그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복장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생각 없이 입은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림 22: 허버트 슈나이더와 나)
저녁에 열린 오스트리아식 파티에서는 가족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할머니와 아들(이름이 다시 Hannes Schneider입니다.), 며느리, 또 그 아들 둘(두 녀석 중에 하나가 또 Hannes Schneider), 그리고 허버트 할아버지의 오랜 스키 친구들… 파티장에는 마이스터 컵 레이스에 참가하여 한네스 슈나이더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먼 길을 온 생 안톤 청소년 대표 선수들이 소개되었고, 10th mountain division에서 기수단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림 23: 한네스 슈나이더의 손자)
오스트리아 민속 밴드의 연주가 계속되고 사람들은 흥겹게 먹고 마시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중간에 '에델바이스'를 합창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맥주를 한잔 하시면서 옛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밖에서는 달 빛 아래 노르딕 대회가 열렸고, 슈나이더 스키 학교 강사들이 산 정상부터 횃불 퍼레이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열린 "Hannes Schneider Meister Cup Race"는 레이스라기 보다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허버트 할아버지도 뛰고, 요즘 살이 올라 둔해진 손자, 한네스 슈나이더도 뛰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Vintage Ski Wear Parade"가 열렸습니다.(그림 24)
중간에 다시 또 '에델바이스'를 합창하는데, 마이크를 들고 선창한 아줌마의 이름이 엘리자베스 본 트랩(Elizabeth von Trapp)… 바로 'Sound of Music'의 실제 주인공 마리아의 손녀였습니다. 마리아의 가족은 저희 동네에서 가까운 스토우(Stowe)란 마을 주변에 사는 관계로 초청한 모양입니다. 손자인 한네스 슈나이더 부부가 두 아들을 등에 업고 슬로프를 내려오는 행사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62년 전 이곳에 와 정착한 '스키 마이스터'의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자선 행사 형식으로 진행된 스키 대회 및 각종 행사가 끝나고 슈나이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한네스 슈나이더의 동상, 그 아들 허버트 슈나이더, 그 아들 다시 한네스 슈나이더, 그 아들 또 한네스 슈나이더… 다음에는 생 안톤에서 다시 만나자는, 스키 마이스터를 조상으로 둔 후손들 모습에는 분명히 남다른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설은 이어집니다… Legend continues…
(그림 25: 슈나이더 일가)
(그림 26: 생 안톤에서의 한네스 슈나이더)
Seung-pyo Eun M.D. Ph.D.
Orthopaedic surgeon, Medical correspondent
President, Korea Sports Medicine Center
“넘어져서 미끄러지다가 일어나려 하지 마세요.
넘어지면 손을 앞으로 가져가고 다리를 모으세요.
전방 십자 인대 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 ACL Awareness Program –
“스키 장비 전문점에 가서 장비 검사하시고,
바인딩 이탈 수치를 표에 맞게 조절하세요.
다리 부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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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ous & Safe Ski for Everybody!”
- CMC SKI TE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