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래는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파워 블로거라는 이름에서 쓰고 있는 <나의 스포츠 이력서>의 첫 번째 글입니다.
제 삶과 관련한 스포츠를 소재로 몇 편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웹진 형태의 회사 사보에 실는 글을 그대로 옮겨 왔음을
밝힙니다.
ㅁ 나의 스포츠 이력서(1)
가난의 설움을 통쾌히 날려버린 프로 레슬링, 복싱 챔피언들(1960년대 후반~80년 중반)
여러분은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시는지요? 저마다 종목과 이유는 다르지만 즐기는 스포츠 한두 개 씩은 있기 마련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깨에 잔득 힘을 주고 두 손을 꽉 쥔 채 봤던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 ‘무슨 일이 있어도 저놈들한테는 꼭 이겨야돼’ 하며 90분 내내 TV를 노려봤던 축구 한일전, 수없이 부딪치고 넘어지며 안경테 깨먹어 꾸지람 들으면서도 마냥 좋았던 농구 시합, 그리고 요즘 즐겨 보는 종합 격투기까지. 스포츠는 개인의 역사는 물론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 어느덧 40대 끝자락, 그 시절 수많은 경기와 선수들에 대한 기억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스포츠와 함께해온 제 삶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오늘은 첫번째로 저의 어린 시절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프로 레슬링과 프로 복싱입니다. 당시에는 프로 레슬링과 프로 복싱, 축구가 3대 인기 종목이었지요. 박치기왕 김일의 프로 레슬링,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를 시작으로 홍수환, 박찬희, 장정구, 유명우 등 한 시대를 날렸던 많은 챔피언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김득구’와 ‘세기의 대결’ 슈거레이 레너드와 토마스 헌즈까지 많은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네요.
박정희보다 유명했던 박치기왕 김일(1929-2006)
지금은 어쩌다 TV에서 마땅한 프로가 없을 때 잠시 보는 미국 프로 레슬링이 전부지만,
1960년대는 단연 프로 레슬링의 시대였고 그 주인공은 박치기왕 김일이었습니다. 당시 프로
레슬링과 그의 인기를 잘 표현한 글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못 먹고
못 사는 설움에 전국민이 마땅히 즐길 거리 하나 없던 시절 김일은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위대한 존재였다 김일이 출전하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서울의 장충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김일은 ‘선’이었고 상대 선수는 ‘악’이었다. 이마를 물어뜯기고 빤쓰에 숨겨온 포크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김일을 보며 온 국민은 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는 순간 터지는
박치기. 상대선수는 링 위에 널부러져 있고 김일은 그 쓰러진 상대를 바라보며 맹수처럼 다가가
덮친다. 이제부터는 심판과 아나운서와 온 국민이 함께하는 카운트다운. “원, 투우, 쓰리이.”
그러고는 화급하게 쳐대는 땡! 땡! 댕! 김일은 이렇게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다.” (정희준의
책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114-116쪽 인용)
칼라 TV와 다방의 추억, 나는야 복싱 해설가
제가 프로복싱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사실 기억에 흐릿합니다. 당시 인기 프로였던 <MBC
권투>를 보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거의 모든 경기를 빼놓지 않은 열렬한
시청자였지요. 그리고 대학생 형님을 따라 당시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던 다방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막 나오기 시작한 칼라 TV로 세계 타이틀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죠. 흰색과
검정색 두 색깔이 전부인 흑백으로만 보다 선명하게 붉은 피 색깔(?)이 낭자한 화면을 보니
한마디로 신세계가 펼쳐진 듯 했습니다. 메캐한 담배 연기와 ‘저 쪼그만 놈은 뭐야.”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많은 어른들 틈에서도 저는 꿋꿋하게 환호와 탄식을 번갈아 지르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형님이 이러더군요. “야 덕아. 너 다음에 권투 해설가 하면 되겠다.”
또 하나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읍내에 유일했던 극장에서 본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얼마나 많이 틀어댔든지 닳고 달아 화면에서는 연신 빗줄기
같은 줄이 죽죽 흘러내리고 음향도 엉망이었지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그 유명한
알리를 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헝그리 스포츠의 대명사 프로복싱, 온 국민을 열광시킨 챔피언들
못 배우고 못 먹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프로복싱은 우리네 삶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오직 승
리를 위한, 그래서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대결이 펼쳐지는 고독한 삶의
무대, 그게 바로 사각의 링이었지요. 물론 열 살도 채 안된 제가 삶의 고독을 알리는 만무했을
테지만 말입니다. 당시 우리 나라는 1966년 김기수(WBA 주니어 미들급)를 시작으로 1974년
홍수환(WBA 밴텀급), 1979년 박찬희(WBC 플라이급), 1980년대 김태식(WBA 플라이급),
장정구(WBC 라이트플라이급), (유명우(WBA 주니어플라이급) 등 많은 세계 챔피언을 배출하며
198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달렸습니다. 이후 잘 알려진대로 프로복싱은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내 인생 최초의 스포츠 스타 박찬희, 그리고 장정구와 유명우
당시 챔피언들 중에서도 단연 저를 사로잡았던 스타는 박찬희였습니다. 1979년 동아대학교 학생
이던 그는 프로 데뷔 1년8개월만에 세계 챔피언에 오른 최고의 테크니션이었지요. 현란한 복싱
기술에다 곱상한 외모까지 더해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어요. 제 인생 최초의 스포츠 스타를
든다면 바로 박찬희입니다. 이후 6차 방어에 패한 1981년 그는 24살의 젊은 나이로 은퇴합니다.
박찬희를 이어 1980년대 초중반 오랜 동안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이 ‘짱구’ 장정구와
유명우입니다. 이들은 각각 세계 타이틀을 15차와 17차까지 방어하고 스스로 타이틀을
반납했으니 아마 이 기록은 세계 복싱 역사의 맨 앞자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일본
선수 킬러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지요. 유명우씨가 요즘 TV에서 복싱 해설자로 나오는 것을
보니 챔피언 시절 그의 경기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4-5차 방어도 대단한 건데 17차 방어라니.
정말 대단한 선수였죠.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아! 김득구’(1957-1982)
중학교 1학년이었네요. 1982년 11월13일 저는 이 날을 오랫동안 기억했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
스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경기입니다. “벨트를 따기 전에는
절대 링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던 도전자의 말이 현실이 될줄은… 이 경기는 긴 말이 필요치 않습
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처절한 승부, 그래서 제가 본 경기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아니
가장 잔인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무수한 난타전 속에 결국 14회 링 바닥에 쓰러진 후 식물인간
상태이던 그는 3일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어머니마저 3개월후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요.
상대였던 맨시니 또한 이날의 충격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의 죽음은 이후
프로복싱 규정 변경의 계기가 됩니다. 세계 타이틀전 15회전이 12회전으로 줄어들고, 라운드
휴식시간 60초에서 90초, 스탠딩 다운제 등이 도입됩니다. 그의 죽음 이후 저는 꼬박 일주일을
방에 웅크려 있었습니다. 내 가족의 죽음을 접한 듯 심한 충격에 휩싸였지요. 그리고 어디선가
구한 여성 잡지에서 그의 인생 스토리를 읽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가득찬
삶과 유일한 희망이었던 복싱에의 도전,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연은 어린 저에게도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
상대였던 맨시니와 그의 아들이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도 있네요.
복싱 황금기를 이끈 빅 4, 세기의 대결! 슈거레이 레너드-토마스 헌즈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지만 1970~80년대 복싱의 인기는 본고장 미국에서는 더욱 엄청났습니다.
그시절 세계 복싱 무대를 호령한 이른바 빅 4는 ‘신이 내린 천재 복서’ 슈거레이 레너드, ‘디트로
이트의 코브라’ 토마스 헌즈, ‘파나마의 영웅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 그리고 ‘링의 도살자’ 마빈
헤글러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스타는 레너드였지요. 이들이 물고물리며 펼친 경기는
그대로 미국 복싱의 황금기였지요. 그중에서도 1981년 10월 열린 레너드와 헌즈의 웰터급 통합
타이틀 매치는 지금까지 열렸던 수많은 라이벌 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단연 최고로 꼽는
경기입니다. 저 또한 최고의 프로복싱 경기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이 시합을 떠올립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당시 경기 동영상도 많이 있더군요. 혹 여유 있으시면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복싱
역사에 기록된 경기를 보시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그 시절 세계 챔피언들의 말>
“전국민이 박치기 한 방에 통쾌함을 느끼는데 아파도 어떻게 병원에 갔겠는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박치기였고,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아픈 것이었다.” –김일
“내가 이걸(계란 후라이) 먹고 이겨야 너희들(굶주린 가족들)도 살 수 있다.” –김기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오냐 대한민국 만세다.”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
“국민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날 시합에 지고 나니깐 너무 편하고 좋았다. 세계 챔피언이 될
때보다 챔피언을 빼앗겼던 그날이 더 좋았다.” –박찬희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내 주먹이 아니라 나의 냉철함이다.” –슈거레이 레너드
모두가 춥고 배고프던 시절, 통쾌한 박치기로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매다꽂은 박치기왕, 계란 후
라이 하나 먹고 “너 오늘 죽었어.” 하고 링에 올라 기어이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선수들. 그들의
투혼이 온 국민을 열광시키며 하나로 만들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그 시절 이
야기입니다. 진정한 챔피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을 표합니다.
* WBA(세계권투협의), WBC(세계권투평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