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대한민국 재테크박람회’ 참석차 방한한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 회장은 구랍 4일 서울대 경영대학에서 서울대생을 상대로 강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다시 젊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중국에 가서 중국 여자와 결혼해 농부의 삶의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같은 대답은 지금보다 좀 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농업이 미래의 최고 유망 업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농업이 가장 유망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당장 교실을 나가 농대로 가거나 농장으로 가라”고 외쳤다. 또한 모든 사람이 농업을 등한시할 때 역으로 농부가 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는 식량과 농경지 부족이 심해져 농업이 수익을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산업이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일제강점기의 악조건 속에서 짐 로저스 회장의 말처럼 농업의 선구자가 된 젊은 과학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농업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앞장선 농학 연구자이자 농업 개혁가인 조백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 농학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인물로 꼽히는 조백현은 3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서울대 농대에서 교편을 잡았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농학에 뜻을 둔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또한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농학교육의 기틀을 다시 세웠으며 해외 선진농업을 도입해 한국 농업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식품을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산업으로 변모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몸이 허약해 농림학교로 진학
조백현은 1900년 2월 3일 아버지 조성근과 어머니 황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말기의 무신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친 조성근 역시 1893년 무과에 급제해 구한말에는 육군 참장을 지냈다. 일제시대 조선인으로 장군이 되어 중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고위 군인이었던 조성근은 1933년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이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조백현은 매동초등학교를 거쳐 1912년 보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부친과 달리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고 키가 작아서 보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좁쌀사위’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보성학교 시절 그는 수학과목에 뛰어나 졸업 후에는 공업전수학교에 가서 공학을 배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보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친이 “그렇게 허약한 체구를 가지고는 군인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농사기술을 배우라”며 농림학교 진학을 권했다.
평소 부친이 워낙 엄했던 터라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1916년 수원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원래 구한말에 국립으로 세워졌던 농상공학교가 한일합방 후 분리되어 수원에 설립된 우리나라 근대 농학교육기관으로서, 일제가 수원에 두었던 권업모범농장의 부설기관이었다.
즉, 지금으로 치면 초급대학 같은 곳으로서 학문을 가르치기보다는 농사기술을 익혀주는 실업교육기관이었다. 때문에 교실에서 하는 강의보다는 실습장에 나가 채소를 기르고 나무를 가꾸는 실습시간이 더 많았다.
몸이 약했던 조백현은 그 같은 실습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차에 마침 1918년 수원농림학교가 전문부를 새로 신설하자 다시 시험을 치러 수원농림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전문학교에서는 실습이 적어진 대신 강의 과목이 늘어나 그는 점차 학교 생활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특히 그는 화학 과목에 흥미를 느껴 밤늦도록 화학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곤 했다.
한국인이 발표한 생화학 분야의 최초 논문
일제가 당시 그처럼 우리나라에 모범농장을 세우고 농업 기술을 도입시키려 한 것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일제의 농업 장려책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한국의 농업은 비료라야 회분이 거의 전부일 만큼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니 작업량 대비 쌀의 생산량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일제의 우량 품종이 도입되고 권업 모범농장 등의 설치로 새로운 농사기술이 보급되자 우리나라의 쌀 수확량도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양보다 일제의 쌀 수탈량이 더 많아져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백현이 다녔던 수원농림학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전문학교로 개편되기 전까지 농림학교는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일제가 일자리를 주지 않아 애써 배운 농업기술을 사회에 나가서 활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학교 교사나 혹은 상업 방면으로 진출하곤 했다.
하지만 졸업 후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조백현은 부모를 설득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1년 큐슈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큐슈제국대학 농학부는 농학과의 단일과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농림전문학교 시절부터 흥미를 가졌던 농예화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농예화학 중에서도 생화학은 당시 새로 개척되고 있던 첨단학문이었는데, 마침 독일 유학을 마친 젊은 일본인 교수의 지도로 그는 ‘계란 분화에 따른 아미노산의 변천’이라는 졸업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발표한 생화학 분야의 최초 논문이었던 그의 졸업 논문은 교수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5년 3월 큐슈대를 졸업한 후 그는 전문학교에서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된 모교의 부름을 받고 유일한 한국인 강사로 일했다. 생화학과 조선어의 2과목 강의를 맡아 하며, 나머지 시간은 농사시험장에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 무렵 그는 우리나라 전통 식품의 성분을 규명한다는 연구 테마를 잡아 산나물을 채집해 연구실에 쌓아둔 채 성분 분석 연구에 몰두했다.
이 같은 전통식품에 대한 연구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해방 후에는 메주의 발효, 곰팡이의 분류 및 그에 따른 번식 방법, 된장과 간장 맛의 관계, 고추장의 성분 분석, 개량 메주의 제조법 등을 연구했다. 이들 연구는 전통 식품의 현대화를 통해 우리의 식품 산업이 근대적 발전의 길을 걷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편에서 계속)
수원고등농림학교에 강사로 부임한 조백현은 조교수를 거쳐 30세에 교수로 승진했으며, 생화학·토양학·발효학·유기화학 등 농화학 분야의 강의를 담당했다. 1944년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되었는데, 해방을 맞이한 1945년 9월 30일 조백현은 그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미군정청에서 해방 직전에 부임했던 수원농림전문학교의 일본인 교장에게 학교를 조백현에게 인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수원농림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일본인 교수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정상수업이 불가능한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한 조백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국인 교수진을 모아 1946년 10월 15일 정식으로 개교하는 서울대 농과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 10월 그는 유네스코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자연보존 연구 및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당시 그가 전공으로 했던 토양학 분야에서는 토양 보존 문제가 국제학계의 이슈로 대두되었는데, 개간에 따른 토양 침식 및 토사 유실, 그리고 먼지에 의한 피해가 많았다. 그에 따라 유네스코에서는 특히 토양 보존이 잘 되어 있던 유럽에서 토양 보존 연구 및 시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당시 조백현은 영국의 농과대학 및 토양연구소에 머물며 새로운 분석 기술을 익혔다. 그 후 덴마크와 서독, 프랑스 등지에 들러 7개월 만인 1953년 5월에 귀국했던데, 그 같은 외국 시찰은 서울대 농과대학의 시설을 확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돌아온 후 서울대 농과대학은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로 불에 탄 교사를 다시 짓고 실험기구를 새로 외국에서 들여올 수 있었다. 조백현은 유럽에서 보고 온 새로운 연구시설 및 실험기구로 현대식 연구 실험실을 꾸몄다.
1955년부터는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미네소타 대학이 서울대의 재건을 위해 지원해주는 ‘미네소타 플랜’이 시작되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5개월간 미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둘러보고 온 조백현은 미네소타 플랜에 따라 신관 교사를 짓고 강당을 세웠으며 연구실과 실험실을 만들었다.
한국농학회 초대회장으로 선임돼
미네소타 플랜은 특히 공대 및 의대, 농대 등의 기술교육에 중점을 두어 실행되었는데, 당시 이 계획을 통해 농대에 투입된 기술관계 원조액만 해도 12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그 자금으로 서울대 농과대학은 기숙사 및 식당, 도서관, 강당, 신관교사 등의 시설을 새로 짓고, 교수들의 외국 유학도 활발해졌다.
그처럼 시설이 확충되고 미국에 다녀온 교수들이 차차 귀국함에 따라 서울대 농과대학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식 농학에 머물러 있었던 농학이 구미의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설로 면모를 일신함에 따라 서울대 농대는 당초 농학과 등 8개과에서 잠사학과, 농가정학과, 농교육학과가 증설되어 11개 학과를 둔 현대식 농학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그는 농학과 관련된 학회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54년 4월 발족한 한국농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서울대 농대에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67년 토양비료학회장, 1972년 식품과학회장 등을 지냈는데, 이들 학회 회장 자리 역시 처음 만든 학회들의 첫 회장이었다.
1961년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강사로서 연구생활을 이어갔다. 행정 업무에서 벗어난 그는 당시 학계의 관심거리였던 원자력의 농학이용 연구에 몰두해 바로 그해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10차 태평양과학회에서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20만 달러에 상당하는 연구장비 및 방사성동위원소 등을 지원 받아 벼농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비(施肥)의 위치 및 시기 등을 알아내는 연구과제를 맡았다. 2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벼의 표층과 하층에 동시에 주는 전면 시비가 가장 효과적이며, 벼에서 비료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는 꽃이 분화하는 시기라는 사실을 처음 시험적으로 증명해냈다. 그 같은 연구결과는 1964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되었던 IAEA 국제회의에서 발표돼 적지 않은 반향을 얻었다.
원자력 기술을 농업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
그는 1965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약 8년간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기술을 농업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는 원자력청에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 같은 공로로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경방 육영회가 과학 및 산업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수당과학상을 수상했다.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 ‘한국산 야생 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 연구’, ‘전통발효식품에 관한 연구’, ‘콩나물 생장 중 성분 변화에 관한 연구’, ‘개량메주 제조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특히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는 흙 속에서 수분이 이동하는 속도를 실험적으로 계산하는 식을 만든 것으로서, 미국보다 13년 앞선 세계 최초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토양학’, ‘목야경영법’, 번역서로는 ‘토양학원론’이 있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을 지낸 그는 학계를 떠나 은퇴하면서 사재로 화농장학회를 설립하여 1993년 재단법인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족시켰다. 화농(華農)은 바로 그의 호인데, 이 재단은 매년 농업과학 기초분야의 우수논문 발표자를 선정하여 ‘화농상’을 시상하고 있다.
1996년에는 수원의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대학(구 농과대학) 캠퍼스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1994년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문적인 연구자로 성장했으며, 또한 후진을 길러내기 위해 평생을 과학기술 교육에 헌신한 농학 연구자이자 농업 개혁가였다. 해방 후 급속도로 과학기술자 사회가 제 모습을 갖춰갈 수 있었던 것은 조백현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며 때를 기다렸던 과학기술자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사이언스 타임스 이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