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교수는 친구의 친구이다. 어느 대학 국문학과 명예교수라는 것 말고는 잘 모른다. 몇 번 만나서 평창, 정선 쪽 강줄기를 따라서 같이 걸었을 뿐이다. 글이 화려하다. 글에 정성이 보인다.내 글은 이런 글에 한참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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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시월, 정선에 가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한 해, 우리들 우정의 행보를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도모해 왔던 프로그램 ‘동강 따라 걷기’는 하반기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 쉼표의 시간이 좀 어정쩡하다고 여겼을까. 可洋이 시동을 걸고, 정선에 있는 부명숙 부장이 현지 준비로 수고를 감당하여, 이른바 특별기획으로, 정선의 ‘항골계곡’을 도모했다. 오랫동안 우리의 '강 따라 걷기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無心은 이번에는 모든 수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가했다. 이번 정선행을 준비한 可洋의 마음에는 無心을 배려하는 마음이 곱게 숨어 있었다.
계획을 전해 받고 우리는 설렌다. 가을 풍악(楓嶽)의 가파른 봉우리들을 끼고 가는 계곡이라 색의 향연이 빛날 것이다. 좁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도 맑고 차가운 가을 기색으로 빛을 띠어, 우리의 마음 안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또 추억 한 장을 이루어 내겠지. 지난 6월 말 이후, 오래 함께 모이지 못했던 우리는 서로 보고 싶고, 한 방향으로 시선 두고 걷고 싶은, 이심전심의 심정에 있었으므로 전원 참가의 열의를 다졌다. 이후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두 분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 참가자는 모두 12명이었다.(존칭 생략/ 최돈형, 이상훈, 이규석 부부, 김종화 부부, 부명숙, 박인기, 오종실, 우명길, 원영환, 이규성)
오늘 최초 집결지는 정선 읍내 농협 옆에 있는 음식점 ‘산마실’이다. 2022년 10월 24일 11시 30분까지 모이기로 되어 있다. 이미 정선 산골로 마실 가는 길을 나선 셈인데, 모이는 첫 식당이 ‘산마실’이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들어오는 형국이다. 아직 산에 들지는 않았지만, 식당 이름이 그러하고, 마음 형편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KTX 편으로 서울역과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은 진부역에 내리면, 대기하고 있던 부명숙 부장의 승용차로 정선을 들어온다. 이따가 갈 때도 그 역순으로 그러해야 할 터이니, 이분의 수고가 오늘 행사 처처에 안 보이게 깔려 있다. 양평에서 승용차로 출발하는 사람들, 평창에서 승용차로 오는 사람들은 바로 ‘산마실’을 찾아올 것이다. 나는 동서울 터미널에서 07시에 출발하는 정선행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기동해 오는 길과 기동 수단이 각양각색이다. 다채로움 안에 정서가 통하고 행보가 일치한다. 고도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 우리의 질서와 통일이 있다.
나는 정선 터미널에 10시 30분쯤 도착한다. 무심이 카톡으로 알려준다. 정선 터미널에서 ‘산마실’까지는 1.7㎞, 걸어서 20분 남짓이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조크, “보병 소대장은 땅개이지, 그 정신을 발휘하여 걸어 보시오.” 1972년 3월 그와 나는 소위로 임관하여 곧바로 <육군 전투 교육 사령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나는 보병 병과이고 무심은 포병 병과였다. 포병들이 자랑스럽게 보병을 향해서 했던 말이 환기된다. ‘보병은 3보 이상 구보(驅步)! 포병은 3보 이상 승차(乘車)!’, 아, 아무려면 어떤가. 그 시절 그 젊음이 마냥 그립고 부럽고, 그리고 그로부터 흘러간 세월이 속절없다.
터미널 나와서 왼편으로 돌아 국도를 따라 걷는다. 한 노파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따라오면서 길을 가르쳐 준다. 한참 걷다가 다시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꺾어, 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규모나 구조가 체코 프라하시의 블타바강에 놓인 까렐 다리를 걷는 기분이다. 주변의 고풍스러운 건축 장식들 푸짐한 까렐 다리와는 달리, 허허로운 강 위에 홀로 반공(半空)에 걸린 긴 다리이다. 그냥 무연하다. 아니 그것이 더 좋기도 하다.
강은 산 그림자로 고적하고 물 사이로 간간 모래 벌이 인공을 밀어내고 있다. 나는 유럽의 명소들을 걸을 때, 더러는 모종의 ‘미적 과잉(美的 過剩)’에 지치기도 한다. 그걸 다 알아두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돈 주고 멀리 온 관광인데 하나라도 잘 보고 잘 알고 가야지! 하는)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다리 건너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안내된 ‘정선 5일장 주차장’ 쪽으로 가서, 거기서 방천 둑을 내려가 읍내 마을로 들어갔다. 한번 더 길을 물어서 ‘산마실’ 식당을 들어갔다. 바로 옆에 ‘정선 농협’ 건물이 있었다. 좀 빨리 걸은 탓일까. 15분 정도 걸렸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10시 45분이다.
나는 아침 식사를 살짝 생략하고 구의동 동서울 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를 타고 왔다. 좀 빠른 보속(步速))으로 걸어온 탓일까. 목이 말랐다. 일찍부터 혼술과 혼식에 각별한 독락(獨樂)의 쾌(快)를 누릴 줄 알았던 나는 기꺼이 막걸리 반 주전자에 묵 한 접시 안주를 시켜서 스스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전체 집결 시간이 11시 30분이었으므로 참으로 넉넉하고 오붓한 시간으로 요량이 되었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까. 김종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평에서 승용차를 몰고 와서 정선 5일장 주차장에 세워두었는데, 이곳 ‘산마실’ 식당을 어떻게 찾아가느냐는 전화였다. 그러고 얼마 뒤, 김종화 부부가 식당에 도착했다. 막걸리와 묵 접시를 두고 우리는 일단 한잔을 건배하여 나누었다. 대화라는 것이 매양 같지 아니하여, 둘에는 둘에 맞는 대화거리가 있고, 셋에는 셋에 맞는 대화거리가 있고, 여럿에는 여럿에게 맞는 대화거리가 있는 법이다. 나는 김종화와 ‘둘에는 둘에 맞는 대화’를 했다. 교육개발원에서 살짝 스쳐 간 동기생 인연이었는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니 제법 소복했다. 이야기가 소복하게 모일 수 있도록 김종화의 부인이 대화를 정성으로 적절하게 보태고 이끌어 주었다. 이야기 내조의 뛰어난 지혜를 지닌 듯했다.
우리는 무슨 사건이나 일들을 이야기했다기보다는 감정과 기분 뭐 그런 걸 이야기했다. 그 무렵 그와 내가 개발원에 와서, 개발원 분위기에 엉거주춤 적응하던 그때, 우리 둘의 마음 풍경이 서로 비슷했었다는 데에 무언가가 통했던 것이리라. 열심히 출근해서, 일하기는 하는데, 어딘가 나만 좀 소외된 듯하고, 왠지 내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사람들과 알고 지내도 언제나 낯설고 등등, 그랬던 풍경들에 그와 내가 함께 있었던 건 아닌가. 그래서 그 잠시 30분 정도의 막걸리 대화에서 유별 친숙감이 도드라지게 올라왔다.
11시 반 좀 지나서 친구들이 식당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몰려들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 끈을 풀고, 인사와 악수를 하고, 그 틈새로 누구는 참았던 화장실을 다녀온다. 그 어수선한 장면에서 서로 환하게 웃는 표정들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웃음은 얼굴 주름을 짓게 하고, 치아를 드러내게 하고, 입술을 움찔거리게 하고, 눈을 작게 하고, 입을 귀 쪽으로 잡아당기게 한다.
웃으면 얼굴이 부서진다. 그걸 ‘파안(破顔)’이라고 한다. 거기에 더하여 웃음이 크면 파안대소(破顔大笑)이다. 굳이 대소(大笑)까지는 아니어도 적절한 파안(破顔)이기만 해도 정겹다. 나는 친구들의 그런 파안(破顔)의 얼굴이 좋다. 그걸 지금 서로들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1930년대 시인 박용철은 그의 대표 시 ‘떠나가는 배’에서 이런 표현을 쓴다.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나는 지금, 웃고 있는 친구들의 웃음 주름살이 좋다. 이렇게 오늘처럼, 정선의 자연을 향해서 함께 가기로 약조하고, 밥집 현관 신발장 앞에서 만나, 파안으로 인사하고 손 붙잡고, 눈길 마주치며, 무어라고 기막힌 한 마디씩을 끄집어내는 친구들의 얼굴이 좋다. 웃으려고 짓는 그 주름살들이 좋다. 시인 박용철을 따라서 나도 중얼거려 본다.
“오늘 항골계곡 가는 단풍길 동행을
우리는 어쩌다 이런 인연으로 묶여서
읍내 ‘산마실’ 식당에서 파안(破顔)으로 인사하는 친구들
아, 주름살도 눈에 익은
내 사랑하던 사람들”
지난 6월 말에 헤어지고 근 넉 달만이다. 각지에서 서로 다른 교통으로 이동한 12명(차량은 4대) 모두가 늦지 않고 약속된 장소에 모였다. 어떻게 왔든 대개 3시간 정도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 정선행을 주도한 可洋은, 우리 회원들의 높은 자율성과 민주적 공동체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앉을 자리를 정돈하고 점심을 먹었다. 이 집의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는 ‘곤드레 영양밥’을 주문하고, 거기에 더하여 두부 음식이며 전을 시키고 막걸리를 한 사발씩 나눈다. 곤드레 영양밥을 주문하면 매우 풍성하게 반찬이 따라 나오는데, 온갖 산나물 반찬이 특이하다. 음식이 너무 맛이 있어서 맛대로 먹었다가는 배가 불러 걷는 데에 지장을 줄까 해서 나는 조금 절제하였다.
우리는 평창과 영월에서 강 따라 걷기 동행을 할 때마다, 그 시발(始發)을 밥 먹는 것으로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지혜가 녹아든 것으로,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잘 따라서 준행하는 것이다. 배가 고픈 연후에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란 사실상 없다. 연인을 몸으로 사랑하는 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고급의 윤리적 실천도 배가 고프고서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이처럼 단순 명료한 지혜를 굳이 거스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이 인내라고 칭송되어도, 그것이 의지라고 찬양되어도, 그것이 극기 훈련이라고 부추겨도 나는 그걸 따라가고 싶지는 않다. 가난이 풍성하던 어린 시절에 참았던 배고픔의 기억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산마실’에서의 음식으로 호궤(犒饋)한 우리는 마치 삼국지의 제갈량 군대처럼 의욕과 사기도 높게 정선의 산하, 항골계곡을 향하였다.
모두 12명의 대원이다. 12라는 이 숫자는 왠지 기분이 좋다. 우주의 질서, 계절의 순환, 시간과 공간의 운행이 모두 이 숫자와 숨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런 큰 섭리에 호응되도록 우리 일행이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는 하늘의 기운이 우리를 엄호하는 듯하다. 세상사, 마음 가는 대로 그 의미도 따라오려니 믿고, 매사 긍정과 밝음으로 마음을 정돈한다.
모두 3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항골계곡으로 간다. 매사 정겹고 치밀하게 준비한 夫 부장님이 선도하는 차량, 양평에서 동부인하여 온 김종화 친구의 차량, 평창에서 차를 몰고 온 무심(無心)의 차량으로 기동한다. 10분 정도를 달렸다. 고도가 높은 정선의 산하와 들판은 적막한 만추의 표정 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12시 40분부터 ‘항골계곡’을 걸어서 올라갔다. 계곡은 걷는 이들을 위해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항골계곡 중 ‘숨바우길’을 중심으로 걸었다. 계곡은 우리가 사는 현상계의 가장 찬연하고도 깊은 색계(色界)를 연출해 주었다. 어찌 찬탄이 없으랴. 그러나 그 찬탄은 외마디 음절로 허공 중에 흘러갈 뿐 자연을 향한 이 짙은 감응을 다 담아내지 못하였다. 우리들의 감탄사는 금방 진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플라톤이 말한 대로, “인간의 언어적 표상은 사물 현상의 본질에서 한 발자국 더 멀고, 그 현상 본질이 안으로 이상화(理想化)되는 ‘이데아(Idea)’로부터는 두 발자국이나 멀다.”라는 지적을 나는 조용히 음미한다. 그가 그의 이상향으로 삼았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한, 그 진정성을 나는 항골계곡 단풍의 음영 아래서 음미한다.
항골계곡! 그 단풍 시공(時空)이 우리 일행에게 주는 미적 즐거움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었다. 그저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색조에 우리가 아득히 물들어 가는 데에만 있지 않다. 이 단풍 가득한 계곡의 시공에서 느끼는 미적 쾌감은 실로 소리와 빛의 아득한 어울림에서 우리가 고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소리로 말하면, 사방이 조용한 듯해도 그 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소리의 교향악(交響樂, symphony) 같은, 다성(多聲)의 울림이 성스러웠다.
여울을 지으면서 흘러가는 계곡의 물은 우는 듯, 읊조리는 듯 나직한 소리로 흘렀다. 단풍은 저 홀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이 여울 소리의 음덕에 기대어 그 아름다움을 더 웅숭깊게 한다. 우리가 걷는 길은 계곡물과 대체로 나란하다. 더러는 길이 높아져 수면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걷는 길의 폭은, 한 사람 걷기로는 좀 넉넉하고 두 사람 걷기로는 다소 좁았다. 얼마나 호젓한 길인가. 그런데 그 길 위로 낙엽이 흩날리고 쌓인다. 우리 발자국 이어가는 길 위로는 낙엽 밟는 소리가 생겨난다. 가을을 조용히 가라앉히듯, 가을을 우리 맘에 심듯, 그렇게 낙엽을 밟는다. 단풍은 색조로만 우리를 포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풍은 길 위로 떨어져, 우리가 신발을 끄는 대로 낙엽의 소리로 현신하였다.
항골계곡에서 소리가 우리의 미적 쾌(快)에 조화로 참여한 장면은 더 있었다. 이 교향(交響)의 극한경(極限境)을 나는 적어 놓지 않을 수 없다. 교향(交響)이란 무엇인가. 소리와 소리 간의 상호교섭으로 일어나는 음률의 조화로움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교(交)는 종합한다는 뜻의 ‘Sym’을 번역하고 향(響)은 소리를 뜻하는 ‘Phone’을 번역하여, 오늘날 우리는 ‘Symphony를 ‘교향곡(交響曲)’으로 부른다. 항골계곡의 모든 소리가 자연의 교향곡처럼 들려온다. 우리의 ‘미적 쾌(快)’가 차오른다.
오후 들어 비 소식이 있었다. 쏟아지는 비는 아니었지만, 때로는 빗줄기가 빽빽[密]하게, 때로는 성기게 내렸다. 일찌감치 비 예보가 있었던 탓인지, 단풍 명승으로 이름이 난 항골계곡은 사람 자취가 드물었다. 사람 자취 미치지 않는 명승지면 신선이 사는 곳이라 했거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는 선계(仙界)에 들어서 걷는 것이다.
단풍 숲에 가늘게 떨어지는 비, 그 비 듣는 소리는 황홀경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비를 몰아오는 바람이 간간 계곡을 훑어서 빠져나갔다. 희미한 중에도 그 바람 소리가 서늘하여, 한껏 깊은 가을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여름의 그늘 같은 향훈을 느끼게 했다. 비며 바람이며, 이 모두는 소리로서 다가올 때, 교향(交響)의 조화에 가담한다. 이처럼 항골계곡 단풍 숲의 총체적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데에는 온갖 소리의 조화가 있었다. 그 오묘함은 은근했다. 비는 간간 안개비처럼 되어 우리를 휘감기도 했다. 멀리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우리는 항골계곡 중간 어디쯤서 몽환의 길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법했다.
소리 공덕을 다 헤아렸으니, 이번에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빛의 공덕으로 논해 보자. 무엇보다 단풍의 빛이다. 그걸 찾아서 여기에 오지 않았던가. 봉우리와 골짜기 전체를 파스텔 색조로 번져 나가게 하는 열두 가지 단풍잎의 형색이 아름다움의 중원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 단풍 색조를 우리 눈에 비치게 하여, 즉 우리의 시지각(視知覺)에 단풍이 와 닿도록 하는 만추의 양광(陽光)을 빼놓을 수가 없다. 빛이 있음에 볼 수 있으니 태양신(太陽神)에 대한 감사를 건너뛸 수 없다. 우러러서 보면 봉우리 오연(傲然)하여 오색 단풍의 추앙을 받을 만하고, 내려다보면 골짜기 굽이굽이 길게 흘러서, 그 물빛에 드리우는 단풍 숲의 형형색색이 아름답다. 미인도 본연의 자태보다 물에 비친 모습이 더 고혹적이라더니!
물 위에 떨어진 단풍이 물 따라 계곡을 흘러서 내려간다. 어떤 잎새는 계곡 바위 틈새에 갇혀 맴돌기도 하고, 어떤 잎새는 빠른 급류 따라서 소용돌이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한 가지에 태어났거늘 가는 곳 제각기 다름이 무상하다고나 할까, 인생도 그러하고 동기간 형제도 자라며 나누어 흩어지나니, 다시 해당(海堂)의 판소리 흥보가 형제 우애 갈라서는 대목을 듣고 싶구나.
추색을 차고 푸르게 띠며 흘러가는 물빛을 감득(感得)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항골계곡의 아름다움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무수한 수목들은 닥쳐오는 겨울을 향해 야위어 가는구나. 말라 가는 잎새들 헤아릴 수 없고, 떨어지며 일으키는 파문들, 찰나에 기대는 형국이어서, 나름 심오하다. 그 잎새마다 다양한 색의 톤(tone)을 산란하여, 무수한 빛의 조화가 생긴다. 그뿐인가 하늘에는 회색의 구름이 희미한 빛을 보태고, 안개비는 몽환의 색조를 더해 준다. 이 자연 앞에 나는 어떤 외경심이 생기고, 내 마음은 무채색의 겸허를 품는다.
이 가랑비를 맞으며 항골계곡을 돌아 나오는 지점, 현대식도 옛날식도 아닌 절충 형태의 정자에서 우리는 일행이 다 모이도록 기다려, 비도 피할 겸 모였다. 비는 우리 인간들 마음만 조급하게 했을 뿐, 계곡의 숲과 물은 여전하고 의연했다. 다만 단풍의 색조는 이 비 그치고 나면, 한결 더 조락의 빛깔을 드리우겠지. 잠시 내 마음 안으로 그 어떤 수수(愁愁)로움이 머문다. 여수(旅愁)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를 불러온다는데, 그냥 이 순간이 아쉽고 안타깝다.
그때 마침 해당(海堂) 오종실 친구가 정자 난간을 뒤로 하고 판소리 한판을 벌인다. ‘사랑가’ 한 소절이다. 이 추풍낙엽 지고 물빛 푸르게 차가워지는 계곡에서 ‘사랑가’는 왠 말인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사랑의 불 지펴지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더란 말인가. 차가운 대기가 해당의 목소리를 따뜻하게 데워주지 못하자, 그의 소리는 음계 높은 곳에서 고산준령을 넘어가듯 힘을 쓴다. 일행은 해당의 목소리 수고를 감동으로 듣고 박수를 보낸다. 자못 인상에 남는 대목이다. 설핏, 해도 기우는 기색이다. 계곡 입구 매표소 있는 데로 나오니, 계곡을 들어가서 걷고 돌아 나오며 걸은 총 거리가 7~8킬로미터는 족히 되나 보다. 나는 이 모든 걸음을 감당한 내 오금에도 감사를 드린다.
일행은 다투어 찬탄의 언어를 내어놓았다. 해당(海堂)은 ‘예술이네!’를 연발했다. 그는 뒤에 우리가 찍어 올린 모든 사진에 대해서도 ‘예술이네!’로 화답해 주었다. ‘경치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그냥 행복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無心은 항골계곡 숨바우길에서 평생 보았던 단풍보다 더 많은 단풍을 즐겁게 보았다고 말한다. 발톱이 아파서 계곡 안으로 들어와 보지 못했던 우명길 친구는 뒤에 단톡방에 올린 수많은 사진을 다 일람한 후에, 불타는 단풍을 가까이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석주 원영환 친구는 오랜만에 몸과 맘을 때 묻지 않은 단풍 숲에 온전히 담글 수 있었음을 말하고, 오늘 행사를 주도한 可洋과 부명숙 부장님께 감사를 표했다.
3시간 정도의 항골계곡 탐방을 마치고(15:30), 차량을 이용하여 ‘나전역(Najeon station, 羅田驛)’으로 간다. 나전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리에 있는 한국철도공사 정선선의 철도역이다. 역명과는 달리 나전리에 위치하지 않는다. 북평리에 위치한다. 위키백과에서 좀 더 나전역을 찾아보았다.
나전역은 1969년 석탄산업의 발달과 함께 정선선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다. 세월이 흐르고 1989년 대한석탄공사 나전광업소가 사라지면서 1993년에는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이 되었다. 나전광업소가 있을 당시 북평면에만 7천여 명이 살았지만, 저무는 석탄산업과 함께 인구도 빠르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철거가 논의되었던 나전역은 2015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힐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옛 간이의자와 난로, 역무실과 시간표까지 그대로 재현된 역사에 정선아리랑열차가 오가면서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나는 여러 해 전 아내와 함께 정선아리랑열차를 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전역을 달리 기억에 남겨 두지를 못했다.
우리가 찾아간 나전역은 위의 설명 그대로였다. 2015년 정선아리랑열차 개통 이후로는 선평역처럼 10분 동안 정차하고 있다. 역사 외벽은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그린 벽화로 채워져 있었는데 현재는 새로 깔끔하게 리모델링 하여 역사 내부를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1992년에는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철도역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2008년에는 서태지가 이 역의 플랫폼에서 휴대폰 광고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나전역은 옛날 시골 역 대합실(待合室)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를 사는 곳, 개찰구 등의 모습도 옛날 그대로 보존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나전역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얼마간 기차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의 시골 역이란 대개 일정 규격과 모양으로 거의 똑같이 지었으므로, 어느 역이나 비슷비슷했다. 나전역은 내 눈에는 너무도 익숙했다. 기차 통학하던 소년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살아 나온다.
우리 일행은 카페가 된 나전역 대합실에서 차를 마셨다. 우리 말고도 둘씩 셋씩 여기를 찾은 관광객들이 있다. 우리 일행이 수효가 가장 많다. 역사 건물 창을 통하여 정선선 철길의 레일이 보인다. 나지막한 플랫폼도 보인다. 나는 기차역의 플랫폼을 조용히 바라보면, 아주 고즈넉한 이별이 먼저 생각난다. 1970년대 내가 경청하던 인기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이름은 성우 김세원씨가 진행하던 ‘밤의 플랫폼에서’였다. 향수 어린 이름이다.
플랫폼은 오르고 내리는 곳, 향하고 돌아오는 공간이다. 영화 모래시계 촬영을 정동진역 말고도 여기 나전역에서도 했다니, 어떤 장면이었을까. 아마도 이별 아니면 해후의 장면 아니었을까.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별과 해후는 불이(不二)의 관계이다. 내가 살아 온 인생의 숱한 역들도 다 이별과 상봉의 플랫폼 위에 있다. 플랫폼에서 우리는 새로운 출발지를 향해서 인생 열차에 오른다. 플랫폼에서 우리는 그 어떤 인생의 기착지를 향해 열차에서 내린다. 1968년 봄, 그때 우리는 용두동에 있는 같은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그 대학은 우리가 공유하는 인생의 플랫폼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같이 오게 하였다.
인생 행로, 어떤 플랫폼에서는 그녀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어떤 플랫폼에서는 또 다른 그녀를 찾아와 내리기도 했다. 인생은 향기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돌아본다는 일은 그 옛날의 향기로움으로 지금의 쓸쓸함을 포근하게 감싸는 일인지도 모른다. 돌아본다는 일은 단순한 회고인 듯해도 이미 그 안에는 성찰(reflection)을 향하는 마음을 필연으로 동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칸트가 말했다지. 생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아름다움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양심(도덕) 때문이라고. 나는 그 ‘양심’이라는 것이 곧 ‘돌아보는 일(반성)’에 결부되었음을 각성한다. 반성(reflection)이여, 성찰이여!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여!
나는 나전역 플랫폼에서 그 어떤 날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대학 시절 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상경할 때, 자전거 뒤에 이불이며 옷가지며 한 보따리 싣고, 고향 역 플랫폼까지 따라 나오셔서 나를 서울로 보내시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 그리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 이것이 지금은 내 인생의 향기로 돌아오고 있다. 나전역에서 열차가 수시로 다니던 시절 이역의 플랫폼에는 누가 손을 흔들고 누기 눈물을 뿌렸을까.
누군가 일행을 위해 차 보시(布施)를 했다. 夫부장이 베푼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커피를 비롯하여 대추차, 쌍화차, 오미자차 유자차 등, 차향(茶香)이 번져 난다. 그 사이에 夫명숙 부장이 이곳 정선의 풍토 풍광과 나전역의 유래에 대해서 세세한 안내 설명을 한다. 우리는 관광 안내 팸플릿을 한 장씩 가져와서 들여다보며, 다들 마음으로 결심 아닌 결심을 한다. 언젠가 여길 다시 한번 와야지! 나전역에 서성이는 마음들이 왜 이렇게 이쁜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일행은 나전역 카페에서 길고 오래, 그리고 활발하게 대화하며 나눈다. 고향에서 자라던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음식 이야기, 여행 이야기, 운동과 섭생 이야기 등등 무한하다. 일행이 많으니 다시 무리를 나누어서 이쪽은 이쪽대로 이야기하고 저쪽은 저쪽대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화법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자유로운 대화 상황에서는 네 명만 되어도 이야기는 두 패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진단다. 세 명만 되어도, 심리적으로는 한 팀으로서의 대화 나누기가 깨어진다고 한다. 두 사람은 열심히 이야기하고 한 사람은 다소 소극적으로 물러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날 우리들의 대화는 형식은 자유롭고, 내용은 다채로워서, 그저 자유자재로 다가가고 물러서도 여전히 대화는 활력을 잃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화목한 우애의 기운[和氣]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靄靄]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화기애애(和氣靄靄)를 나전역 카페에서 만들어나갔다.
늦가을 저녁 해는 잠깐 사이에 기운다. 더구나 이곳 산첩첩(山疊疊)인 정선 골짝의 해는 오후 시간을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의 가이드 夫 부장이 여기에서 빨리 일어서기를 재촉한다. 나전역 카페에서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오장폭포(五臧瀑布)’로 간다. 출발한 시간이 대략 16시 30분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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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폭포는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 있는 인공폭포이다. 강원도 정선군 높이 1,332m의 노추산 남서쪽 줄기인 오장산에서 발원한 물로 조성되었다. 규모는 경사길은 209m이고 수직 높이는 127m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오장폭포 계곡물은 노추산의 수려한 계곡을 가르고 송천으로 떨어져 내린다. 길고 장엄한 폭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폭포 주위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여름에는 양쪽 봉우리의 푸르른 나무들이 더욱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인터넷 자료)
직렬로 낙하하는 폭포의 수직 길이가 127m라니 장관이다. 더구나 폭포는 자동차가 다니는 근 도로 바로 옆이다. 목전에 전개되는 광경만 보면, 인공폭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폭포 꼭대기 저편 부분의 물길을 인공으로 끌어들여 폭포 이쪽으로 물이 떨어지게 했다니, 폭포 전체를 인공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폭포가 떨어지는 암벽 경사길 209m와 그 주변의 우뚝 솟은 노추산 봉우리와 계곡은, 만고(萬古)부터 있었던, 자연 그 자체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만한 폭포의 경치를 보는 일도 국내에서는 쉽지 않다.
인터넷에 올린 한 블로그에는 이런 견해도 있다. 내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 마을 어느 식당에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80년대 구절리 노추산 광업소 업주가 노추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돌려 버렸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 물길로 인해 갱구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광업소의 업주가 노추산 물길 돌리는 사업을 언제 마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구절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은 그 이전부터 폭포에서 물은 조금씩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광업소 사업주가 물길 돌리는 사업을 하기 전에도 물은 조금씩 흘러내렸다는데 물길을 돌려서 더 많은 양의 물을 흘러내리게 했다고 해서, 이 폭포를 가리켜 인공폭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공폭포라고 하면 전기와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 올려서 떨어뜨려야 하는데, 이곳 오장폭포는 오장산 계곡을 흘러서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입니다.(https://11757.tistory.com/16886019)
폭포에서 날아오는 물방울 비말(飛沫)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길에 서 있는 우리에게 와 닿는다. 큰 폭포 곁에 있다는 느낌이 여실하다. 가양(可洋)은 폭포를 대하는 소회를 이렇게 밝힌다. 나도 可洋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런 위용을 갖춘 큰 폭포를 힘들이지 않고 도로변에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대를 품고, 어렵고 긴 산행 끝에 찾아간 폭포인데, 그 규모에 실망했던 때도 많았다.”
일행은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오장폭포를 보며 찬탄을 머금는 우리 일행을 보고, 늦은 시간 이리로 우리를 데리고 온 夫 부장님께서는 오늘 가이드 역할의 보람을 느끼는 표정이다. 오늘 정선행 행정(行程)의 끝을 오장폭포에서 호연의 기운으로 사무치게 한 것은 자못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은 물론이고, 우리가 서 있는 곳 자체가 사방에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그래서 자연스레 계곡이 깊다. 저녁 어둠이 내리고 성긴 빗발이 어리면서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했다. 매우 추운 날씨로 변했다. 나는 폭포 오른쪽의 깎아지른 절벽의 병풍 같은 암벽들이 비장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손을 호호 불며 서둘러 승용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장폭포를 떠났다.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오장폭포는 철쭉꽃 피는 계절에도 절경일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주문해 놓은 옥산장 식당까지는 17시 30분까지 가기로 했다. 조금 빠듯할 듯도 했다.
정선 읍내 옥산장 저녁 메뉴는 닭백숙이다. 반주를 곁들였다. 오늘 하루 우리가 다닌 행정의 견문과 우리가 느낀 감수성에 대해서 백화제방(百花齊放)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아름다운 날이다. 음식도 맛있고 술은 달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구수하고 웅숭깊다. 그 대목 어디쯤서 無心의 소리 한 자락이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의 현존재가 모두 ‘세계 내적 존재’이어서, 내가 나를 초월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대로 살기는 어렵다. 각기 끊어 놓은 차표들이 있어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저녁을 마치고 나온다. 그믐 가까운 날이어서 하늘에 달은 없고 별들이 초롱초롱 흩뿌려져 있다. 칸트가 각성된 자아의 세계를 경이롭게 발견하게 해 준다는 그 별이다.
정선 터미널에 와서 19시발 동서울행 버스를 탄다. 세 시간 족히 걸린다고 한다. 차의 좌석은 많이 비어 있다. 다른 친구들은 각기 자신들이 정선에 올 때, 이용했던 교통편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하루가 꿈결같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우리 등산모임 단톡방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아! 오늘 맑고 수려한 정선의 추색 산수에 마음 씻고 영혼 깊게 침잠합니다. 터미널로 돌아오는 짙고 고요한 어둠 속, 정선 산하의 들판과 냇물들 내 미음 안으로도 흘러서 정겹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랑하는 친구들, 열아홉 살 홍안 청년으로 만났던, 이 오울드 보이들의 우정과 인연생기(因緣生起)는 무슨 하늘의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2022.10.24. ㅡ 밤으로 가는 동서울행 버스 안에서/ 박인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