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 - operation overlord ! - 제 1면>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군에 의해 실시되었던, 훗날 '사상최대의 작전'이라 일컬어졌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력과 작전 및 대응 계획, 개시, 전개 상황 등을 간략하게 정리 분석하였다. [1] 연합군의 작전 계획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되어 일련의 전략 회담을 계속 실시하다 1942년 4월에 런던에서 '라운드 업(Round up)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대륙에 연합군을 상륙시키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초 1943년에 실시하기로 했던 이 '라운드 업 작전'은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인 '횃불(Torch) 작전'의 실행으로 시행이 연기되었다가, 1943년 1월의 카사블랑카(Casablanca) 회담에서 1944년 봄에 상륙 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잠정적인 합의를 하고 작전 계획 초안을 수립하였다. 1943년 5월의 제3차 워싱턴 회담(암호명 Trident)의 결과 작전명이 '라운드 업'에서 '오버로드(Overlord:절대군주)'로 변경되었으며, 작전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영국 런던에 연합군최고참모본부(COSSAC:Chief of Staff to the Supreme Allied Commander)가 설치되었다. 1943년 8월에 열린 제1차 퀴벡 회담에서 작전에 대한 미국과 영국 사이의 합의가 더욱 확고해졌으며, 이때 대략적인 계획이 성립되었다. 동년 12월에 연합군최고참모본부는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원정군최고사령부(SHAEF: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s)로 개편되었다. 지상군을 지휘할 제21집단군 사령관에는 몽고메리(Montgomery) 영국군 대장이, 지상군을 구성할 집단군 예하 미국 제1군과 영국 제3군 사령관에는 미군 브래들리(Bradley) 중장과 영국군 뎀프시(Dempsey) 중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
상륙 작전 예정지는 노르망디(Normandy:좌측 지도에서 1번 지역)로 최종 확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상륙하기에 적절한 해변이 있어 대규모 부대를 수용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가 용이하고 상륙 및 보급을 위한 대형 항구를 손실 없이 확보할 가능성이 높으며, 독일군의 수비 상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해 내륙 진출이 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해 최종적으로 12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39개 사단, 287만의 병력과 항공기 1만2천여 기, 함정 5천3백여 척 등이 준비되었다. 또 하나의 상륙 후보지로 고려되었던 파 드 칼레(Pas de Calais:좌측 지도에서 2번 지역)는 독일측의 시선을 노르망디로부터 분산시키기 위한 지역으로 활용되었다. 즉, 연합군이 파 드 칼레 지역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끊임없이 흘리는 한편,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가상 부대와 모형 전차 등을 해협 건너편에 집중 배치하는 등의 노력을 투입해, 실제 상륙 작전을 전후로 독일군이 방어 부대를 해당 지역으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포티튜드(Fortitude) 작전'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되어 독일군 방어 전력을 크게 분산시켰으며, 상륙 15일차 시점까지 상당수의 독일군 사단을 칼레 지역에 묶어두었다. |
[2] 독일군의 방어 계획 독일군은 1944년 5월경에 58-59개에 이르는 사단을 서부전선에 전개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보병사단이 17개, 기갑사단이 9개, 기갑척탄병사단이 1개, 기타 공수사단, 공군야전사단 등이 5개였다. 전체 사단의 40%에 해당되는 나머지 25개 사단이 일명 정지사단(靜止師團:Bodenständig Div.)으로 분류되는, 고정된 진지 방어를 위한 전투 수행만이 가능한 2선급 약체 부대였다. 이들은 평균 연령이 매우 높았으며, 중화기와 탄약, 유류 등의 장비 및 보급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또 동맹국이나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된 인원과 포로 가운데 의용군으로 자원한 인원이 병력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대 결속력이 매우 약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히틀러가 명령한 3,860Km에 이르는 '대서양 방벽(Atlantik Wall)' 건설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건설 및 노무 작업, 400만 개 이상의 지뢰 매설, 해안 경계 근무 등에 투입해, 실제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점이었다. 다수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연합군의 상륙을 거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의 비교적 희망적인 관측하에 장차전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들에 부가하여 많은 수의 부대들이 새로 편성중이거나 다른 전선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고 서부전선으로 이동되어 재편성중에 있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전투력 발휘에서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 당시 독일군 상황이었다. |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 및 군단> 서부전선에 전개된 독일군의 지휘 체계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서부전선사령부(OB West)를 기점으로 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사령부는 OKW(Oberkommando der Wehrmacht:국방군최고사령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예하에 B집단군(Heeresgruppe B)과 집단군급 군집단인 G군집단(Armeegruppe G) 및 4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서부기갑집단을 두고 있었다. B집단군과 G군집단은 제7군(軍)과 제15군, 제1군과 제19군의 각 2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부전선 전체 사단 숫자의 3/4 가량이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지역을 전구(戰區)로 하고 있던 B집단군 및 서부기갑집단에 편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지구에는 네덜란드 국방군지역사령관(Wehrmachtbefehlshaber Niederlande)인 크리스티안센(Christiansen) 항공대장의 지휘를 받는, 2개 보병사단과 1개 공군야전사단으로 구성된 제88군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
비록 사단 숫자는 60개에 가까웠지만, 방어해야 할 지역이 매우 넓고 또 전술한 바와 같은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으므로 연합군의 상륙을 격퇴하기에 충분한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제공권까지 연합군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상황이었으므로 전황이 극히 어려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해야 할 핵심 역할이 (그나마 정예화되고 다른 부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9개 기갑사단과 1개 기갑척탄병사단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기갑부대들 자체도 완편된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들 부대가 서부전선의 유일한 공세 전력이었으므로 연합군 상륙 격퇴전의 중추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10개 기갑부대의 배치를 두고 최고사령부와 서부전선사령부, 각 지휘관과 참모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다. 바로 기갑부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연합군의 상륙에 맞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이었다. |
서부전선사령관인 폰 룬트슈테트(von Rundstedt) 원수와 서부기갑집단사령관인 폰 쉬버펜부르크(von Schweppenburg) 기갑대장을 비롯한 다수 고급 지휘관들은, 기갑부대를 작전 예비로 편성해 내륙 지역에 배치했다가 연합군의 상륙이 확실해지면 공세로 전환해 기동전으로 연합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작전 예비대의 배후 지원을 받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해안 방어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기갑부대 숫자가 부족하므로 상륙 지점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부대를 투입할 수 없다는 현실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B집단군사령관인 롬멜(Rommel) 원수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비대가 기동하는 과정에서 함포와 항공기 공격에 의해 많은 손실을 입을 것이며, 이동 시간이 지체되어 적시에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기갑부대를 해안을 따라 일렬로 배치해 강력한 해안 요새화를 이룩, 연합군이 상륙하는 즉각 반격에 돌입해 교두보를 마련하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주장은 연합군이 공중우세권을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으나, 크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국방군최고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총통 히틀러(Hitler)에 의해 절충되어 최종 확정되었다. 히틀러는 내심 소수 의견인 롬멜의 주장을 지지했으나, 다른 장군들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으므로 10개 기갑부대를 3개 집단으로 묶어 해안과 내륙 사이의 중간 지점에 배치한다는, 양측 주장 사이의 합의점을 취한 결정을 내렸다. |
독일군이 예상하는 연합군의 상륙 지점은 대체로 칼레 지역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제7군 위수지역인 노르망디 역시 무시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영국과 프랑시 사이의 최단거리 해협인 도버(Dover) 해협을 건너 곧바로 독일 국경으로 쇄도하는 것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런던을 노리는 V-2 로켓의 지상기지가 네덜란드에 위치한 점, 대형 함선을 정박시키고 보급품을 하역할 수 있는 항구가 여럿인 점, 영국 본토에서 이륙한 항공기의 체공 시간에 유리한 점, 그리고 연합군의 치밀한 기만 작전이 더해져, 독일군의 연합군의 상륙 예정지를 솜므(Somme)강 하구에서 칼레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으로 간주하고 훈련과 장비가 가장 양호한 부대들을 집중 배치했다(2면의 지도 참조). |
<노르망디 방어선에 대한 롬멜의 한마디 .....> "전투의 승패는 해안에서 가려질 것이다. 우리가 적을 막을 기회는 단 한 번! 적이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려 할 때뿐이다. 증원군이 적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증원군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이 해안을 방어하는 것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적의 침공이 개시되고 나서부터 첫 24시간 동안에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그 날은 '가장 긴 하루(longerst day)'가 될 것이다." - B집단군사령관 육군원수 롬멜 |
1944년 3월경에 총통 히틀러는 특유의 직관력을 발휘해 세르부르(Cherbourg) 항구가 위치한 노르망디 반도와 브레스트(Brest) 항구가 위치한 브르타뉴(Bretagne) 반도를 유력한 상륙 예정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일선 지휘관들에게 해당 지역에 대한 방비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으나, 정작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B집단군 및 제7군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비록 롬멜도 5월부터는 노르망디에 대한 상륙 위험을 감지하고 나름대로 조치를 취했으나, 몇 개의 여단, 연대, 대대를 증파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군에게 무엇보다도 부족한 것은 공군 전력이었다. 연합군이 준비한 1만2천 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단지 400여 남짓한 항공기만이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슈페를레(Sperrle) 공군원수 휘하의 제3항공전대(Luftflotte 3)에서 가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유 부족으로 필요한 지역에 제때 투입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