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평택 소통 김 평 탁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국민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환영합니다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2012.8.7아침 송목산악회 모인의 글에서 평택
오늘의 역사
① 10일장(十日場) : 1972.8.8 에 발표된 농림부의 「농촌시장 개선방안」중에 있는 새로운 장(場)제도.
종래 5일장이었던 시골의 장을 10일장으로 바꿨다가 1976년에는 전국에 산재한 1천여의 장을 모두 상설시장(常設市場)으로 바꾼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2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5일장은 그 자취를 감추고 등짐 장수, 장돌뱅이도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② 이 이 동상 제막(1968) : 높이 4.5m.
서울 사직공원 소재.
⇨12월 26일.
③ 증권거래소 개장(1956) : 1956년 개설 당시 명동에 위치했던 증권거래소는 1979년에 여의도로 이사하면서 한국의 Wall가를 형성하였다.
이후 거래소는 매매체결 업무 전산화 추진 등 시설, 제도 면에서 선진화된 증권시장으로서 infra를 구축해 가기 시작. 증권거래소의 매매체결 업무 전산화에 대한 구상은 198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수작업으로 처리되던 주식의 매매체결은 거래량이 증가함에 따라 상당히 지연 처리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권거래소는 주문 전달 및 시장정보 분배 업무의 전산화와 병행하여 매매체결 업무 전산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매매체결 시스템 개발 업무는 1986년부터 시작되어 여러 번의 시험을 거쳐 1988년 3월 3일 가동하게 되었습니다
④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1936)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
1936년 오늘 벌어진 마라톤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세계의 건각들을 모두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2시간 29분 19초. 당당한 세계 신기록입니다.
그러나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국적은 Korea 가 아닌 Japan으로 기록됐습니다.
1935년 전 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뒤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손기정 선수.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 선수는 고개를숙인채 나라 잃은 울분을 삭입니다.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제패를 보도한 동아일보는 손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없앤 사진을 실어 폐간되기도 했습니다.
⑤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1953) : 6.25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12일이 지난 1953년 오늘.
우리나라와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 합니다.
경무대에서 우리나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조약에 서명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공동 대응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전문 6조의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같은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되고 이듬해인 1954년 11월 18일 정식 발효됐습니다.
⑥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1973) :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자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일본과 미국에서 반유신체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김대중씨가 1973년 8월 8일 5명의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일본 동경에서 납치돼 한국의 동교동 자택으로 강제 귀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납치 당시 김대중씨는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기 위해 동경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 납치범들에게 납치됐다.
납치범들이 사용한 선박은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던 공작선 '용금호'였다.
납치범들에 의해 동경에서 오사카로 옮겨진 김대중씨는 용금호에 실려 8월 11일 부산에 도착한 후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강제 이송됐다.
유신체제 10개월만에 일어난 이 납치사건은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라이벌을 권력의 힘으로 제거하려는 연극으로 드러나 국내외에 큰 물의를 빚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일관계에 큰 마찰을 일으켜 사건 86일만인 11월 1일 김용식 외무장관과 후궁 주한 일본대사 사이에 김동운 1등 서기관 해임, 김대중의 해외 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 일본 방문 등에 합의, 정치적 결탁으로 종결지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원이 김대중씨를 납치한 목적이 살해에 있었는지 여부와 용금호 상공에 정체모를 비행기가 과연 존재했는지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⑦ 황석영씨 범민족대회남측추진본부 대표자격으로 평양 방문(199
0) : "저는 정치가도 아니고 무슨 뚜렷한 이념을 따르고 있는 사람도 아닌, 분단된 우리 한반도의 작가입니다.
(중략)
지금부터 우리네 조국 강산은 봄입니다.
봄꽃은 우리나라 남쪽끝의 한라산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이 휴전선 철조망을 넘어서 북의 백두산 기슭에 피어납니다.
저와 저의 동료들과 민중들은 우리나라의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여린 풀꽃들을 눈물이 나도록 사랑합니다.
바로 저들의 재생력이야말로 이 무렵이면 우리 국토를 뒤덮는 외국군의 탱크와 미사일을 이겨낼 위대한 힘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일본을 떠나 북한을 향하며 황석영이 낸 성명서 '북 을 방문하는 나의 입장에 대하여' 중 일부이다.
1989년 5월 방북한 황석영은 이후 4년여의 해외 망명생활을 하며 북한기행문 <그곳 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국내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27일 귀국한 그 는 곧바로 구속돼 공주교도소에서 5년 이상 옥고를 치르다 1998년 3월 특사로 풀려나 왕성한 창작 활동과 외부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 <오랜된 정원>이란 소설을 냈다.
만 5년 가까운 옥살이 동안 그는 몇 편의 장편소설을 구상했는데, <오래된 정원>은 그 중 처음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⑧‘3선 개헌’ 반대 국회 단상점거 : 1969년 8월 8일 제71회 임시국회 첫날, 개회식은 열리지 못했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공화당이 당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법안을 발의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3선 개헌’ 법안이다.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에, 1967년 7월 6대 대통령에 취임해 이미 중임을 했기 때문에 개헌을 하지 않고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9시부터 유진오 신민당 총재를 비롯한 소속 의원 35명이 국회 본회의장과 사회석 국무위원석을 점거해 ‘몸으로 개헌을 막겠다’면서 실력저지에 나섰다.
이들은 국회소집 자체를 못하도록 본회의장 앞자리에 있는 의자 집기 등을 단상에 산더미처럼 쌓았다.
단상으로 통하는 좌우 통로도 모두 봉쇄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오전 10시 10분 본회의장으로 속속 입장해 야당 의원들과 대치했다.
신민당은 농성에 앞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공화당이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3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족단합을 무너뜨리는 역사적 비극의 시초로서 통탄을 금치 못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공화당은 개헌법안을 내놓으면서 “박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 아래 경제 건설과 국방력 강화에 계속 총력을 집중함으로써 1970년대의 위기와 시련에 대비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주적인 통일한국을 건설하고야 말겠다는 국민의 의지와 요청에 따라 개헌안을 제출하게 됐다”는 성명서를 냈다.
신민당 의원들은 이날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이효상 국회의장은 바로 다음 날인 9일 오후 국회 본회의 보고도 않고 의장 직권으로 공화당 발의 개헌안을 정부에 직송해 버렸다.
이날 낮 12시 20분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에선 개헌안 공고를 바로 의결했다.
박 대통령이 여기에 서명하고 정일권 국무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부서(副署)한 다음 즉각 공고했다.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신민당 의원들은 ‘3선 개헌 결사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의사당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미리 대기 중이던 경찰에 밀려 20여 분 만에 의사당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이후 개헌 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 신민당 의원 3명을 포섭했다.
같은 해 9월 14일(일요일) 오전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하고 있던 신민당 의원들을 피해 국회 3별관에서 투표를 했다.
찬성 122표, 반대 0표로 개헌안은 통과됐고 이어 실시된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개헌이 확정됐다.
박 대통령은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53.2%의 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45.2%)를 누르고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2008)
사육신 처형(1456) :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세 사람을 숙청하고 권력을 차지한 수양대군이 2년 뒤인 1455년 조카인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격분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 등은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게 된다.
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456년 6월 오늘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국왕의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하는 것을 계기로 수양대군(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본래 이에 동조하고 있던 김질은 거사가 실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 초조해진 나머지 거사 계획을 장인인 정창손에게 고하였고, 이 사실은 세조에게 알려졌다.
주모자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세조가 보는 앞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거부한 채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와 배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1456년 오늘,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백관들이 빙 둘러보는 가운데 사지가 갈갈이 찢기고 3일 동안 사람들이 오가는 저자에다 목을 걸어두는 참형을 당하였다.
또한 그들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金文起)·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화를 입었다.
하지만 이들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어 오늘날 사육신묘가 자리잡고 있는 동작구 노량진동의 민절서원(愍節書院)에다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히스피아.2010).
⑨ 제17회 세계 잼버리(World Jamborees) 개막(1991) : 1991년 오늘 '세계는 하나'라는 주제 아래 지구촌 청소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이 주최하게 된 제17회 세계잼버리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벌 대회장에서 개막됐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세계잼버리에 지구촌 129개 나라에서 온 만9천여 명의 청소년들이 참가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각 나라에서 온 스카우트들은 8박9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화합과 우의를 다졌다.
언어, 피부색, 종교가 다른 세계의 청소년들이 63만여 개의 텐트 안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이념과 인종을 뛰어 넘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잼버리는 제1회 대회가 1920년 영국에서 개최된 이래 4년마다 세계를 돌며 개최돼 왔다.
'잼버리'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쾌한 잔치', '즐거운 놀이'를 뜻한다.
⑩ 8·8 부동산대책 : 1978년 8월8일, 정부가 강도 높은 부동산억제정책을 내놓았다.
이름하여 ‘부동산 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나온 부동산종합대책으로도 평가되는 8ㆍ8대책의 배경은 과열. 서울 지역 땅 값이 1년 사이 두 배나 오르고 아파트를 당첨만 받으면 바로 프리미엄이 붙는 과열 분위기를 억제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규제책을 내놓았다.
마침 아파트 특혜분양과 여당 국회의원의 여고생 성추행 사건으로 민심이 들끓고 있음을 감안한 정부는 대책에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넣으려고 애썼다.
토지거래 허가ㆍ신고제 도입을 비롯해 기준지가 고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 시행,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공한지세 부과 등이 포함되고 양도세 과세 강화 방안도 담겼다. 공인중개사제도 도입과 토지개발공사 설립도 이때 방향이 정해졌다.
효과는 있었을까.
그랬다.
특히 미등기 전매에 대한 양도세 100% 부과 방안이 시장에서 먹혔다.
무리해서 아파트를 계약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계약을 떼인 경우도 적지않아 폭등세가 바로 꺾였다.
문제는 당초 의지보다 약해졌다는 점. 강만수 국제경쟁력강화위원장의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 따르면 건설부와 내무부의 반대로 토지거래허가제가 신고제로, 변호사에 의해 토지매매계약 체결제도는 공인중개사제도로 각각 변질됐다.
경제부처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양도세도 갈수록 완화돼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8ㆍ8대책뿐이 아니다.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62건의 부동산 관련 대형 발표를 분석하면 방향도 원칙도 없이 순간마다 대증(對症)요법으로 대처했다는 점이 읽힌다.
공무원들이 정치권의 주문에 따라 신조와 정책을 뒤바꾼 사례도 있다.
부동산정책은 언제까지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할까.
(인터넷한국일보, 2009/08/07)
⑪ 미-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1978) : PLO 즉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은 1978년 오늘 미국을 강력히 비난합니다.
미국과 이집트 이스라엘이 한달뒤에 정상회담을 한다고 발표했기때문입니다.
미국의 카터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그리고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은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 정상회담 필요성에 뜻을 같이 했습니다.
아라파트 PLO 의장은 정상회담 대상에 PLO를 제외한 것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⑫ 레바논, 영국인질 석방(1991) : 레바논은 5년 동안 인질로 억류하고 있던 영국의 WTN TV 기자 존 매카시를 1991년 오늘 석방합니다.
매카시는 지난 1986년 4월 파견근무를 마친 뒤 레바논의 베이루트 공항으로 가던 중 친 이란 회교단체원들에게 납치됐습니다.
시리아에서 석방된 매카시는 영국공군기 편으로 영국에 돌아왔습니다.
⑬ 동남 아시아국가연합(ASEAN) 창설(1967) : 태국 수도 방콕에서 태국 등 동남 아시아 5개국이 국가의 연합으로 공동 선언.
ASEAN ; the Associat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폴의 5개국 대표가 '동남아시아연합(ASEAN)' 결성을 발표했다.
ASEAN은 5개국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등의 지역협력기구임과 동시에 어떠한 형태의 외부간섭으로부터도 우리들의 안전을 지킬 것이라면서 간접적으로 공산세력에 대항하는 결속을 강조했다.
동남아시아 지역내 협력체제로서는 이미 1961년에 발족한 태국, 말레이시아연방, 필리핀 3국에 의한 '동남아시아연합(ASA)'이 있었지만 이즈음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반공을 내세우는 ASEAN의 탄생은 ASEAN 5개국이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치하는 결과가 돼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⑭ 노틸러스 북극 도달 : 1958년 8월8일 미국 원자력잠수함 노틸러스가 북극점에 도달해 북극해의 잠항(潛航) 횡단에 성공했다.
앤더슨 함장과 그의 동료들은 바다 속으로 북극을 통과한 첫번째 사람들로 기록되었다.
앵무조개란 뜻의 이름을 지닌 그들의 배는 역사상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1952년 6월에 기공해 1954년 1월에 진수됐고, 1955년 1월 핵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아 항행을 시작했다.
1980년까지 바다 속을 누비던 노틸러스는 1985년부터 코네티컷주 뉴런던의 노틸러스 기념 및 잠수함 부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노틸러스가 바다 속으로 북극점을 통과한 이듬해인 1959년 8월11일에는 미국의 또 다른 원자력 잠수함 스케이트가 역시 수중으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노틸러스는 1800년 미국 엔지니어 로버트 풀턴이 프랑스에서 시험 운행해본 잠수정의 이름이 된 이래 잠수함의 이름으로 애용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틸러스는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과학소설 ‘해저 2만리(1870)에 나오는 노틸러스일 것이다.
186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노틸러스는 당대 과학적 상상력의 끝간데를 보여주는 초첨단 잠수함이고, 이 잠수함의 주인 네모 선장은 소설의 화자인 박물학자 아로낙스 교수가 범접도 하지 못할 해양생물학.해양지리학 지식을 갖춘 수수께끼 인물로 묘사된다.
해저2만리는 노틸러스가 북극 부근에서 말스트룀(소용돌이)을 만나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 대목의 묘사는 이렇다.
말스트룀!
이보다 더 두려운 상황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이름이 우리들의 귀를 울릴 수 있을 것인가?
강철 같은 몸뚱이들도 부서지는 곳, 노르웨이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나무들이 닳아서 털가죽이 되는 곳, 그 바닥의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소리는 어떠했던가!
(고종석,2003)
⑮ 닉슨 미국 대통령 사임(1974) : 미국 대통령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인정하고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대통령 선거전 당시 닉슨의 공화당 행정부가 행한 불법활동이 폭로되어 발생한 정치 스캔들이다.
1972년 6월 17일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한 5명의 남자가 체포되었다.
며칠 후 이 5명을 비롯해 전 백악관 보좌관 E. 하워드 헌트 2세와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 법률고문인 G. 고든 리디가 가택침입죄와 도청죄로 고발되었지만, 닉슨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백악관이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연루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은폐'를 지휘했다는 고발이 있었고 수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수사 결과 1972년 선거운동에서 벌어진 갖가지 공작이 드러나고 백악관에 설치된 초법적 정보기구의 존재가 알려지는 등 닉슨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8월 4일 닉슨은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를 지시했으며, 수사의 범위를 백악관까지는 확대하지 말도록 연방수사국(FBI)에 지시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치적 기반을 잃은 닉슨은 결국 스스로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부통령인 제럴드 R.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1974년 9월 8일 무조건 사면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더이상 처벌은 받지 않았다.
⑯ 제1회 KKK단 전국대회가 워싱턴에서 개최(1925) : 흑백충돌은 2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남북전쟁후 테네시주에서 조직된 백인우월주의단체 큐 클랙스 클랜(KKK)단은 1923년 독립기념일에 거리행진을 했고, 1925년 8월8일 워싱턴에서 제1회 전국대회를 열었다.
흑인들은 이에 맞서 민권운동을 꾸준히 벌였다.
결과 1954년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하지만 68년 비폭력 공민권 운동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면서 급진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흑백갈등은 94년 LA흑인폭동 에 이르기까지 미국사회의 저류에 흐르는 시한폭탄으로서 새로운 세기를 맞고 있다
⑰ 英기자 존 매카시 석방(1991) : “아직 갇혀 있는 동료 인질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를 지탱해 준 건 그들이었다.”
1991년 8월 8일 존 매카시는 꿈에 그리던 고국, 영국 땅을 다시 밟으며 이렇게 말했다.
레바논에서 이슬람 테러조직에 납치된 지 1943일 만이었다.
월드 와이드 텔레비전 뉴스 초년병 기자 존이 베이루트에 파견된 것은 1986년 4월. 당시 레바논은 10년 넘게 내전 중이었다.
기독교 성향의 정부가 서방의 비호를 받는다고 믿은 이슬람 반군은 전략적으로 서양인을 납치했다.
인질로 잡혀 있던 영국인 세 명이 베이루트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된 날, 존은 네 번째 영국인 인질이 되었다.
5주간 취재를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목청을 울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미라처럼 온몸이 테이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어둠은 빈틈이 없었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구타와 폭염, 살해 협박에 익숙해지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영원할 것 같은 독방의 무료함.
“책을 빼앗긴 뒤 난 내 안에 있는 것만으로 생존해야 했다.
기억은 식량과 같았다.
과거의 일을 수없이 떠올려내고 또 삼켰다.”
불행 중 다행일까.
존은 절망의 문턱을 함께 넘을 동지를 만났다.
또 다른 인질 브라이언 킨난. 존이 납치되기 며칠 전 실종사실을 보도한 북아일랜드 청년이었다.
같은 쇠사슬에 묶여 4년간 동고동락했던 그들의 고군분투는 2003년 ‘어두운 비행(Blind Flight)’이란 영화로 제작됐다.
1990년 10월 레바논 정부군은 시리아군의 도움으로 통제력을 회복했다.
존과 브라이언은 레바논 정부와 유엔의 합의에 따라 함께 풀려났다.
존은 과거의 악몽에 굴복하지 않았다.
8년 만에 다시 레바논을 찾아 시아파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그들이 납치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존은 영국과 오랜 갈등을 빚어온 북아일랜드를 브라이언과 함께 순례하기도 했다.
그때의 기록이 ‘길 위의 유령(A Ghost Upon Your Path, 2002년)’이란 책이다.
그 속에는 대영제국주의가 강요한 무고한 이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존은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장에서 비로소 인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1943일’은 끔찍했지만 새로운 사실에 눈뜬 각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2007)
⑱ 영미 석유협정 : 1944년 8월8일 워싱턴, 미국과 영국이 석유협정을 맺었다.
골자는 두 가지. 국제석유위원회를 설치해 ▦세계 수요를 예측하고 ▦가채 매장량과 수급 요인을 파악해 각국의 권장생산 쿼터를 할당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 간의 개별협정으로 성립된 기구가 다른 나라의 생산량을 할당한다는 내용이 어불성설로 들리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석유생산량이 세계 총생산의 63%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세계 수요의 5%밖에 생산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미래의 유전이라고 생각했던 중동지역 역시 영국과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시절이다.
협정의 출발점은 상호불신. 미국은 영국이 전후 중동의 석유를 독식하려 들 것이라고 의심했다.
영국은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 뻔한 미국이 전후 중동질서를 재편하면서 석유이권을 독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은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미국 내 매장량은 언제 터질지 모를 다른 전쟁에 대비해 아껴두는 대신 중동 지역에서 석유를 공급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영국과 협력하게 된 배경이다.
거창한 명분과 정교한 손익계산으로 탄생한 영미 석유협정은 곧 사문화하고 말았다.
미국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서다.
정부의 주도를 원하지도 않고 값싼 중동산 원유가 수입되면 이익을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 석유업계의 로비 탓이다.
영미 석유협정은 반짝하고 사라졌지만 그 틀의 생명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 대신 영미계 대형 석유회사들이 원유 수급을 좌지우지해온 것이다.
1차 석유위기 이후 석유수출국기구와 산유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하지만 메이저들의 힘은 여전하다.
석유파동과 유가상승ㆍ수급에 상관없이 영미계 메이저들의 수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간다.
보이지 않는 영미 석유협정이 아직도 원유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⑲ 소련 대일(對日) 선전포고 :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틀 전인 8월6일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해 일본의 항복이 코 앞에 닥친 시점이었다.
선전 포고와 동시에 소련 공군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주둔해 있던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북단에 폭격을 시작했고, 8월13일에는 1개 사단의 소련 육군이 관동군을 격파하며 두만강 일대로 밀려들었다.
이틀 뒤인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소련군은 북한 지방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열흘 남짓만에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는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이 되었지만, 소련의 참전을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요구한 쪽은 미국이었다. 태평양과 유럽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해 일본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에도 힘이 달리던 소련으로서는 동북아시아 쪽으로 군사력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인 1941년 4월13일, 소련과 일본은 모스크바에서 유효 기간 5년의 중립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두 나라 가운데 한 쪽이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다른 나라는 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지키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계속 종용했고,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한 뒤 두세 달 안에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루스벨트에게 약속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 전쟁이 끝난 것이 그 해 5월8일이었으니, 스탈린으로서는 속셈이 뭐였든 약속을 지킨 셈이다.
(고종석,2002).
⑳ 유럽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 정복 : 1786년 8월 8일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등정은 현대적 의미의 등산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전쟁을 위해 알프스를 넘었고, 산에 기대어 살던 족속들은 생존을 위해 산에 올랐다.
몽블랑 등정은 도전과 재미라는 스포츠 목적의 산행 시대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알프스를 오르는 행위"를 의미하는 알피니즘(alpinism)은 몽블랑 등정 이후 일반에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몽블랑 등정의 일등공신은 제네바 출신의 자연과학자 드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 1740-1799)였다.
알프스 산맥 탐사에 많은 기여를 한 소쉬르는 자신의 4,807m 몽블랑 등정의 꿈을 포기한 뒤, 상금을 내걸고 몽블랑 정복을 독려했다. 계속된 등정 실패 이후, 드디어 1786년 8월 8일 의사 미셸 파카드 (Michel Paccard)와 수정 채집가 자크 발마 (Jacques Balmat)가 몽블랑 정상을 올랐다.
다음 해인 1787년 소쉬르 역시 발마의 안내로 오랜 세월 염원했던 몽블랑 등정에 성공했다.
몽블랑 정복 이후 세계 최고봉을 향한 끝없는 도전도 계속되었다. 8,848m의 에베레스트(Everest)는 8번 9기의 집념을 보여준 영국 원정대에 의해 1953년 5월 29일 최초로 정복되었다.
㉑ 재클린 케네디 로마 도착(1962) : 1962년 오늘 이탈리아 로마 공항.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비행기에서 내립니다.
4살난 딸 캐롤린을 데리고 로마공항에 도착한 재클린 여사는 뜨거운 환영을 받습니다.
남편인 존 F.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사망한뒤 재클린여사는 1968년 이탈리아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결혼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예순 두살때는 다이아몬드 사업가 모리스 템펄스만과 세번째 결혼하고 199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㉒ 영국 열차 강도사건 발생(1963) : 1963년 오늘 !
영국에서 세기적인 열차강도 사건이 일어납니다.
런던 서북쪽 체팅톤 마을에서 20여명의 갱들이 사제 신호기를 이용해 우편열차를 세웁니다.
갱들은 열차에서 스무개의 우편낭을 훔쳐 미리 대기시켜 놓은 트럭에싣고 달아납니다.
15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갱들이 열차에서 턴 금액은 7천만 달러.
영국 경시청은 시민들의 제보와 막대한 경찰력을 동원해 범인들을 모두 붙잡습니다.
범행의 주모자들은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받습니다.
****1963년 8월 8일 오후 영국 런던 서북쪽의 한 마을에 갑자기 20여 명의 떼강도가 들이닥쳤다.
이들이 노린 목표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런던의 유스턴으로 가는 우편열차를 멈춰 세우는 것.
이 열차의 우편주머니에 담겨 있는 7000만 달러(약 700억 원)를 훔치기 위해서다.
강도들은 사제신호기를 이용해 125년간 한 번도 중간에 멈춰 선 적이 없는 우편열차를 세웠다.
이들은 열차 앞의 2개 칸과 나머지 객차를 분리한 뒤 1마일가량을 달렸다.
잠시 후 열차에서 20개의 우편주머니를 대기시켜 놓은 트럭에 실었다.
그 당시 열차 안에 있던 우체국 직원 대부분은 강도가 침입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 20분 만에 끝난 전대미문의 열차강도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영국 경시청은 비상이 걸렸다.
막대한 경찰력을 동원해 전과자를 분석하는 등 범인 잡기에 나섰다.
결국 경찰은 4개월 만에 열차강도들을 모두 붙잡았다.
주모자들은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경찰의 조사 결과 강도들은 열차의 신호 조작법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고 전화선을 끊어 외부와 연락을 못하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도들은 복면을 한 채 쇠파이프로 열차 운전자를 협박해 객차를 이동시켰다.
경찰은 이 사건이 내부의 도움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며 수사를 계속했지만 그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영국 노동당의 한 의원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우편열차가 강도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으나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때문에 정부와 국회가 사실상 열차강도사건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처럼 놀랄 만한 대도(大盜) 사건은 국내에서도 발생했다.
1980년대 초 이른바 고위층의 집을 털어 세간의 화제가 됐던 조세형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훔친 물건의 일부로 가난한 사람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현대판 홍길동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오랜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최근까지도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감방 신세를 지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경제가 악화되고 서민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강도 사건도 단순한 금품 탈취를 넘어 일가족을 살인하는 등 흉포화하고 있다.
정부가 치안을 강화하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민심을 헤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2006)
㉓ 기타 오늘의 역사㉔㉕㉗㉘㉙㉚
1792 프랑스 루이16세 폐위, 왕정 붕괴
1900 제1회 데이비스컵 선수권대회 개막
1907 각부에 일인차관 임명 시작
1942 미국-일본, 제1차 솔로몬해전
1942 인도, 국민회의파 영국 철퇴결의안 가결
1943 이탈리아, 연합군에 항복
1944 동아기독교(침례교전신) 강제 해산 당함(천년왕국사상과 신앙 이 천황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라 판결)
1947 조선임시정부 약헌 입의(立議)통과
1949 이승만-장개석 진해에서 정상회담
1949 부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53 소련, 수폭보유 성명
1953 한미상호방위조약 서울에서 가조인
1956 전국 시-읍-면장 및 의원 선거
1957 한국, 국제 원자력 기구 조약에 가입
1958 함석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60 백낙준 참의원 의장, 곽상훈 민의원 의장 피선 개원
1960 제2공화국 성립
1966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중국 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회 총회에서 채택
1967 아시아 5개국 동남아국가연합(ASEAN) 결성
1969 MBC TV 개국
1973 김대중씨, 일본서 피랍 (8.13 서울자택 귀환)
1975 포르투갈, 좌경내각 출범
1975 한국-싱가포르, 국교수립
1981 미국 중성자탄 생산 결정
1983 과테말라에 군부쿠데타 발생
1983 모하마드 말레이지아 수상 내한
1989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에 선출
1989 14세 바둑천재 이창호, KBS 바둑왕에 올라 세계최연소 타이틀 쟁취
1990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 쿠웨이트 병합선언
1991 유엔안보리, 한국-북한 유엔가입신청안 만장일치 승인
1992 여자핸드볼,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 구기사상 첫올림픽 2 연패
1997 헌팅턴 병 환자의 뇌세포 사인 발견
오늘의 인물
① 김유신(金庾信 ; 595 ~ 673.8.8) : ⇨6월 11일.
⇨9월 23일.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茂山: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太宗武烈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忠北 永同郡의 飛鳳山城)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泗?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周留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太大舒發翰)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② 균여대사(均如大師 ; 0923.8.8 - 0973) : 고려의 고승.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당시 가야산 해인사의 승려들이 남북악으로 갈리어 화엄교의 대립이 심하였을 때 북악의 법통으로 양파를 통합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를 위해 송도에 법귀사를 지었다.
③ 김홍일(金弘壹 ;1898 - 1980.8.8) : 독립운동가․군인.
정치가.
호는 일서(逸曙).
평북용천 출신으로 조선의용군사령관 중화민국 육군소장, 해방후 육군종합대학총장. 주중대사. 외무부장관. 신민당수를 역임하였다.
④ 황종희(黃宗羲 ; 1610.8.8 - 1695) : 중국 명말 청초의 유학자.
사상가.
자는 태충(太沖).
호는 이주(梨州).
저장성(折江省) 출생.
고증학의 선구자로서 천문․역법(曆法)․역사 등에 관한 저술이 많다.
명나라가 멸망할 시기에 민족주의적 사상을 지녔으며, 명조(明朝)의 회복을 위하여 의용군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실패. 이후는 청조(淸朝)에 출사치 않고 학문에 전념, 청조실증사학(淸朝實證史學)의 시조이다.
저서에 <명유학안> 등이 있다.
⑤ 최승희(崔承喜 ; 1911.11.24 ~ 1969.8.8) : [요약] 북한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단에서 활동한 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한국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하였다.
구미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동양의 무희'로 불리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월북 후 평양에서 조선춤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서울
주요저서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
[본문]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오빠 최승일(崔承一)을 따라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경성공연에 출연하여 유명해졌으며,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그후 한성준(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춤에 두게 되었다.
1931년 문학운동가 안막(安漠)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하여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어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 격찬을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이어 1937년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다.
1942년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후 위문공연을 하였다는 이유로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였다.
1946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베이징[北京] 중앙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으나,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연구소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다.
그후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 등의 저서를 냈으며, 1967년 숙청당하였다.
한국에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그녀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한국의 민속춤이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2006년 3월에 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을 함광복 씨는 재미동포신문 신한민보 1938년 2월 3일자에서 최승희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두산백과사전.2009)
⑥ 방일영(方一榮 ; 1922.11.26 ~ 2003.8.8) :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전 회장이다.
조선일보 전 사주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현재 조선일보 대표이사이며, 둘째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
혼외자녀 3명이 있다.
사생활 [편집] 방일영은 매우 자유 분방한 삶을 살았다.
사후의 유산다툼에서 큰아들 방상훈 쪽의 변호사는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라고 말했다.
가족 [편집]
양 할아버지 : 방응모(1883 - 1950)
아버지 : 방재윤( ? - 1940)
동생 : 방우영(1928년 - )
처 :
아들 :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아들 :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
조선일보의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인수·운영하면서부터였다.
방응모는 신문경영을 맡은 후, 총액 50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태평로에 새 사옥을 짓는 등 과감한 사세확장을 꾀했다.
또한 1934년 1월에는 출판부를 창설하여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등 일반서적 간행과 함께 월간잡지 《조광(朝光)》(1935.1), 《여성(女性)》(1936.4), 《소년(少年)》 등을 발행하였다.
한편 1929년 7월부터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남녀학생을 동원하여 한글보급반을 조직하고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해마다 이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 함께 문맹퇴치, 농촌계몽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신문 발행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가 1945년 11월 23일에 복간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사장 방응모가 납북당하게 되었고, 그후 장기영(張基榮), 방일영(方一榮)과 방우영(方又榮)이 경영을 맡기도 했다.
⑦ 제임스 어윈(James Irwin ; ? - 1991.8.8) : 미국 우주인
1971년 달 표면에 발을 디뎠던 우주인이었으며 후에는 목사로 변신해 노아의 방주 잔해를 찾아 헤매기도 했던 제임스 B. 어윈(61)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장발작의 병역이 있는 어윈은 사망 당시 중부 콜로라도 기독교단체를 순회 강연 중이었는데 그는 달위에서 걸었던 12명의 사람 중 첫번째 사망자가 됐다.
71년 7월 26일 데이비드 R. 스코트, 알프레드 M. 워든과 함께 아폴로 15호를 타고 2백95시간 동안의 달 여행을 시작했던 어윈은 스코트와 함께 월면 이동차를 처음 사용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달에서 뒤에 '창세기의 돌'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41억5천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을 채집해 왔는데, 어윈은 이때의 달 여행을 종교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 목사의 길을 선택했다.
공군 중령 출신에 항공 공학 석사이기도 했다.
⑧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Kempis ; 1380 ~ 1471.8.8) : 독일에서 태어나 1399년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많은 수양서와 전기를 썼다. 수도자의 영적 수업의 책으로 널리 읽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이기도 하다.
쾰른 부근의 켐펜 출생.
1399년 새로 세워진 아그네스템베르크의 아우구스티노회(會) 수도원에 들어가 1413년 사제(司祭) 서품을 받고 부수도원장을 지냈다.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지내면서 많은 수양서와 전기를 저작하였다.
그리스도교, 특히 수도자의 영적 수업의 책으로서 성서 다음으로 널리 읽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의 저자이다.
⑨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 1694.8.8 - 1747.8.8) : 인간은 도덕의식을 통해 올바른 행위를 이룰 수가 있다는 윤리이론의 대표자이며 철학자이다. .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근대 경제학의 주춧돌을 쌓은 사람이다.
허치슨이 없었다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공리주의 철학과 조세론ㆍ통계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1694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글래스고대학에서 문학과 철학ㆍ신학을 공부한 뒤 더블린으로 돌아와 10여년간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뛰어난 졸업성적에도 모교에 남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 아일랜드인에 대한 차별과 교회의 비위를 건드린 탓이다.
신(神)은 신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은 자연신학자 허치슨은 교회의 반대를 뚫고 1729년 모교의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된다.
익명으로 출간한 ‘미와 덕의 기원(1725년)’ 등의 실제 저자로 밝혀진 직후다.
라틴어를 거부하고 영어로 강의한 첫 교수였던 허치슨의 핵심 관심사는 ‘이타심’. 누진세의 원리를 소개하고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도덕성을 계산할 수 있는 공식 B=(M±I)/A를 만들기도 했다.
공식의 결과는 ‘다수의 행복이 최대의 선’. 인문학 계량화ㆍ통계화와 공리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53번째 생일인 1747년 8월8일 사망한 허치슨이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제자인 애덤 스미스. 교수직까지 물려줬다.
스미스의 초기 저작인 ‘도덕감정론(1759년)’은 허치슨의 ‘도덕철학체계론’과 내용은 물론 목차마저 비슷하다.
허치슨처럼 이타심을 중시하던 스미스가 국부론에서는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요즘도 논란거리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내포한 것이라는 주장에서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까지 그 기원에는 이 사람이 있다.
(2007.서경.ⓒ 한국아이닷컴).
⑩ 데이너(Charles A. Dana ; 1819.8.8 - 1897) : 미국의 저널리스트(신문기자).
데이너는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뉴욕 트리뷴 시카고리퍼블리컨 선 등을 편집하거나 경영했다.
데이너가 뉴욕트리뷴의 편집국장이었던 시절, 이 신문은 세계 최대의 발행부수(30만부)를 뽐냈다.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마르크스는 1851년부터 5년간 이 신문의 유럽통신원으로 일했다.
그는 매주 기사 두 편을 송고하고 기사 한 편당 2파운드를 받았는데, 마르크스 이름으로 게재된 기사의 반 가량은 엥겔스가 쓴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영어가 깔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데이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남긴 명언 한 마디 때문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그의 경구는 보도 가치의 핵심을 간결히 요약하면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데이너가 살던 시기에 기자들은 사건을 찾아다니고 사건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론이나 홍보 담당자들은 흔히 사건을 만든다. 이런 사건을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의사 사건이라고 불렀다.
의사 사건이란 언론의 보도를 예상하고 조직한 사건이다.
흔히 이벤트라고 불리는 행사들이 그렇다.
이벤트는 매스 미디어에 보도되기 위해 꾸며진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선거 캠페인이나 시민 운동은 절대적으로 의사 사건에 의존하고, 언론도 그것을 반영한다.
언론쪽에서 만드는 의사 사건으로는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사건을 조직하는 데서 더 나아가 조작해서 특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사람을 고용해 개를 물게 한 뒤 이를 보도하는 식이다.
이런 사기 보도를 일본에서는 야라세라고 한다(고종석,2001).
⑪ 로렌스(Ernest Orlando Lawrence ; 1901.8.8 - 1958.8.27) : “실험물리학 발전의 역사에 있어서 사이클로트론의 발명에 비교될 만한 것은 많지 않다."
K. M. G. 시그반(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
로렌스는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한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193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사이클로트론은 높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최초의 입자가속기이다.
1927~28년 예일대학교의 교수를 지냈으며 그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로 옮겨 1930년 정교수가 되었다.
로렌스는 1936년 버클리에 복사연구소(Radiation Laboratory)를 세우고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120만eV(전자 볼트)까지 수소이온(양성자)을 가속하는 사이클로트론 건설에 착수했다.
그의 사이클로트론 덕택에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인공원소인 테크네튬을 비롯해 많은 인공원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공원소들은 화학․생물학․의학 분야에 공헌했는데, 특히 암 치료 등 의학 분야에 폭넓게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그의 연구를 기초로 또 다른 입자가속기들이 개발되어 입자물리학이 큰 진전을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해 핵폭탄 개발에 일조했다.
1957년 미국 원자력위원회로부터 페르미상을 받았으며, 컬러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발명해 특허를 따기도 했다.
버클리의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 리버모어에 있는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가 그의 이름을 따서 세워졌으며, 원자번호 103번이 로렌슘으로 명명되었다.
⑫ 기타 오늘의 인물 ⑬⑭⑮
1072 중국 시인 구양수 사망
1091 알트만 사망. 파사우의 주교.그가 교구의 내부 치리를 할 때 의 정책은 철저히 그레고리우스 7세의 편이었다.
1554 빌리칸 사망.독일 신학자.그는 마르부르크로 가서 수사학교수 가 되었고 죽을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
1763 미국최초의 전문건축가 찰스 불핀치 출생
1817 보르디에 출생.프랑스 개혁교회 교도.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역 사협회의 회원으로 정확성으로 이름나 있는 수많은 작품들을 준비하였다.
1842 반마넨 출생.네덜란드 신학자.그는 그로닝겐대학교에서 네덜 란드 개혁교회와 관련있는 신학적 논쟁에 두드러지게 참여했 다.
1876 로스 출생.캐나다 장로교 한국 선교사.한국명 노아력.함북 성 진지방과 그 이북지방을 담당하고 있던 그리어슨 목사와 합 류함.
1877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사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1895 헨더슨 출생.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수난자.한국명 현대선.혹 은 한태선.쿡과 함께 흥경을 근거로 하르빈,러시아 국경에 이르는 북만지역 교회를 돌봄.
1898 프랑스의 풍경화가 부댕 사망
1908 전 미국연방대법원 판사 아더 골드버그 출생
1914 피어스 출생.미국 침례교 목사,선교사,부흥운동가,사회운동 가.1944년 십대선교회 창설에 참여.
1918 황금찬 출생.기독교 시인.1965년에 그의 초기 시를 모은 제1 시집[현장]을 간행함.
1937 배우 더스틴 호프만 출생
1938 가수 코니 스티븐스 출생
1949 배우 케이스 카르라딘 출생
1979 리넨(1911-1979) 사망 :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대사작용 연 구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받음
오늘의 세시
① 입추(立秋) : 24절기의 하나.
8월 8-9일경.
음력으로는 7월.
오늘은 입추!
이제부터 가을로 접어든다.
태양의 본능과 바다의 원색의 계절, 여름이 이제 끝나는 것이다.
『7월이라 맹추되니 입추․처서 절기로다.....
늦더위 잇다한들 절서야 속일소냐. 비 밑도 가볍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가지 위의 저 매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라는고,....』
절기는 농가월령가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름이 있다면 계절을 보는 눈이다.
사람들의 눈에 따라 계절이 풍겨주는 것도 달라지기 마련인가 보다.
『희희한 농부들은 화계백주 손에 들고 소매를 이끌어서 관하에 이르기를 성대태평하여 시화세풍 하니 이것이 뉘 덕인고 우리임금 덕이로다.....』
이렇게 <전원사시가>는 노래하고 있다.
누가 이 노래의 작자인지 모른다.
어느 때의 노래인지도 모른다.
아마 퍽 태평스러웠던 때였는가 보다.
몹시도 마음이 느긋했던 사람이 지은 노래였는가 보다.
가난한 우리네 역사 속에서도 성은을 노래할 만큼 태평스러웠던 한 철도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격앙가를 부르는 한편에서는 또 어려운 사람을 서러워하고 임금을 원망하는 사람도 혹은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을이 외롭다고 누가 그랬을까.
『안개와 감미로운 과실이 무르익는 계절이여 과실을 익히는 태양의 절친한 벗―태양과 마음을 합쳐 이엉끝을 두른 포도가지에 무성한 송이를 달아서 축복을 주려고.....』
이렇게 「키츠」가 노래한 가을을 누가 섧다고 말했을까.
가을은 퍽 길다.
푸른 나무 잎이 단풍이 지고, 또 한 잎 두 잎 떨어질 때까지 서너달이 걸린다.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계절의 향연이 끝나고, 1년을 통해 가장 우울한 때가 끝날 무렵이면 어느 사이엔가 음산한 겨울이 온다.
그 사이에 4개월은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가을을 「수확철(harvest)」과 「낙엽철(fall)」의 둘로 나누고 있다.
명과 암의 둘로 나누어 생각한다고나 할까.
수확의 흥겨운 중에 미리 낙엽의 애수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누구나 어리석은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입추라는 소리에 벌써 마음이 야릇하게 설레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사라져가는 것은 무엇이나 애틋하게 느껴진다.
다시없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막을 길 없는 것이 세월의 흐름이다.
그것을 잡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마음 역시 서글픈 일이다.
가을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을까.
그처럼 쓰라림을 안겨주는 가을을 말이다.
오늘의 샘터
①.8자 이야기 : ⇨1월 8일. ⇨8월 1일.
②.‘데이너’ 말 : “개가 사람을 문다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문다면 뉴스가 된다.
(When a dog bites a man that is not news, but when a man bites a dog that is news.)③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