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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시 모음 71편
《1》
3월의 산에 오르면
박종영
3월의 산에 오르면
드문드문 산수유 선 자리
바위틈마다 꼭꼭 숨어
눈웃음 메아리로 손짓한다
겨우내 꽝꽝하게 언 땅 밀치고
파란 봄 이고 오는
가르마 같은 오솔길은
그대 하얀 웃음으로 설레이고
산에 올라 고향 하늘 짚어보면
잘박하게 끓어올라
시장기 밀어올리던 보리밥 냄새
사록사록 가슴에 젖는다
3월이 되면,
아주 가깝게 잡히는 들녘
곤줄박이 폴짝 거리며 날개치고
옹달샘 맑은 물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달빛으로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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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월이 간다네
박종영
그저 손 벌리지 않아도
다독이고 갈 거라고 우쭐해 하던
봄바람,
흙먼지 곱게 다지고 일어서는 민들레
한자리 납작하게 차지하고,
풀꽃 넘치게 피어올라
헤프게 몸푼 소문들이
들녘에 넘쳐나는데
찾아올 거라 믿어
다듬고선 거울 앞에서
활짝 여문 4월의 봄 편지는
아직 열어보지 않는다고 흐느낀다
푸른 오월이 고개 디민다
청보리 가슴을 엿보는 저 쏠쏠한 재미,
듣는 마음 서운하게 귀띔하기를
4월이 바로 빗겨간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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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월에
박종영
하얀 길은 턱없이 지친 채
길 한편을 더운 바람에 내주고 먼지를 날린다
물기 끌어올리는 텃밭 감나무 한 그루,
번들번들한 잎 늘어뜨리고 고개를 조아린다
가슴 흔들며 떠가는 뭉게구름,
그 아래 가을 길을 열고 줄 서 있는 볏논의 질서가
파란 물길 내놓고 바람을 모은다
올해도 기어이 풍요는 올 것인가,
제비 한 쌍이 낮게 비행할 때마다
벼포기 흰불나방이 힘없이 사라진다
어디 그뿐이랴, 다랑이 논 물꼬에
풀대 물레방아 만들어 어둔 세월 돌게 하는
손자 돌 이의 복스런 손놀림이
보배스런 기운으로 눈에 잡힌다
하늬바람에 날리는 흰 머리카락과
논둑에 핀 코스모스 가는허리의 눈물이
지평선 하늘 끝에 매달리고,
바짓가랑이 밑으로 숭숭 지나가는
선선한 8월의 바람이 익숙한 웃음으로
한층 두께를 더하면서 푸른 들녘을 들쑤신다
입추 절기가 더딘 여름을 얼리며 속삭인다,
너도 어느 시절 울고 떠난 여인이 그리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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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 빛
박종영
제법 선선하면서도 섬뜩한
가을빛 내리꽂히는 산마루 외딴곳,
산국(山菊) 쏟아내는 눈물이 흥건히 차올라
멧새 붉은 다리 참방 대겠다
벼포기 알알이 여문 들녘에
여기저기 메뚜기 토실토실 날고
그 자리 파란 새움 돋아나
가을을 들어 올려 채워지는 논배미,
물꼬 낮추고 돌아오는 허기에
노을이 붉게 땅거미로 배를 채우면,
긴 그림자는 포만의 즐거움이 되고
산허리, 얇은 구름이고선 늙은 나무 한 그루,
그 쓸쓸함에
아득한 지평선 하나 목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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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망초 소묘
박종영
어느 때는
꽃다운 추억을 데려오다가
어느 때는
주눅이 들어 오금 못 펴고
달아나는 꽃
적막감 안고오는 노란 웃음은
배고픔 달래줄
계란 꽃이라지,
어째거나
한철,
푸대접이 귀하게 들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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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울 이야기
박종영
아무도 살지 않는 숲의 나라에
눈발은 풋풋하게 날리고
겨울 산은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고
길은 걸을수록 좁아지고,
신의 소리로 스러지는
백옥의 숨결은,
즈그들 끼리 껴안아 그리워하고
봄은 아직 멀고 먼
이국의 소녀 이야기
맨몸으로 달려드는 동백꽃
붉은 향기는,
설레임으로 뜨거워지는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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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향 찔레꽃
박종영
별처럼 서러운 꽃
언제나 고향 언덕배기에서 핀다
청보리 배를 불리는 오월
알싸한 향기는 절망의 벽을 넘어
골고루 후미진 들녘에 퍼진다
달빛 부서지는 외로운 밤
떠나간 이별 하얀 웃음으로 달래는 향기,
그 향기 가슴에 담아보면
순이도 보이고,
철수도 보이고,
어느새,
은빛 왕관으로 치장하는 흘러간 청춘이
높고 푸른 허공에 쏘아 올리는 세월,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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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절초
박종영
섬 동백 꽃자리 잡아 틀고
이맘때 터울 좋은 자리를 잡은 구절초,
넌실넌실 피어올라
환해지는 오솔길,
그 웃음꽃에 살며시 앉아보면
어쩔수 없이 속마음 드러내고
달려오는 가을 파도,
무딘 가슴에 가득 고여 우람한 사랑으로
일어서게 숨 가쁘고,
자꾸만 으쓱진 곳으로 잡아당기는
얇은 햇살,
그 안에 살포시 내려앉아
옷을 벗는 꽃잎들,
그냥 꽃잎이 아니라
날랑날랑 하얀 속살 드러내고
포개지는 가슴 벽,
이를 어찌 함부로 밀어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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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절초를 위하여
박종영
가을 하늘이 선녀의 가슴으로 열릴 때
사뿐히 구름 타고 내려와
한 자락 산을 자리하고 피는 꽃,
설움에 겨운 내 누이 떠나가던 날도
마디마디 향기 풀어 가는 길 배웅하던 꽃,
새침한 너의 얼굴
이어 붙이고 끌어 붙이면
반짝이는 꽃향기로 세상이 따스했던 시절,
이 가을 바라보면 기쁘지 않은 꽃이 없거늘
과연 너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서늘한 바람으로 외로움 타는 시간,
수줍은 꽃, 신의 이름으로
너 구절초를 위하여 반려가 되는 즐거움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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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리움의 강
박종영
고향의 강에 와서 물 수제비를 뜬다
파장의 징검다리를 놓으며
날아가는 돌멩이의 자유가
푸른 얼굴로 퐁퐁 튀어나와 생글거린다
아주 완벽한
사랑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강가 풀숲에 닿아 영롱한 하늘을 그려낸다
물아래로 침잠시켜 보면
못다 한 가슴과 잉잉대던 추억들이 솟아올라
둥근 웃음으로 보글거린다
가슴 뜨겁던 시절 온밤 내
붉은 꽃으로 피고 싶었던 날에 고스란히
그리움으로만 떠 있어야 하는 고향의 강,
아주 싱싱한 한 줌 강물을
손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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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림자 같은 것
박종영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
빛이 없으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
음영(陰影)은 물체의 생명으로 부여받은
잡히지 않는 육신의 혼불인 것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은 걷기를 그만두고
주섬주섬 숨소리를 챙겨 빛을 등지는 시간인 것
그 슬픔의 날에 타인의 통곡으로
이별은 영원한 땅에 묻히는 것
그로부터 탈출한 그림자는 색깔이 다른
잡히지 않은 그림자로 환생하는 요술쟁이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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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다림의 순서
박종영
기다림은 언제나
그대의 눈 맞춤을 찾다가
둥근 웃음 한 아름 채워질 때
비로소 마음의 끝자락을 펼친다
그 뒤안에는 언제나 이별이
먼 지평을 달려와 파란
그리움의 벽으로 서 있어
욱욱한 자리에,
마음 감춘 풋사랑의 처녀가
부푼 가슴으로 서 있을 때,
조마조마한 기다림의 순서는
기운 낮달이
서쪽 하늘 붙잡고 허당으로 달리는 시간,
늦은 바다는 돌아누워 작은 섬으로 스러지고
아랑곳없이 종일
청명한 하늘 닦아내는
구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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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억 속으로
박종영
우리 살아온 날 기억 되살려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은
올바른 진실의 기억을 듣기 위한 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즐겁고
자랑스러운 것은
숱한 모욕이나 사랑의 실패가
자잘하게 생각나지 않는 것이려니
좋은 기억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층층이 쌓여가는
세월의 계단을 미련없이 망각하는 것
이 슬픔 많고 모욕이 들끓은 세상에서
그거 스스로 잊을 수 있다는 것은
튼튼하게 성립한 망각의 틀이 버티고 있어
고맙게 살아가고 있는 행운이거늘
벗이여,
당신의 이름
기억할 수 없음을 용서빌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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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길이 없어도 가는 길
박종영
길이 없어도 가는 길,
오늘은 뒤늦게 부모님 만나러 산소에 간다
거기엔 마음 안으로 열리는 길이 있어서다
꽃샘 추위 이겨낸 잔디도 보러간다
여름 기운 업고 얼마나 촘촘히 앉아 있는지도,
상석 옆 건너심은 봄동백 한 그루,
반질반질한 열매 몇 개나 달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오늘은 나를 나무라며 가는 길이라
강산에 묻고 온 세월 다독여
이승과 저승, 궁극의 갈림길에 서서
어느 길을 밟고 싶은지 좁은 생각 중에,
금방이라도 그리운 목소리 들릴 것 같아
귀를 막고 들어보는 절정의 시간에서
수천수만 절벽 아래로부터
내가 허우적대는 소리 들리고,
순간 화들짝 놀라 나를 흔들어 깨운다.
몸을 낮추고 내 길을 찾았을 때,
산소 모퉁이 배롱나무 너머 빙긋이 웃고 있는 이,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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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
박종영
하얀 겨울잠에서 웃음 흔들고 일어나
하늘 구름 날개를 달고
임의 봄으로 찾아오는 꽃,
한 아름 빛을 씨방에 넣어준다
은밀하게 속삭이며 안기는
싱싱한 붉은 미소를
송두리째 버리지 않고 눈으로 마신다
노란 가장자리 깊숙한 곳에
임의 입김으로 채워주는 날을
달디단 그리움의 시간으로 마중하는가
지금 기쁨의 간격에서 나의 꽃은
아주 곱살한,
내 여자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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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꽃눈 열리는 소리
박종영
꽃 몸살 번지는 곳마다
씩씩한 봄 빛깔 그 따스한 두근거림
손에 쥐어 보면
찬 기운 데리고 떠나는 겨울 그림자가 안쓰럽다
느긋한 햇빛 속으로
가까이 밀려와 움트는 꽃의 신음소리
시냇가 버들강아지 잎눈을 열어
솜털 방망이 다지는 소리
겨우네 파란 봄을 기다리는
산당화 그 달관의 향기가
무딘 가슴에 파고들어 혼란스럽다
시작되는 봄
날씬한 바람이 선사하는 극진한 아름다움
시름 잊고 동창에 밝은 빛 받아들이면
온 세상 꽃눈으로 열리는 소리
지친 시간 어둠의 땅에 불 밝히는
맑은 봄의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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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에 대하여
박종영
꽃은 영원으로 피어난다
어둡고 괴로운
세월을 끌어올리며 말을 건다
어지러운 마음을 화사한 꽃길로 인도하며
사랑을 취하게 하는 낭만이 있다
신의 이름으로 다스려 뽐내게 하는 것 또한
시간을 속이고 피는 꽃의 관능이다,
어느 날 숨 막히는 밤에서는,
하늘의 정기 받아 훈훈하게 마음을 데우고
아픔마저 향기로 피워내는 유혹이 있어
바람은 흥겨운 꽃을 부추긴다
찬란한 봄날에서만 볼 수 있는
저, 세세한 웃음거리
그건 우리들의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훔쳐가는 일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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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꽃의 눈물
박종영
봄이 이리 더디게 오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다를 건너오다 하얀 파도가 다그쳐
거품 일어 웃어주고 있거나
동백섬 돌아오는 길 거기 붉은 꽃 꿀 탐내다가
고운 얼굴 동박새 부리에 할퀴어 울고 있거나
잘난 체 맑은 물에 얼굴 비추어 자랑하다가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는지도
오로지 세상 살아가면서
허튼 생각 바로 못 잡고 한눈팔다 가는
어처구니없게 사랑 잃어버리고
안쓰러운 마음 다스리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봄빛이라고 가만 둘리 없는 세상 인심이라
산 넘고 강 건너온 슬픈 꽃들이
눈물 쏟아 몸살 앓고 눕는다
어느 것 하나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으려고
솟아나는 파란 싹들이 씩씩하게 산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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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꽃의 유희
박종영
아껴둔 시간에 햇빛이 몸을 데운다
한 떨기 꽃의 몸부림을 보기위해
환상으로 치달으며 머무는 빛의속도
그 사이, 흥겨운 봄이 틈을 엿보고 있다.
나른한 색조가 광기를 부린다
푸른색으로 온듯하더니
다시 연분홍으로 달려들어
그 향기 모처럼 절정에서 웃는다.
반면,
조화를 탐하는 꽃술의 끈끈한 토라짐
그 위에 벌 나비의 힘이 송곳처럼 쏟아지자
순수한 씨방을 여는 납작한 민들레, 드디어
외로운 하늘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어느 철이든 빛은 생명의 웃음을 원한다
시들어 헝클어지지 않도록
사랑의 꽃바람을 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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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낡은 풍경화
박종영
빈곤을 다스리다 저무는 하루,
물기 젖은 손으로 누대의 가계부를 정리하는
아내의 몽당연필의 안간힘이
어둔 방구석 쌓이는 슬픔을 걷어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친 나의 눈에
잡히는 낡은 그림 하나,
내가 숲 속 낙엽의 무덤 안에 들어가
이승의 몸뚱이를 유령으로 눕히는 것이다
누워 쳐다보는 세상은 환한 기운으로
푸릇푸릇 큰 기쁨이 초원에 일렁인다
나는 줄 서기를 마다하고
내 경계의 둘레에 마음껏 금을 긋고
회색묘비에 부자 스럽게 이름 석 자를 새긴다
넓은 땅 밟고선 자리 거만스런 웃음은 잠시,
섬뜩한 기운에 잠을 깼다
아내의 밝은 웃음이 내 남루를 부추겨 세운다
부끄러운 얼굴 감추고 봉창 문을 열었다
고달픈 자국 골고루 덮으며 내리는 눈송이,
스적스적 하얗게 문장을 외우며 내린다
바람벽처럼 시린 설움은 바득바득 말라가고
아버지의 굵은 손이 지은 흙집의 영광은,
비로소 나의 안식으로 평화의 깃발이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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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남는 이유
박종영
떠나는 인연이 있다는 것은
남아 있는 인연에게
피다가 멈춘 그리움의 싹을 틔우게 하는 것,
그러므로 다시 돌아오는
사랑의 이유를 심어놓고 가는 것
비내리는 고향 역 객창에
뿌려지는 비 눈물 닦으며
빛으로 손 흔드는 언약의 소리,
붙잡아 보아도 아슴한 산울림으로 돌아와
강물로 흐느끼고
차마 핏빛 진달래 흥건히 젖어
눈가에 물결치는데
혼자 출렁이는 기쁨의 땅,
질펀히 밟고
한 줄 시를 외우는 기다림,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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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가 만든 천국
박종영
겨우내 발가벗은 나무, 그 막힌 응어리를
따스한 손으로 잡아주고 간 자리,
그제야 가슴을 열고 푸르게 웃는다.
이 세상 가난과 슬픔의 길을 지나
우리, 저토록 참고 견디는 슬기를 배웠다면
기억할 수 있는 삶의 층계가 더 높았을 것을,
초봄 양지 바른 곳 차지하고
보송한 얼굴에 야릇한 웃음 띠고 지나가는
곱단이를 보고 있으면,
눈에 잡히는 깊숙한 관능의 힘이 전해오는데
저런 게 울림의 사랑이었나?,
황당한 간음을 숨기고 볕을 따라가는 사이,
토방에 초록색 물감으로 한 상
푸짐한 밥상을 차려놓고 손짓하는
아내의 가슴이 환하게 밀려오는 그때쯤,
봄을 물고 오는 산 제비 낮게 나르면
톡톡 피는 매화는 한 줌 그리움이 되고,
내가 만든 천국의 길은 이제부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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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의 연가
박종영
하루종일 눈이 내린다.
어지러운 마음잡고 보니
고독이 홀로 서성인다.
바다도 건너고
산도 넘고 다시
황량한 들판을 달려와
가슴으로 파고드는 하얀 얼굴.
눈빛을 들어 살며시
안기는 눈꽃의 이름을 외우고 싶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얼룩진,
이별의 눈물에 빈 가슴을 적신다.
언제까지 이렇듯, 미동하며
눈 오는 날을 혼자 지키는가,
그리움이 멈추는 날은
바람에 실려가며 보채는
눈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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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늦봄에
박종영
들 찔레 하얀 가슴 열고
하르르 하르르 생글거리면
먼 산 뻐꾸기 울음
산막집 처녀 그리운 정에 가슴 메고
낮은 목소리로 반짝이는 앞 방죽 물살
은빛 가슴에 물수제비 뜨면
콩콩 튀어 오르는 까까머리 얼굴들
늦은 후회로 찾은 고향길 에
시린 맘 달래주는 수달래
분홍빛 화음으로 그리움 차 오르고
자주 고름 곱게 매던 분홍치마 그녀
옛 그대로 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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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당신을 보내십시오
박종영
자연으로 가는 길
그거 어려운 일 아니라는 걸
다 알고 태어났지요
당신의 그리운 웃음 한 조각 곱게 다듬어
산 골물에 띄어 보십시오
향기 나는 풀 향기와 섞여
맑은 물소리 가슴으로 들을 수 있을것입니다
베풀고 산다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을 때 까지,
당신의 마음을 보태어
크고작은 세상의 모순을 흘러가게 하십시오
산은 얼마나 오래 살아서 저렇듯
우람하게 높아졌으며
비탈길에 선 저 동백나무는
어느 세월의 바람으로 붉은 눈물 통째로 흘리며
늙고 거친 밑동을 붙잡고 있는지,
맑은 시냇물의 긴 여정과,
산새의 울음을 알아 들을 수 있을 때 까지
조팝나무 어린 이파리가 왜 연둣빛으로 솟아나는지,
아주 여린 생각으로
당신의 몸뚱이를 산으로 강으로
흘러가게 손을 놓아 보십시오
그때마다 즐거운 산과 흥겨운 강물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출테니까요
☆★☆★☆★☆★☆★☆★☆★☆★☆★☆★☆★☆★
《26》
당신의 오늘은
박종영
어느덧 가을 한가운데 서 있다
외로운 시간이 같이 걷기를 청한다
꽃은 저 혼자서 짙은 향기 폴폴 흩날리며
가슴 넓은 그리움을 마중하기에 분주하다
모두가 결실을 나누어 가지려고
다투어 셈하는 시간,
명리(名利)의 속됨을 깨우치라 붉게 물드는 산천
부끄럼타는 눈부신 그리움의 여유가
가을 들녘 나지막이 가여운 들꽃 이름을 외우게 한다
문득 잊혀진 사랑이 찾아오고
오늘 나를 이기는 기쁨이 푸른 깃발로 펄럭이고,
산을 오르다 잠간 으슥한 계곡에 숨으면
조화로운 색, 그 금빛 무늬 돌단풍 익는소리
술렁이는 마음안에 켜켜히 쌓이는데
당신의 오늘은 어떤 색으로 물들고 있는가요?
☆★☆★☆★☆★☆★☆★☆★☆★☆★☆★☆★☆★
《27》
동행
박종영
우리, 혼자 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함께 가자고 동행을 청한다
세상일이 그렇듯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흔하지 않아
모두 깍지 손을 하고 걸어가는
정다운 모습은 곧 융합의 틀이거늘,
가냘픈 추억을 힘들게 붙들고 펄럭이는
달력의 까만 숫자도,
앞과 뒤 그 동질의 숫자가 받쳐주는
힘의 능력으로 일 년의 긴 동행을 시작했던 것,
일상에서 언제나 나은 행복을 상상하며 사는
가여운 아내의 눈빛을 보자,
묵묵히 그 뒤를 밀어주는 남편의 존재를
낮게 바라보면서도 행복한 동행을 위해
지금, 서로의 얼굴에 톡톡 분을 바르지 않는가?
이렇듯 서로의 행운을 번갈아 그리는 것 또한
살아갈 날의 맑은 햇살로
부서지고 싶은 인연인 것이다.
☆★☆★☆★☆★☆★☆★☆★☆★☆★☆★☆★☆★
《28》
들꽃 세상
박종영
길을 가다가
들꽃 한 송이에게 말을 건넨다
그럴 때마다 엿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꽃의 웃음이
더 요염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먼저 탐하고 싶은,
뒤바뀐 탐닉이 허튼 짓거리로 들키면서
마음을 접으니 간사한 마음이
부끄러움을 탄다
과연 한 개의 들꽃으로도 진한 가을을
안아볼 수 있을까 싶어
모두가 귀한 꽃으로 성장한 후에 반기는
저, 그리운 웃음소리가 옹골지다
늦가을 풀숲에서는 아직도
들꽃의 향기로 낯선 사람의 가슴마다
난장(亂場)이 선다
☆★☆★☆★☆★☆★☆★☆★☆★☆★☆★☆★☆★
《29》
등나무
박종영
애초에 우리,
너의 갈등(葛藤)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이리 얽히고
설키지 않았을 것이다
어수선한 세월 배배꼬며
야금야금 타고 넘는 버릇,
너의 침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가진 것 빼앗기고 뺏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꽃등 달고 휘감는 몸뚱이
올올이 너의 매듭 풀어내는 우리,
노랑 꽃창포 분주(奔走)한 오월에서
마냥 솔솔한 즐거움이다.
☆★☆★☆★☆★☆★☆★☆★☆★☆★☆★☆★☆★
《30》
만나고 싶은 이별
박종영
봄이 올 때마다 기다림은
아지랑이 속에 노니는
아기 구름의 간질임으로 붕붕 날고
만나고 헤어지는 일,
언제나 깊게 박히는 그리움은
회오리바람으로 젖어드는 소나기 비,
그토록 외로운 마음을 적시며 내린다
헤어짐으로 눈물 나는 세상살이
이별 앞에 서러운 입맞춤은
청청한 산도라지 푸른 빛깔로
누추한 가슴을 울리고 떠난다
혼자의 세월을 두 개의 마음으로 살아와
헛헛하게 매김 한 온갖 풍상들은
부연(附椽)의 풍경(風磬)으로 돌아와
댕댕거리며 울어대고,
가부좌 틀고 바라보는 이 산하,
넓은 자리 마다하고 네모 단칸방에 갇혀
세상 밖 엿듣는 귓속바람으로
늦게 시작한 밤비는 그리움에 질질거리고,
어느 날이던 만나고 싶은 이별이
기울어가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
《31》
무거운 짐
박종영
내가나를 밟고 간다
아픔을 말하지 못하는 그림자는 얼마
남지 않은 해의 등 뒤에서
혼자 가늘고 배고프다.
아직 남은 길 위에 한 뼘 시간의 길이를 밟고
고단한 날품을 소문 내지 못하면서
어느 곳 흥건한 환대의 시간을 찾아가는지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세상의 패배를 지고 가는 길,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차곡차곡
비밀의 성곽을 쌓으면서
목쉰 바람 소리 한 자락씩 길 위에 심고 가는
허당한 그리움은 누구의 탓이랴.
알몸의 길, 그 끝이 닿기 전에
등에 진 내 세월의 짐짝은,
얼마나 소중하게 무거운가?
☆★☆★☆★☆★☆★☆★☆★☆★☆★☆★☆★☆★
《32》
무관심
박종영
눈여겨보는 것을
허튼 생각으로 펴지 못하고
뒤란 한적한 장독대 아래 빛바랜 감나무 잎이
어설프게 엉켜 쌓여 있다
배불리 채우지 못해 어쩌다 가벼운 것들은
지 한 몸 가누지 못하고
바람의 뒤를 따라 또르르 굴러 간다
굴러가며 손 벌리는 유혹에
한눈을 팔기도 한다
하찮은 생명의 여운이라도 멀리
가는 길에서는 몸가짐 마음단속으로
외로움을 옆에 앉혀놓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가 보다
빗살처럼 가을볕이 고루 퍼지고
토담집 벽에 등허리를 기대어 보면
왜 이리 섬뜩하고 시린것인가?
살금살금 야위어 가는 가을 길에서
멀쑥하게 솟아오른 붉은 꽃무릇의 허리도
오늘따라 가늘게 슬퍼지고 있다
푸른 잎을 기다리다
기어이 지고 마는 저 붉은 상사화의 열병을
누가 무관심 하고 있는지요
☆★☆★☆★☆★☆★☆★☆★☆★☆★☆★☆★☆★
《33》
무궁화
박종영
후미진 비탈길에서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서
겨우내 몇 번씩 꽃봉오리 얼어터지고서야
초여름 딛고 밝게 피는 꽃,
조금은 낮게 솟아오르는 달처럼
수줍어 속 맘 곱게 토실토실한 꽃술은
하늘 위로 추어올리며
출렁이는 꽃무늬 소원을 빌고 있다
아주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나무의 질김은 우리 살아가며 배우는
모진 성장의 교훈이었거늘,
오늘로서 저 푸른 들녘 한 골
차지하고 피었다
8.15는 오는데,
그렇게 짓밟힌 겨레의 함성이
깊은 소용돌이처럼 달려드는데,
요요(姚姚)한 깃발로 펄럭이는
무한한 꽃송이는 구름보다 더 높다
우리는 너를,
무궁화(槿花)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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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바닷가에서
박종영
옥빛 가을 내려앉은
작은 섬 둘레가 어느새 하얀 웃음 돌아
고운 입술을 드러낸다.
외로워 빛바랜 해국(海菊)도
몸통 드러내어 흔들리고
낡은 깃발 펄럭이며
지루한 항해를 멈추지 못하는
나그네 같은 통통배 한 척도,
파도의 그림 안으로 숨어드는
가을 바닷가,
잔잔한 물결이 오갈 때마다
빠드득 아픔을 비비는 몽돌의 소리,
그 아픈 울음으로 잘게 부서지는
모래, 모래알 위로
아득한 세상의 눈물이 쌓인다.
☆★☆★☆★☆★☆★☆★☆★☆★☆★☆★☆★☆★
《35》
바람 이야기
박종영
꽃이,
새로운 옷을 입고
첫밤의 절정을 속삭인다.
소담한 손을 내밀어 어두운 그늘을 벗긴다.
코스모스 서러운 무리를 따라
드리워진 햇살길 밟으면
시절 좋은 부귀영화 엇그제인데
바람이,
가을 빛고운 웃음으로 바꾸고
포근한 자리 터 잡아 사랑을 청한다.
쉬고 또 쉬면서 갚아오던 세월인데
더디게 시작하는 이유,
숨쉬며 남은 시간의 영광은
혹여,
천년 세월이 우뚝 서 있을 것임으로
☆★☆★☆★☆★☆★☆★☆★☆★☆★☆★☆★☆★
《36》
바람의 문
박종영
소중한 나의 문을
숭숭 들락거리는 바람의 소리
무모하게 거슬리는 소리,
그건 문이 버티고 서 있어
짧게 굵게 또는 아주 싱싱하게
두드려 보는,
바람이 뽐내는 소리의 언어다
마파람이거나, 놉새 풍이거나
아니면 드맑은 하늬바람인들
모두 한곳으로 몰려드는 바람끼리의 간음이다
그때마다 수줍음 타는 문이
뒤틀림으로 삐걱거린다
바람도 문도 공생하는가?
찬찬히 더듬어 살피니
소리의 생명을 몰래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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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바람의 속임수
박종영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접어드는
새벽길을 걸어보면
산뜻하게 안기는 바람소리,
안아보면 싱싱하게 일어서는 바람냄새,
그 속삭임이 아주 비밀스러워
정겨운 설렘으로 벅차다가 얼굴에 부딪치면
정갈한 바람의 중심이 온 몸에 뿌리 내린다.
막지 않아도 사근대며 숨어드는 바람,
슬며시 불어와 어느 창창한
이별의 매듭을 풀어주고
사라지는 바람의 속임수,
가을에는 소스라치게 시원한
바람물결 자루에 담아 은밀한 곳에 가두고
쟁명한 가을로 불타고 싶다.
☆★☆★☆★☆★☆★☆★☆★☆★☆★☆★☆★☆★
《38》
바람의 장난
박종영
고요를 숨긴 채
나지막이 낮게 드리운 갈대숲을 지나
어느 시간마다
파도의 잔주름을 더욱 크게 만들고
동남풍으로 또는 하늬바람으로
이름 높이 달고 불어오는 바람
궂은 심사 가르려고
돌멩이 한 개 집어 들고
힘껏 던지니 아픔 견디다 못해
쨍그랑 쇳소리 울리며 달아나는 바람의 소리
그 소리 오직
훗날 다시 찾아온다는
사납고 질긴 앙갚음의 소리,
아픔 이겨내려 함부로 던져버린
내 세월의 무게로 날아간 돌멩이,
부득이 물속으로 침잠하는
그 돌멩이의 질식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얼마나 낮게 누워 물살에 부대끼는지
궁금하기도 하는 안타까운 시간.
☆★☆★☆★☆★☆★☆★☆★☆★☆★☆★☆★☆★
《39》
봄 숲에서
박종영
봄빛, 그것들은 태초부터 공생의 길에서
더딘 태양의 빛을 타고온다
바람이 뿜어내는 언어들을 들이마시며
언 땅에 생명을 불러들인다
땅속 깊이 감추어둔 물빛으로
질긴 뿌리를 일으켜 다독이며
곱고 귀한 꽃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움도 잊은 채,
초목의 얼굴에 연둣빛 물감을 들인다
산울림 곱게 들려주는 검은 머리 산새의
목청을 돋구어 주기도 한다
어느새 꽃샘추위 이기고 핀 산수유,
산동네 아낙 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싱싱한 쑥 냄새, 오늘은
화사한 웃음안고 돌아와
하나같이 마중과 이별을 반복하는
푸른잎으로 우뚝 서 있는 봄,
참으로 흥겨운 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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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붉은 감 몇 개
박종영
뒤란 푸른 시간이 노란빛으로
치장을 했을 때
터주 토종 국화가 귀띔을 하네,
단감이 예쁜 얼굴 곱게 손질하고
붉은 웃음을 팔고 있다고,
그도 한철이려니 마음 접고 눈감으니
사뭇 가슴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허전하네,
새벽달이 지킨다고 해도
가을 익어 가는 소리에
도망간 소문들을 수 없을 것이고,
다음날 기어이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숨어 가는
붉은 감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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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빈 마음의 모래섬
박종영
하늘에 별들이 놀다간 자리
하나 둘 자리 비우고 떠나고
바닷물이 기별을 넣으면
물새떼 살풋한 발자국 사라진
외로운 모래섬은 기지개를 켠다
물때 맞춰 밀려오는 작은 파도,
고운 모래로 분칠한 작은섬을 간질이면
사르르 곱게 다진 모래 위는
언제나 보드라운 요가 된다
그 요 위에 물결이 가볍게 누워 속삭이면
꼭 맞는 사랑의 이불이 된다
그렇게 포근하게 맞닿은 간격 안으로
갇힌 물결은 언제나
푸른 시간으로 질펀하다
만남이 서툴었던 탓인가?
바닷물은 새로운 섬을 찾아 몰래 쓸려나가고
빈 마음의 모래섬만 외롭다
늘, 그리움에 몸부림치는 가슴에
물새의 발자국이 점을 찍는다
☆★☆★☆★☆★☆★☆★☆★☆★☆★☆★☆★☆★
《42》
빈 주머니
박종영
동짓달 해거름
산다화도 조금은 추위를 탄다
오소소 떨리는 시간에
부러진 햇살이 빈 주머니를 찾아와 촐랑댄다
이것들이 차가운 바람을 피해 숨어들었을까
괜한 심술이 발동하여
팽팽하게 목줄기를 조이며 당기자
바동거리며 할딱이는 숨소리
토닥토닥 불길이 솟을 것 같다
안쓰러워 조인 손을 살며시 풀어주자
아뿔싸, 헐렁한 주머니 옆구리를 트고 달아난다
그로부터 조금 지나
아주 차가운 내 빈 주머니의 배고픔이
가볍게 경련이다
덩달아 마음도 차갑게 흔들린다
빛의 유희를 훼방놓는
미묘한 심술에도 배신을 안기는 부서진 햇살,
자연의 순리도 바르게 다스려야
공생 되는 의미를 배운다
다만 빈 주머니가
따스하게 채워질 때는 어김없이
사계절의 빛을 손에 거머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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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럽게 보내는 꽃무릇 길
박종영
절실하게 열리는 가을 길에서
허튼 생각으로 찬찬히 보지 못하고
길 위에 몸을 던지는 빛 바랜 낙엽의 울음을 듣는다.
배불리 채우지 못해 어쩌다
가벼운 것들은 제 한 몸 가누지 못해
호명되지 못하고 바람의 뒤를 따라 또르르 굴러간다,
굴러가며 옷소매 부여잡은 유혹에 한눈을 팔기도 한다.
하찮은 생명의 여운이라도 멀리
떠나는 길에서는 몸가짐 마음 단속으로
외로움을 옆에 앉혀놓고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고 싶은가 보다.
짧은 가을볕이 빗살처럼 고루 퍼지고
토담집 벽에 등허리를 기대어 서보면
이국의 국경처럼 왜 이리 섬뜩하고 시린 것인가?
살금살금 야위어 가는 가을볕에
바람의 틈을 비집고 온 노을이
꽃 무릇의 허리에 붉은 색을 칠하고
가늘게 슬퍼지고 있는 저것들을 바라보는 것도
이 가을에서 느끼는 이별이다.
푸른 잎을 기다리다
동그라미처럼 지고 마는 붉은 꽃 무릇의 흔적을
누가 서럽게 보내자고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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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섬들채
박종영
갈대밭 옆에 숨어
들려오는 비밀의 소리 그건,
아주 작게 피어나 은색 미각으로 사각대는
간간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 터잡아 수차 돌리는 염부
당찬 기운으로 돌아치는 바닷물,
장방형 염판 안온한 둘레에 가득차 짠 바람과
묵은 세월 피어 올리는
백색 미립의 꽃이 영글고,
고실고실 하얀 꽃물이
토판(土版)의 혈관을 타고 돌 때마다
함초꽃 닮은 6월의 태양은,
천 년의 바다를 기억하는 소금밭을 일구고,
기쁨으로 섬들채 긁어모으는 염부
갯바람타는 흥겨운 고무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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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세월의 바퀴
박종영
두 개의 둥근 얼굴이
원의 균형을 지탱하고 굴러간다.
언제든지 모나지 않은
천형의 굴렁쇠를 가슴에 달고
세월 누비며 굴러가는 고단한 하루가
길 위에 눕는다.
간혹 깍지낀 손의 버팀이 부대낄 때마다
가벼운 바람은 느슨한 기운을 다독이고,
밤의 침묵을 따라 바삐 달아나는 얼굴들이
제각기 빛나는 훈장을 달고 으스댄다.
너와 내가 즐겨야 하는 밤이 깊어갈 때,
타락의 거리 으슥진 곳에서는
발가벗은 추억의 입맞춤이 절정이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삶의 마지막 길까지
이유없이 굴러가야 하는 세월의 바퀴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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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소원
박종영
초가을 개오동나무
이파리 툭툭 털어 내고
바람은 소소하게 황토색 창호지문을
흔들어 깨우고
잠 못 이뤄 뒤척이는 긴 밤
그믐 달빛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는 박 꽃 한 송이
묵주 같은 어둠을 여는
한 그릇 정화수(井華水) 맑은 물 위에
어머니 깨꽃 같은 젊은 날이
환하게 불을 켠다
☆★☆★☆★☆★☆★☆★☆★☆★☆★☆★☆★☆★
《47》
숲에서
박종영
길을 잃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뿌려 놓는 흔적
그 안내의 지혜를 가벼이 어긴 탓으로
산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었다
어둠이 숲과 숲을 비켜가며 무섭게 밀려왔다
적막감이란 이런 때
치유되는 소망을 갖는 것일까?
나뭇잎 사이로 별이 몇 개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다
하찮은 오솔길도
어느 때는
인생의 길임을 뉘우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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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슬픈 기억의 사랑에게 묻는다
박종영
모처럼의 나들이로
좁혀진 마음을 연다
시골버스 경로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감회에 젖는 바람같은 여행
오월의 하늘을 바라보니
산이 따라오며 푸르게 손짓한다
들찔레가 달려오며
분홍의 입술을 건넨다
길옆 정다운 이정표가
서툴게 길을 안내하고
눈에 익은 마을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눌러앉아
빛바랜 세월을 털어낸다
산천은 의구한 것인가
인걸은 번영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인가
실감나게 입속으로 되뇌어도
잡히지 않는 이름하나,
어머니 그,
슬픈 기억의 사랑에게 묻는다.
☆★☆★☆★☆★☆★☆★☆★☆★☆★☆★☆★☆★
《49》
슬픈 낭만을 위하여
박종영
초겨울 아침,
을씨년스럽게 구름이 낮게 흐린다
첫눈이 올 것 같이 싸늘한 바람이 발아래 눕고
푸르던 가로수 은행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행인의 발길에 차이고 밟혀
부서진 잎이 앙상하다
늦가을 정취를 맛보기 위해
일부러 쓸어내지 않고 방치한 게으름이
우리에게 슬픈 낭만을 안겨준다
모든 생명은 낡으면 쓸모가 없는가?
간혹 바람이 일 때마다 굴러가는 낙엽의 모습,
자기들끼리 엉키고 눌려 남은 기운을
보태는 융합의 안간힘이 처절하다
내년 이맘때,
새로운 푸름을 위해 초록의 기운답게
치유와 깨우침의 상처가 역력하다
☆★☆★☆★☆★☆★☆★☆★☆★☆★☆★☆★☆★
《50》
시월에
박종영
선선한 10월의 문을 연다.
조급한 맘 누르고 가을 산을 나근하게 만져보는 일
샛길 골라 걷다 보면 송골송골 땀이 차오르지만
환한 길, 마음은 선선한 기운으로
추억을 들고 내려오는 길목마다 구절초
무더기로 피어 하늘손 벌려 푸념이고,
가파른 양지쪽 한곳에
퍼질게 늦가을 바람으로 여문
망개 열매 동그란 웃음,
톡톡, 솔새 부리가 붉은 가슴을 쪼아대면
낯익은 바람 속으로 곱게 들리는
산의 노래,
바다의 노래,
정녕 눈에 익히 담고 싶은 시월의 풍경이
절로 흥겨운 목숨임을 어쩌랴.
☆★☆★☆★☆★☆★☆★☆★☆★☆★☆★☆★☆★
《51》
신의 흔적
박종영
매년 오월 하순
음력으로 사월 스므닷새날
그날 아침은 내 생일날이고
저녁에는 아버지 제삿날이다
아버지 가신지 어언
햇수로 삼십오년 전,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황토빛 그윽한 유택을 지어 드린후
강산에 피는 꽃이
수십 번 몸살을 앓은 것이다
그때의 눈물이 한 가닥 실낱같이
엄한 빛으로 사라지고 있어 슬프다
저녁에는 아버지 제상 차리려니
생일상은 초라하고 생기가 없게 마련이다
기제(祈祭)하는 늦은 밤
서늘한 도포자락 펄럭이며
저승의 하늘을 건너오시는 아버지,
오래된 목소리 들으며
잔(盞)가득 눈물을 따른다
그사이 탐스런 과일을 고스란히
비워가고 있었으니,
신(神)의 흔적도
그토록 그리운
이승의 맛을 훔친 것인가 보다
☆★☆★☆★☆★☆★☆★☆★☆★☆★☆★☆★☆★
《52》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박종영
하늘높이 날아올라
젊고 씩씩한 밝은 눈으로 지상의
어두운 곳을 흔들어 깨운다
오색 빛으로 치장하여
청명하게 들려주는 영광의 목소리
그 소리를 곱게 들을 수 있어
귀와 눈의 성장이
나를 치켜세우는 기쁨이다
하루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짜내는
사람들의 틈 속은 오늘도,
뜨거운 가슴으로 출렁인다
물의 흐름을 곱게 사랑하자는
마음의 소리,
싱그러운 바람의 냄새를
그리움의 증표로 선물하고 싶다는
다정한 여인의 목소리,
이 모두가 내안에 자리 하고 있어
그 생명의 뿌리에 대하여
아름답게 커가고 있다는 것은
오직,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
《53》
오래된 침묵
박종영
아주 오래된 침묵의 상처를
꿰매주기 위해서
묶인 기다림의 매듭을 푼다
밋밋하게 떠도는 안개
바삐 여민 옷섶 동전깃 으로
촉촉하게 파고들어 풀어지는 가슴은
정녕 잘못 살아온 핑계 들춰
그립던 날
누가 잡아 세우랴 불안하다
뒹구는 세월의 흔적은
언제나 위대하게 열리고
검은 바위 그 바람앞에선
침묵의 그늘 열리게
아주 근엄한 웃음을 들려주고 가든 날
푸른 산맥을 넘는 가쁜 숨소리
그제야
붉게 피워 올리는 유월의 들꽃
☆★☆★☆★☆★☆★☆★☆★☆★☆★☆★☆★☆★
《54》
오월의 연가
박종영
싫증 난 늦봄을 배웅하고 돌아서니
어느새 라일락이 곱게 피는 언덕에 와 있다.
야단법석을 치며 마중한 봄이었는데
이내 돌아서 오월의 사근사근한 바람을 맛보면서
변질한 마음 누구에게 들킬까 봐
두근거리며 남루한 옷매무시를 고쳐 입는다.
준비하지 못하고 궁금하게
그냥 이대로의 낯부끄러운 얼굴로
진정 초록의 오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살찐 바람에 짙어가는 푸른 숲이
곱게 화장을 하는 사이,
노련하게 성장하는 숲의 가장자리를 보기 위해
초록 바람을 빌려 하늘에 오르는데,
떠나는 사월의 꽃들이 시들어 가는 길 기운차게
추스리는 묘방을 준비하는 동안,
신선의 경지에 입문한 푸른 오월이 조아리며
안개 숲에 피어있는 라일락 꽃,
그 환영의 즐거움에 숨어보라 속삭인다.
☆★☆★☆★☆★☆★☆★☆★☆★☆★☆★☆★☆★
《55》
유월의 들꽃
박종영
낮은 산허리 감고 밋밋하게
떠도는 안개 사슬,
푸른빛 밟고 가는 산천마다
풀국새 뭉개진 울음이
쑥 빛으로 물들고,
밭둑 가 애기 똥풀이
아장아장 걸어 나오면
더운 바람에 길 내어주고 비켜선
민들레 가벼운 웃음,
그제야,
등 시린 추억 등에 업고
그리움 밀어 올리는 유월의 들꽃.
☆★☆★☆★☆★☆★☆★☆★☆★☆★☆★☆★☆★
《56》
유혹 앞에서
박종영
여인은 꽃 앞에서
어둔 세상의 그늘을 걷으며 노란 웃음
한 가닥 곱게 입술에 수 놓는다.
한적한 봄이 빙빙 떠돈다
그 부유의 망울이 꽃의 허리에 멈추었을 때,
여인의 아름다움은 아직 싹틈이 게으른
나무의 가슴을 출렁인다.
의젓하게 실어 보내는 그리움의 손짓
마음을 가까이 대면
더욱 짙은 색깔의 유혹 앞에서,
지금 피어오르려 옷을 벗는 꽃봉오리
그 소박한 순수를 향하여
갈채를 보내는 행운을 얻어야 하는데,
사랑의 무대를 푸른 숲으로 옮기는 일
그거 내가 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인가.
☆★☆★☆★☆★☆★☆★☆★☆★☆★☆★☆★☆★
《57》
이별의 문
박종영
이별을 앞에 두고 가슴 졸이면
살며시 스치는 얼굴 하나 둘은 있다.
박꽃처럼 하얗게 피어 달빛 이슬 머금고 서 있거나
아니면 하늘빛으로 글썽거리는 눈물도 있다.
두둑한 정을 송두리째 안고 떠나려는 그리움도 보인다.
구름 물결 올마다 주름잡아 꿰매고 가는 듯,
소소하게 일어서는 얼굴들이
하찮은 들꽃의 눈물 달고 떠나감도 어찌할 수 없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은 이별이 지나간 자리,
초가을 뜨락을 지키는 바람이 손을 멈추고
옹기종기 피어나는 가을꽃들이 서러움을 토해내면
마음의 행간을 비워둔 채 빈터에 눕는다.
그럴 때마다 조금은 가라 앉힐것 같은 고요함,
자자 분한 추억들을 사이사이 가두고
이별의 문,
그 이별의 문을 만들어 나도 눕는다.
☆★☆★☆★☆★☆★☆★☆★☆★☆★☆★☆★☆★
《58》
자운영 꽃길같이
박종영
꽃상여 메고 가는 길이 아니거든
쉬어가도 무방한 산천이다
겨우내 기다리던 들꽃 퍼다가
살짝이 안겨주면 해맑게 열리는 날이다
봄 기운얻어 논둑 채우는 강아지 풀이나
무논 풍덩대는 물총새 물장구가
한낮의 고요를 일깨워
쏠쏠한 향기 피어오르게 한다
낮게 나르는 오월의 푸른 제비,
배부르게 낚아채는 벌레사냥이 날렵하다
저렇듯 곡예를 닮아 허튼 세월에 뿌렸으면
한층 부유한 곳간을 채웠으리라
돌아오는 석양의 길목에
물결치며 가슴 여는 자운영 꽃무리,
은은하게 비쳐오는 색감으로
가슴은 쉽게 달구어 지고
나도 붉은 가슴 받쳐들고
봄 밤 고운 임 찾아보면
기쁨 일어설까
☆★☆★☆★☆★☆★☆★☆★☆★☆★☆★☆★☆★
《59》
징검다리
박종영
물살에 부대끼며 물 깊이 만큼 뿌리를
키워내는 징검다리,
애초에 사람들이 터를 잡아주며
서로 맞닿을 수 없는 간격을 두는 것은
너무 가까운 그리움이 일 때마다
틀의 융합이 흔들리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듬직한 발걸음이 찾아와 편편한
가슴의 가장 즐거운 곳을 가볍게
눌러주는 힘으로 단단한 기운을 얻는다.
누르는 힘은 솟아오르는 기회를 안겨주는 것이어서
아슬아슬한 도약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그 누르는 힘으로 깊게 박히는 주춧돌,
오가는 수많은 세월 바람과
부딪치고 성장하는 작은 물방울과
나를 안아주고 떠나는 크고 작은
슬픈 고기떼의 이름들이
달아진 얼굴의 가장자리에 흩뿌릴 때
아득한 강으로 둥둥 흘러가고 싶은 것은,
오랜 풍상으로 얻은 생명의 뿌리를
으스대고 싶은 것인가?
오늘도 물의 가장자리 깊은 곳에 그리움의
궁전을 만드는 징검다리.
☆★☆★☆★☆★☆★☆★☆★☆★☆★☆★☆★☆★
《60》
첫눈
박종영
누구의 가슴에 슬픔을 달아 주려고
회색 하늘에 닻을 놓고
심한 매질로 뿌려대는가?
어둑새벽 한 겹씩 옷을 벗어 던지고
장지문 두드리는 임의 발걸음소리 같이
세월의 나이테를 좁히려
편편이 돌아오는
저, 하얀 마른 잎 같은 것,
어머니 흰머리 찬바람에 날리는
눈물을 달고 그 옛날
추억의 지름길로 환하게 달리던
그리움 같은 것,
곤두박질치는 숲길 위에
메마른 땅을 울리고 떠나가는
바삭거리며 돌아눕는 낙엽 같은 것,
굽이치는 강물 감고 돌아
흩어지는 하얀 세월의 눈물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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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첫눈 오는 그 날의 오늘
박종영
고무신 발자국이 묻힐 만큼
가늘게 나부끼며 올 겨울 처음으로 내리는 눈발,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앞서간
아들놈의 발자국 신발 치수가
작년보다 더 자랐네.
시린 손 호호 불며 저녁밥 지으려
찬물에 보리쌀 씻는
가여운 아내의 연둣빛 얼굴에
흩날리는 포실한 눈발
어쩜 저리 하얀 것들이 고실고실한 쌀이었으면,
순례자이듯, 답청 하듯 가만가만
눈꽃 그 미량의 무거움을 발걸음은 알기나 할까
눈이 내리니 눈앞이 흐려지고,
모진 세월이 훔쳐 간 가난한 반쪽의 가슴에는
하얀 눈이 사각사각 녹아내려
메마른 눈가를 적시며 함께 울어주는데,
유독 빠르게 깊어 가는 겨울밤,
썰렁한 아랫목에 묻어둔 한 그릇 보리밥을
따스하게 지키며 기다리는 첫눈 같은 하얀 아내의 마음,
소소한 그 시절이 눈물처럼 그리워지는 그 날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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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첫눈 오는 날
박종영
막힘이 없었습니다
내리는 꽃 비를 손으로 막으려 해도
하늘 틈으로
분분히 퍼지는 웃음 막을 길이 없습니다.
공허한 심사로
세상을 탓하고 있을 때
탐닉의 열병을 나무라며 식혀 내립니다.
자유를 외치며 산과 들에 달라붙습니다
널브러져 아름다운 것,
불결하고 더러운 것,
온갖 부정을 덮어 진정한 삶으로 함께하는
동행의 길을 열어줍니다.
첫눈이 펑펑 내립니다
나무에는 순백의 꽃을 피워내고,
바람으로 밀리는
하얀 생명의 축제가 알몸으로 춤을 춥니다.
얼마나 아련한 기다림의 숨결인지 모릅니다
첫눈 오는 날,
붉은 가슴을 열어 안기는
그대 속삭임이 들립니다
나도 눈이 되어 하늘에서 뛰어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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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청춘
박종영
입추 지나고 처서 무렵 선들바람 불어
시누 대 피리 만들어 밤을 새워 불면
섬돌 밑 귀뚜라미도 목청 돋구어 시절을 노래했다.
길어가는 밤 지새며 물기 젖은 가슴으로
베갯잇 갈아 끼우던 어머니는,
뒤란 대숲 서걱이는 소리에도 그리움 차올라
봉창 문에 귀대고 익은 발걸음소리 기다리고 있었다.
단풍물 들기 시작하고 높은 산봉우리가 아득하던 날,
개적삼 겨드랑이 속살 슬쩍 보여주고
그믐밤 별빛 따라 달아난
막내 순이를 그리는 이 밤에도
어머니는, 빛 바랜 옥양목 자락에
눈물 훔치며 은하수 돌다리를 놓았다.
그때마다 아침이슬에 풀기 적셔
인두로 펴는 따스한 삼배 홑창에도
각진 사념을 하얗게 수놓았다.
무던한 세월이 흐르고 강물도 푸르게 찾아오는
연둣빛 바람이 옷섶에 스며들 때,
봄꽃 푸짐하게 필 것이라는
가슴 넓은 남정네의 투박한 목소리 전해 듣고서야
귓불 붉어지는 어머니 웃음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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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초록 풍경
박종영
가슴 볼록한 뭉게구름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청람색 하늘이
산 바위에 얹혀 손짓하고,
노련하게 흔들리기 위해서
녹색의 여름 산을 오른다
산골 물 시샘하듯
톡톡 쏟아내는 산새울음,
창연한 세월의 이름으로 바람 가르는
아담하게 허리 굵은 동백나무숲,
어느 것 하나 눈으로 담아보고 싶어
은빛 물결 잔잔하게 찾아들고
어느해 그리운 이별 마중했던 날이
가슴을 열고 초록 숲에 숨는다
오래 갖고 싶은 차진 흙의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까
곱게 피어오르는 한그루 나무,
그 향기 재미나게 보듬어주던 시절이
마냥 부끄럼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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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타인의 추억
박종영
시간을 내어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힌 헌책을 꺼내 들고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바싹 마른 단풍잎을 발견했다
누가 언제 끼워 두었는지 알 수 없는 낙엽의 책갈피,
서늘한 가을에 뜻밖에 찾아온 낭만이
지난날을 불러와 가슴 설레게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온 그리움의 순간이 마음을 데운다.
책장에 끼어 있는 낙엽의 이유도 모른 채
긴 시간여행으로 마른 생명이 찾아와 문안(問安)이다.
헌책의 간격에 두근거리고 숨어있는
낙엽의 생각은 읽지 못한다
다만 우연스레 시간의 흐름을 타고 찾아온
그 누구의 첫사랑을 엿보는 재미,
마른 잎이면서도 초록 신호를 보내며
그리움을 나누어 갖자는 단풍잎,
오늘, 전달되지 못한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한 개 낙엽의 체온을 만질 때마다,
타인의 추억이 내게로 와
무디고 달아진 마음의 각에 푸른 깃발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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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팔월의 준비는
박종영
해마다 칠월은
중복을 넘기고 지나간다.
후덥하고 어정어정하게 사라지는
짙은 여름의 칠월이
어느 것 하나 성취함이 없이 흘러
초와 분, 시간과 날짜를 만들고,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추억이나 그리움 그리고 허락된 자유와
희망이 한자리에 서 있기를 고집하는
여러 얼굴이 줄줄이 더위에 시든다.
바닷가가 한층 높은 값으로
팔리는 팔월의 둥둥 소리
밀물 길을 따라 오는 파도가
생명의 근원을 손에 쥐여주고,
썰물 길을 갈라놓는 작은 모래톱이
붉은 해당화를
곱게 피어 올리는 적막한 시간에,
태양신의 분노가 갯벌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머나먼 수평선에
한 척 인생의 배를 띄워 슬픈 인연을 싣고 온다.
구릿빛 몸을 말리고
즐거운 웃음으로 마중하는
둥글고 환한 팔월의 준비는,
옷깃을 여미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난 후에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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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푸른 갈대
박종영
여름내 푸른 강물과 놀아나다
속울음 감추고
푸르게 웃자랐구나
새움 솟아오르던
어린 철부지 시절이 엊그제인데
물새 떠난 자리 움켜쥐고
괜한 그리움이 가득하구나
소소하게
초가을 바람이 흔들고 가면
구름처럼 쏟아지는 갈대꽃 웃음.
숨막히게 안아보는 강가에서
가슴까지 차 오른 시린 세월,
한 움큼 눈물로 감추고
메마른 바람으로 떠나는 여름을
손 흔들어 주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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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풀 향기
박종영
산새의 울음으로 대답을 물어도
새벽이슬 머리에 이고
조용한 숲의 소리로 안아주는
풀의 향기
그, 향기
형용하기 어려운
달작 지근한 맛의 비결은 무엇인가
한 움큼 들이마시면 싱싱한 우주 한 개가
가슴에 차오르고
건드리면 더욱 진하게 퍼지는
그 융숭한 색감의 정취를
한 올 한 올 다듬어
숲과 나무사이에 얹혀놓는다
푸르고 알싸한 칠월의 길목에서
정 깊은 사람들의 포옹은
기어이,
풀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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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풍경화
박종영
어지러운 발끝에 채이는 새벽바람은 언제나 차다
상강 지나 늦가을로 접어서는 더욱 그렇다
몇 개 안 남은 나뭇잎이
맨땅을 업고 뒹굴 때마다
땅으로 숨어드는 고요,
어두워지는 슬픔의 소리가 보챈다
나는 오늘도 숲을 닮으려 산을 오르고,
떠나는 절기 달래며 익숙한 그늘에 마음을 심는다
잠시 산자락에 앉아 바라보는 지평 끝으로
산은 강이 되어 흐르고,
슬퍼지기 위해 늑장 부린 산국 한 무리
망설이며, 가는허리 흔들어 주라 아양이다
게으른 석양으로 온기 돋우는 자작나무 숲
작달한 나무 사이로 설익은 산 다래 몇 개,
속살 환하게 발가벗으면
산 까치 볼록한 가슴 훔쳐 날고,
불현듯, 산 넘어 나의 가을은,
천년, 그 묵언의 세월을 어이 혼자 지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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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하늘 바라기
박종영
여름 한 철,
해만 사랑 하다가
영 돌아서지 않는 목줄기,
초가을 바람에 옷고름 풀고
헤픈 웃음 쏟아내도
더욱 미움만 타네
그래서 세상인심은 돌고 도는 것,
골고루 바라기 할 것이지
오메, 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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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행복한 이별
박종영
한 포기 배추처럼 꽝꽝하게 여물어 가는 늦가을,
투명한 생각을 안고 떠나는 빛깔이 곱다
나무들은 소담한 열매를 얻기 위해 한 해
구슬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것인가
갈증으로 숨차던 날 빗방울 한 개의 영롱함으로 오늘,
잘 다듬어진 한가락 풍년가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바라본다
황량한 들녘 덩그러니 잘려나간 벼포기,
아픔의 밑동에 속울음으로 돋아난 초록 웃음이 슬프고
저 멀리 굽은 논둑에선 검불 태우는 하얀 연기가 하늘 길을 연다
물기 잘박한 웅덩이엔 꼭사리떼가 얕은 물 위를 헤엄치며
다가올 시간의 무덤을 향해 여린 숨을 고른다
나지막한 산기슭,
산국, 그리운 향기 피워내느라 가늘어진 허리 짠하고,
혼자 사는 순덕이 어머니의 오래된 가슴에도
풋풋한 추억을 붙들고 새움이 돋아난다.
이토록 절묘한 시절에, 잘게 부서지는 햇빛을 뒤로하고
남은 시간, 행복한 이별을 위하여
시린 발 다스려 남루한 겨울 강을 건너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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