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3 금요 성령집회 / 박종광 목사
말씀 : 시편 27:10
제목 : 나의 아저씨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오늘 이 밤 기도의 자리로 저희를 불러 주셔서 주님 앞에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 말씀을 듣는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밤에 올 때, 귀한 예물 구별하여 드린 손길들이 있습니다. 넉넉하여, 또 남아서 드린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렵고 힘들고 많은 궁핍함 중에도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별하여 드린 손길들이 있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이 예물을 기뻐 받아 주시고 이 예물이 쓰이는 곳곳마다 주님의 놀라운 영광과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이 드려진 그 빈 곳이 채워지고 넘쳐나게 하셔서
이들이 인생 살아가는 동안 늘 베풀고 나누어도 부족하지 않은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부족한 종의 입술에 주의 말씀 맡기셨사오니
이 말씀 전할 때 주님의 음성만 들려지게 하시고 사람의 연약함은 감추어 주옵소서.
성령께서 친히 이 시간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날씨가 많이 다시 더워졌습니다. 여름이 오려나 봐요...
목사님들도 조끼 입으셨다가, 이제 겉옷을 다 벗고 계십니다.
날씨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베이비 박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베이비 박스 사역은, 우리 교회에도 강사로 오신 적이 있는
서울에 있는 주사랑 공동체의 이종락 목사님을 통해서 처음 시작된 사역입니다.
바로, 유기된 영아들, 유기된 아기들을 돌보는 그런 사역이지요.
그 베이비 박스가 아기를 아무데나 함부로 두지 말고 손잡이가 달린 그 함을 열어서 그 안에 아기를 안전하게 두고,
그 아이의 생년월일, 또는 이름, 또 부모와 관련된 사항을 적어서 안전하게 두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닫으면, 그 기관 안에 벨이 울려서 아기를 빨리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베이비 박스를 여는 손잡이에 적한 성경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딱, 그 사역에 맞는 말씀 같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러분, 이런 버림받음이라고 하는 참 안타깝고 힘든 일들이 그런 어린 아기들, 영아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꽤 오래 전에 어떤 신문기사를 읽고 제가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스크랩 했던 그런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2018년에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에 기사로 실렸던 그런 내용입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딸이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가장 안타까웠냐면, 이 치매로 인해서 기억력이 떨어지고
자기 이름도 자기 주소지, 거주지도 기억을 못하는 이 아버지가 그 자기를 버린 딸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경찰들이 듣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 할아버지의 진술을 토대로
그 딸을 아버지를 유기한 딸을 체포했다는 그런 기사를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참 마음 아픈 기사이지 않습니까...
버림 받은 아버지가 자기의 이름도 잊었는데, 자기 거주지도 잊었는데,
자기를 버린 그 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참 마음 아픈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딸이 둘이 있는데요, 고속도로 휴게소가 참 위험하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또는 사랑 받아야 할 존재들로부터,
그분들이 내 부모님이든 형제 자매든, 내 자녀이든... 또는 긴 시간 함께 알고 지내던 그 누구든 간에 내가 사랑했던 이들,
또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이들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그 유명한 믿음의 선배요 믿음의 용사인 다윗이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나의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정말 다윗이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적이 있어서 이렇게 고백을 했을까요?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다윗이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살아가던 어린 시절에 사울 왕이 너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잘못된 길로 가니까
하나님은 제사장 사무엘을 보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고자 했어요.
그래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제사장 사무엘을 보냈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왔을 때, 다윗의 형제들 중에 가장 어렸기 때문에
다윗의 부모가 막내인 다윗에게 양을 돌보라고 맡기고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정도의 일만을 가지고 좀 부모님에게 서운했을 수도 있고,
그럴 수는 있지만, 이것 가지고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다윗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제가 다시 한 번 잘 살펴 보니까,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데, 성경 원문에는 어떤 단어가 하나 맨 앞에 들어가 있어요.
"비록 ㅇㅇ할지라도"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가 맨 앞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성경에 "버렸으나"라고 번역된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부모가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 성경 외에 다른 번역 성경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비록 내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 또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또는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또, 어떤 번역은 "설령 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그 앞 부분은 다윗의 부모가 다윗을 정말 버려서 다윗이 그렇게 썼다라기 보다는
뒤에 나오는 하나님과 대비되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랑을 가진 존재요 가장 친밀한 존재인 부모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비해서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다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쓴 표현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 중에 가장 큰 사랑의 존재인
그 부모가 나를 버리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온 세상이 나를 버리는 상황인 거예요. 가장 절박한 상황, 가장 비참한 상황,
가장 인생의 아무런 답도, 나를 도울 사람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암담한 현실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오늘 본문의 그 앞 부분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 "버렸으나"라고 번역된 말이 어떤 상황 속에서 사용된 말인가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이 "버렸으나"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말로 '아자브'라고 하는데,
이 '아자브'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버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버리다'라는 의미에서 조금 더 나가서 "남겨 두고 떠나다", "버려두고 떠나다"라는 그런 의미을 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9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요셉 본문인데요,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요셉이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유혹을 합니다.
그럴 때, 요셉이 한 행동을 묘사할 때 이것과 똑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여기서 "버려두고" 할 때 쓴 이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그냥 뭐 쓰레기 버리듯이 그냥 버리다라는 단순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두고 떠나는 그런 것을 포함하는 그런 내용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이미지, 어떤 그림을 그려 주는가,
마치 부모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린 아기를 두고 그냥 떠나버리는 부모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그 부모의 떠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냥 아쉬움이 아닙니다.
부모의 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린 아기에게 부모의 떠남이 의미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믿었던 존재로부터 배신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의 떠남은 어린 아기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간접적이지만,
사랑 받아야 할 대상으로부터, 가장 보호 받아야 될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공격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인생을 잘 살펴 보면, 다윗의 인생길 가운데 반복해서 겪었던 일들이
바로 다윗이 믿고 의지하던 사람 그리고 다윗이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베풀었던 어떤 사람,
그리고 마땅히 다윗을 보호해 주고 다윗에게 정말 잘해 주어야 하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다윗이 배신과 공격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많이 있지만, 몇 가지만 살펴 보면, 먼저 다윗이 충성을 다해 섬겼던 사울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이 사회적으로 말하면 직장 상사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장인이기도 해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울 왕은 다윗을 보호하고 이 다윗에게 정말 큰 사랑을 베풀어야 될 어쩌면 큰 책임감과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게, 이런 사울 왕으로부터 다윗이 받은 것은 공격입니다. 배신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도망 중에 생명을 걸고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해 준 그일라 주민들이 있어요.
이 그일라 주민들과 관련된 본문의 내용을 읽어 보면, 참 너무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는 그 위태로운 때인데도,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일라 주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옵니다.
부하들은 말립니다. 지금 우리가 도망 다니고 숨어 있기도 위험한데 어떻게 나가서 전쟁을 치르느냐는 거예요.
그 소문이 퍼지면 또 사울왕이 쫓아올텐데 어떻게 그러냐는 거예요. 그런 위험한 속에서도 다윗이 그들을 도우러 가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다윗을 데리고 있으면 자신들의 생명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사울 왕에게 다윗을 잡아 넘길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배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또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아들 압살롬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아들 압살롬은 참 여러가지 면에서 다윗을 많이 닮은 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참 사랑했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다윗에게 갚은 것은, 압살롬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다윗이 그 아들을 아꼈는데도 반란을 일으키고,
그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그런 정말로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릅니다.
여러분,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 그일라 사람들, 그리고 압살롬이란 아들은
부모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부모처럼 다윗을 대해 주어야 하는 그런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을 가장 사랑해 주어야 되는 그런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부모처럼 다윗을 대해 주고 아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그런 존재들인데
다윗이 그들에게 받은 것은 사랑이나 은혜가 아니라 바로 '버림 받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버림 받음이 아니라 다윗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그런 배신과 공격을 동반한 버림 받음을 다윗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다윗의 인생과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버림 받음의 사건들, 또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받은 배신과 공격, 이런 일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언젠가 우리 나라를 많이 떠들썩하게 했던 사회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코피노'라고 하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코피노'란 말은, 한국 사람을 가리키는 '코리안'이라는 말과 필리핀 사람을 가리키는 '필리피노'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한국인 남성들과 필리핀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코피노'입니다.
KBS방송에서 하는 어떤 다큐 프로그램에서 이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해서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의 내용의 제목이 '가난 속에서 나를 버린 한국인 아빠가 그립다'
(필리핀 '세부'의 열 살 코피노 소녀의 아빠 찾아 삼만리) 이런 긴 제목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어학이나 어학연수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마 필리핀에 갔던 모양입니다.
그때, 거기에 머물던 이들이 필리핀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 다녀온다고 하고서는 연락을 끊는 거지요.
그래서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어머니와 그 한 부모 가정 속에서
너무 열악하고 힘든 그런 상황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 코피노 아이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아빠라는 그 존재들이 못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못 오는 것이 아니고, 안 가는 것입니다. 연락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너무 어릴 적에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사실 아빠에 대한 나쁜 기억이 없고 그립기만 한 거예요. 그냥, 어떤 사연이 있어서 못 오겠지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버린 그런 아빠임에도, 그 아빠가 그립다고...
그 방송국의 도움을 받아서 실제로 한국을 찾아온 그런 아이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만날 수가 없지요. 연락이 안 됩니다.
여러분, 저도 비슷한 또래의 딸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일들 뿐 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곳곳에, 또 전 세계 곳곳에 이런 마음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버려서 누군가가 버림 받는 일들만 우리 인생 속에 많은 것이 아니라
그 부모의 연약함을 표현한 의미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부모님의 이런 저런 연약함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어쩔 수 없이 버림 받는 그런 일들도 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약간 그림이 같이 섞인 그런 책이 있는데요. 『파페포포 메모리즈 』라는 그런 시리즈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심승현'이라는 작가가 "비가 내리면"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자신의 그 어린 시절에 겪었던 그런 버림 받음의 아픔, 상처를 이렇게 고백한 글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이 작가의 그 어머니가 몸이 굉장히 많이 아팠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몸져 누워 계시고, 자기는 기어다닐 때니까 한 살 두살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방 안에 뜨거운 물을 갖다 놨는데
이 어렸던 아기 심승현 작가가 기어 가서 그 뜨거운 물에 손을 넣은 것입니다. 손이 화상을 입고 다쳤겠지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방 안에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너무 아파서 그걸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어린 시절에 이런 저런 이유로
이런 사고는 아니라 할지라도, 부모님이 어떤 이유로 가난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느끼기에 부모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어도,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어도... 그런 버림 받은 경험한 적이 아마 있으실 겁니다.
또, 이 작가가 두번째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인데, 지금은 일기예보가 워낙 발달이 돼서 어지간하면
'오늘은 비 온단다. 우산 챙겨 가라' 이것이 너무나 잘 돼 있는데,
꽤 오래 전,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기예보가 잘 안 맞기도 했습니다.
일기예보 하시는 분이 굉장히 많이 비판을 받고 거짓말쟁이라고,
심지어는 기상청 체육대회 때 비가 왔다라는 그런 얘기까지 돌 정도로 그 일기예보를 맞추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괜찮았는데, 하굣길에 이제 비가 내린 거예요. 그 때만 해도, 또 일 안 하고 집에 계신 어머니들도 많았고,
그래서 아이들 우산을 들고 마중 나가고... 여러분도 아마 어머니나 가족 중에 그렇게 마중 나왔던 기억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 작가도 학교에 갔는데, 비가 막 오는 거예요.. 그래서 비가 내리는데, 하굣길에 가족이나 엄마들이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다 가는데... 자기랑 어떤 친구 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옆의 친구도 엄마가 우산을 들고 온 거예요.
그 친구가 막 엄마에게 짜증을 냅니다. '아이 엄마 왜 이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아이가 가고 나서 이 작가는 혼자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엄마가 또 안 계셨나 봐요..
그래서 신발주머니를 뒤집어 쓰고, 그 비 오는 길을 홀로 걸어갔던 그런 기억을 그 글에 담아 놨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버림 받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조건 누가 고의적으로 나쁜 마음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 연약한 존재여서
나를 사랑해 주고 싶지만, 그럴 여건과 능력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버리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그런 일들도 우리 삶 가운데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여러분 제일 또 힘든 게 그냥 저 사람이 그런 것인데,
그냥 부모님이 그런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내 가족 누군가가 그런 것인데
그런 일을 겪으면 늘 하나님도 나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들었던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날 버린 게 아닌데, 부모님이 그런 것일 뿐이고, 나를 사랑해 줘야 될 직장 상사가 그런 것일 뿐인데...
마치 하나님도 나를 버린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친구 전도사님의 집들이에 초대 받아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 전도사님이 결혼을 해서 신혼집 집들이를 한다 그래서 갔는데, 뭐, 전도사이고 학생 신분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학교 근처에 작은 빌라를 마련해서 사는데, 그래도 그 집조차도 그 친구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게 아닌 거예요.
집의 도움도 받고, 또 새 차는 아닌 것 같지만 중고차도 가지고 있고, 그렇더라고요...
집들이를 마치고 제가 집에 걸어가는데, 마음 속에 굉장히 서러움이 막 북받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당장 결혼한다고 해도 집을 마련해 줄 재력이 없고, 그리고 아버지가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신 탓에
중고차가 아니라 리어카라도 사 주실 아버지가 없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저한테 시집 오겠다는 자매도 없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기분...
그러니까, 대학 들어갈 때도 아무런 도움 받을 게 없었고, 군대에 가서도 면회 오는 아버지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괜히 하나님도 나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하나님도 나를 버린 것 같고, 아버지도 나를 버린 것 같고... 세상 인구의 절반이라고 하는 여성들도 다 나를 버린 것 같고...
다 나를 버린 것 같은 그 서러움을 느끼면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람에게 버림 받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을 겪어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어려움과 서러움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다 읽지 않았지만, 이 시편 27절 1절의 말씀을 보면, 확신에 찬 다윗의 고백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아멘!
이렇게 다윗이 고백하면서 시편 27편을 시작합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린 것 같은'이라는 그런 말을 쓰면서 인생의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버림 받음의 경험을 했던 그 다윗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이 시를 시작할 수가 있었느냐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이 시같은 경우를 보통 '비탄시'라는 이름을 학자들이 붙이는데,
이런 비탄시의 특징은 맨 먼저 자기의 힘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 다 아룁니다.
저 이것이 힘들고, 이래서 서럽고... 그리고 나서 이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고, 저를 구원해 주시고...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기도하고 이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고백으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겠는가!"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왜 먼저 가슴 치면서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후반부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런 엄청난 버림 받음의 현실 속에서도 나를 가장 사랑해 줘야 할 존재가 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내가 어디에 굴러 떨어지고 어디에서 넘어져도
나를 영접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그분이 계시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의 후반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영접하신다"라는 말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버리다'라는 말은 '아자브'입니다.
그런데 '영접한다'라는 말의 히브리 말은 '아싸프'라고 합니다. 어감이 좀 비슷한데, '아자브', '아싸프' 비슷한데요..
이 '아싸프'라는 말은 '모으다', '거두어 들이다'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할 때 쓰는 말이 바로 '아싸프'라고 합니다.
'거두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를 모으실 것이다"
이 '모은다'라는 말을 사람에게 쓰니까 어색하잖아요.
그래서 이 말이 사람에게 쓰일 때는 '영접하다', '받아들이다' 마치 곡식이 여기 저기 막 떨어져 있는데
이걸 추수하는 사람이 그 길바닥에 추수하다가 떨어진 것들을 자기 바구니에 담는 것 같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다', '받아들이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적용해 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마치 부모에게 버려져서 헐벗음과 굶주림 가운데 버려졌던 어떤 고아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따뜻한 처소로 인도돼서 평안하게 쉬는 그런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또 다른 여러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 또 어떤 곳에서는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여호와께서는 나를 끝끝내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영접한다', '받아들인다'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럴 것 같습니다.
배구에서 상대편이 공을 칩니다. 서브를 넣는다 그래요. 그러면, 이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게 손으로 받아 냅니다.
그것을 보통 '리시브'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쓰인 말이 영어성경에는 이 단어가 쓰였더라고요. '리시브(receive)'라고 하는
저는 이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더윗이 처한 고백의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 누군가가 나를 여기 저기 막 내동댕이 치듯이 버리는 거예요.
흙바닥에, 구덩이에, 광야에, 나를 막 여기 저기 내동댕이 치듯이 버리고 떠났는데,
하나님은 마치 배구 선수가 '리시브(receive)' 받는 배구 선수처럼
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다이빙을 하셔서 나를 받으시는,
이렇게 받고 저렇게 받고 어떻게든지 내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그 '영접하신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이 모습이 좀 머릿속에 그려지시나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분명히 다윗을 영접해 주실 때는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법, 여러가지 사람들을 통해서 다윗을 영접해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바로 그 사울 왕의 아들과 딸인 요나단과 미갈입니다.
사울 왕은 장인이자 왕, 직장 상사인 사울은 다윗을 광야로 불 속으로 내동댕이 쳐지듯이 버렸어요.
그런데 이를 요나단과 미갈이, 어찌 보면 가장 큰 원수가 되어야 될 그 사람들이 다윗을 영접해 주더라는 겁니다.
자기 옷을 주고, 군복을 주고, 도망 갈 길을 열어 주고,
자기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다윗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더라는 겁니다.
또,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영접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가까이서 모시는 장군인 다윗이 왕의 눈 밖에 나서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 왕이 죽이려고 하면,
상식적으로 다윗을 쫓아다니기 어렵습니다. 같이 있으면 자기도 위험한데...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다윗의 부하들이 얼마나 충성스럽게 다윗을 따라다니면서 다윗을 보필하고 섬기는지
아마도 그 다윗은 자신을 생명 걸고 따라다니는 그 부하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곁에 늘 계시고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 같습니다.
또, 누구를 통해 하나님이 다윗을 영접해 주셨나?
제사장 사무엘, 그리고 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해서입니다.
사무엘은 부모조차 부르지 않는 그 다윗을 다윗의 부모인 이새에게 묻습니다. 아들들이 다 여기에 있는게 맞느냐고...
그래서 막내가 안 왔다고 하니까, 그 막내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무엘은 잘 몰랐어요. 그냥 겉모습을 보고 다윗의 그 형들 중에
'아, 정말 왕이 될만한 사람이 여기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무엘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겁니다.
'아니다' '그 사람의 용모를 보지 마라! 아니다..' 계속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무엘은 왕을 뽑으러 왔는데 계속 아니라고 하시니까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사무엘이 다윗을 데려오라고 한 그 말은 사무엘이 한 말이지만, 바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아히멜렉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 21장과 22장에 보면, 그 도망 중이던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을 찾아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니, 장군이라는 사람이 부하도 없이 무기도 없이 자기를 찾아오니까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거예요.
성경에 보면, 이 아히멜렉 제사장이 떨면서 다윗을 맞이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보관 중이던 골리앗의 칼을 내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그렇게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 들키고 사울 왕에게 전달이 돼서 그 앞에 불려가거든요.
그런데 그 불려간 자리에서 아히멜렉 제사장과 일가족이 거짓말을 하면 살 수 있었어요.
다윗이 나를 위협할까봐 내가 어쩔 수 없이 먹을 것을 내 준 거지,
내가 스스로 준게 아니라고, 그래서 다윗은 죽어야 될 자가 맞다고 이렇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히멜렉 제사장은 거기서 '다윗같이 충성스러운 부하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대답을 하고 다윗을 변호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제사장의 가문 팔십오명이 그날에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제사장 가문 85명이 다윗을 위해 죽음을 당하고, 여러분 어디서 이런 희생을 보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서
저기 목사님 85명이 하늘나라 가시면 얼마나 큰 사랑 받았다고 느끼시겠어요..
다윗이 그런 사랑을 받은 거예요.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저 귀한 제사장이, 저 제사장 가문의 85명이 죽임을 당하다니...
그 일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생명을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인생 중에 이렇게 많은 배신과 공격을 당했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영접해 주시는, 이 세상 사람 다 나를 버려도 나를 받아 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을,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많은 사람들을 통해 체험했기 때문에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나의 아저씨라고 정했습니다.
사실 제목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하나님 아저씨라고 할까? 하나님 아저씨라고 불러도 될까? 이런 고민을 했는데,
제가 오늘 본문에서 발견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냐면,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느끼잖아요...
좋은 스승으로도 느끼고, 친구로도 느낄 수 있고, 여러가지가 있는데,
저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가 잘 아는 동화의 제목처럼 '키다리 아저씨'같은 하나님...
키다리 아저씨라는 그 소설에 보면,
고아로 살아가던 한 소녀의 후견인이 돼서 그 소녀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해 주는 한 후견인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소녀는 그것을 받을 특별한 자격이 있지 않아요. 그냥 고아로 태어나 고아로 살아가는 거예요. 특별한 조건이 없어요.
그런데 일방적인 사랑으로 그 소녀를 받아 주고 후원해 준 그 키다리 아저씨!
여러분 부모라고 하는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다 기쁘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던 누군가에게는 아버지라는 호칭, 어머니라는 호칭이 오히려 낯섭니다.
자기 인생에 그렇게 후견인이 되어준 그 이름도 모르는 그분,
그저 그분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그 소녀에게
그 아저씨라는 이름, 그 호칭이 얼마나 정겨운 호칭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심지어 부모로부터 나를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버리고 여러분을 낙심케 할 때,
여러분의 인생에 오셔서 여러분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셔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여러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받아 주시고 막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이 그것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 이 밤 금요성령집회에 오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체험 없이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없으실 거예요.
이렇게 우리 인생에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또한 이 세상에 보내셔서 누군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만남으로 인해서
[내가 저 분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성도님은 정말로 나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라고
그런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주안교회를 위대한 교회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우리 교회가 정말로 누가 들어도 끝내 주는 교회라는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 어느 누군가 한 명을 위한 키다리 아저씨가,
그들을 돕고 그들을 받아주는 그 누군가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서러웠던 얘기를 했는데,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집을 구해야 되는데, 어떻게 할까 그러고 있을 때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어요.
'전도사님, 집을 구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교회 근처에 27평짜리 자기 집이 있는데
거기 들어와 살라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이든 상관 없으니까 있는 것만 주고 그냥 들어와서 살라는 거예요.
제가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남는 돈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오백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백만원을 드리고 그 집에 도저히 살 수가 없겠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그래서 제가 다른 교회로 갈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하면서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일을 하나님의 영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비록 그 집에 들어가 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접해 주고 계시는구나!
마치 하나님이 제 마음 속에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 내 결혼 선물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참 감사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물론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흥에서 신혼집을 5층 빌라 꼭대기 층에 구해서 한 번은 교회에서 일하다가 새벽 두시에 끝난 적이 있었어요.
제가 차가 없을 때인데, 교통 편이 끊겨서 택시를 타고 집에를 가는데,
아, 그 때 그 집을 받았어야 되는데... 아, 내가 그때 그걸 받았어야 되는데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걸 거절했을까...
후회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ㅋㅋ
그런데, 그거 27평 없어도 괜찮더라고요.. 그냥,
하나님이 27편을 주셨으니까... 27편으로 충분하더라고요..
여러분, 살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사람에게 버림 받았는데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여러분 그런 원망 하고 싶을 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버리셔서 우리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분을 땅에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여러분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내셔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또 누군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라고, 그들을 돕고 살리는 이가 되라고...
그들에게 가서 나(하나님)의 존재를 네가 삶으로 보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이 나를 통해 "나는 당신을 통해 나의 키다리 아저씨를 만났다"고,
"나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고백을 이 시간 우리 주님 앞에 같이 드리겠습니다.
♬ 찬양 :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