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뭐라고 했는가, 천사맹이라고 했는가?"
백산 일행이 있는 곳에서도 천사맹이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 모르고 있었소?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무슨 근거로 장강수로연맹이 천사맹이라고 하는가?"
그동안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천사맹이란 말이
강호의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그것? 이 책에 나와 있던데."
자신이 품속에서 꺼내놓은 책 한 권,
바로 만상투인루에서 얻었던 연판장이었다.
석숭이 재빠르게 책을 빼앗아 들더니 첫 장을 넘겼다.
'혈맹인명록(血盟人名錄)'이란 붉은 글과 함께
천무맹, 천마맹 등 구파 일방을 포함한 모든 무림 문파의 인물들이
많게는 사오십 명에서 적게는 한 명까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각파에 있는 첩자의 목록?"
부지불식간에 터진 석숭의 외침이었다.
거의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다.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상인인 석숭도 알 만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자네, 이것을 어디서 얻었나?"
"만상투인루에서 주웠소.
연동립이 보물이라더군,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보물."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그런 엄청난 책자를 들고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모른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기야 광천뢰도 무슨 구슬 가져오듯이 가져온 친구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게 그렇게 대단한 책이요? 돈이 좀 될까?"
경악하고 있는 석숭의 표정에서 돈 냄새를 맡았는지
귀중한 보물을 보여주었다 빼앗긴 것처럼 얼른 책을 회수해 가며 하는 말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닐세.
이것을 자네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자네와 우리는 바로 죽은 목숨이네.
이것은 바로 혈맹이라는 단체의 첩자 목록이네.
자네에게 이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혈맹에서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럼 돈이 된다는 소리네? 여기서 발췌하여 각 문파에 팔아먹으면 되겠네 뭐."
석숭의 목숨이란 말도 소용없었다.
새로운 돈벌이를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우선 이놈들부터, 옳지 여기 있다. 흑사, 초무인 두 놈밖에 없네?"
"그 책 잘 간수하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무림인이 아닌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나 펼쳐보면 안 되는 책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을 들고도 심각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백산을 보고
석숭이 고개만 흔들고 있었다.
"그 책 천무맹 같은 곳에 가져다주어야 되는 것 아니냐?"
이제 완전히 마인의 틀을 벗은 갈태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죠? 그 놈들이 우리에게 뭘 해준 것이 있다고.
이 책에 있는 혈맹이란 놈들이나 천무맹, 천마맹,
지금 오고 있는 천사맹이나 모두 같은 놈들이오.
다들 자신들의 목구멍 걱정해서 싸우는 것이지 정의는 개뿔이 정의.
더 많은 놈들을 꼬드겨서 지네들 편 만들려는 속셈일 뿐이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내밀면 고맙다고 할 것 같소? 미친놈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마료와 마불신승의 삶을 보고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강호인들을 바라보는 백산의 시각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을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들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만 관심을 가질 뿐이고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의나 대의라는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건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저도 믿을 수 없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자파의 수뇌들 중 외부 첩자가 있다는 것을… 되레 첩자로 오인 받기 십상이지요."
이것이 강호 무림의 현실,
아니 세상 돌아가는 현실인 것이다.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 그들에게 꼭 필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맞는 말임에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이다.
자신들 보다 하위 계급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서는
훌륭한 사고가 나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의 틀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둥! 둥! 둥!
세 사람이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새벽 물안개를 가르며 쏟아지는 빗속에 나타난 검은 동체,
장강수로연맹의 검은 용인 흑룡호였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이미 대충 알고서 묻는 것이다.
그러나 석정이 이야기했던 대단한 인물들로 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전부 열다섯 남짓의 흑의인들,
백발 백염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자신이 보기에도 대단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석정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대가 맹주인가?
우리는 그저 이름 없는 사람들일세.
단지 이곳을 지나 안휘성으로 가고자 했을 뿐 그대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네."
일이 커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목숨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을 썼을 뿐이다.
무림에서 지금과 같은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이들이 단순한 수적집단이 아니었기에 대화로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따로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백산이 펄쩍 뛰면서 반대를 했으나
일행 중에 사망자도 없었고 사건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는 조천영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피는 과거에 보았던 것으로 되었다.
이제는 생명을 구하는 의원으로만 살고 싶은 것이 갈태독의 마음이었다.
"신분을 밝히라고 하지 않았더냐!"
자신의 상관인 총채주에 대한 갈태독의 반 하대가 기분이 나빴는지
적인수 옆에 있던 황의 대한 한 명이 소리를 내질렀다.
비록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총재주에게 단 한 점 밀림도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노인네의 여유에 심사가 뒤틀렸던 것이다.
"그대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이네만 우리는 무인이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천만 냥을 주겠네,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겠나?"
천만 냥이라는 엄청난 금액,
상대가 천사맹이기에 제시한 금액이었다.
백 명 정도가 죽었으니 일인당 십만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장례비로 지급하겠다는 말이다.
갈태독의 말을 들은 적인수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들에게
장례비를 지급하겠다는 말에 놀랐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적인수가
일행을 쳐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장강수로연맹이외다, 노인장. 먼저 신분을 밝혀주시오."
단순한 수적이 아닌 무인 단체라는 소리였다.
돈보다는 명예를 먹고사는 인물들,
그들에게서 지킬 명예가 없다면 그때부터는 무인이 아닌 것이다.
그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석자 이름이기도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갈태독이네, 여기 있는 이 친구는 석숭이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갈태독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던 그 이름이
강호에서 다시 거론되는 것이 싫었기에 극구 숨기고자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의 이름가지고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강호 무림에서 석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여 그의 이름까지 같이 밝힌 것이다.
백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는지 반응은 잠시 후에 나타났다.
"헉!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 갈태독(葛太獨)? 세상에…."
흑룡호의 최상층인 맹주의 처소에서 나온 소리였다.
혈의와 흑의를 입고 있던 나이를 알 수 없는 두 노인네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경악스런 표정으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저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었던 말인가! 벌써 백오십이 넘었을 텐데…."
천장지옥마라는 이름이 주는 놀라움도 컸지만
무려 백년 전의 이미 전설이 되었던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오십 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로.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두 사람에 반해
석정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년 전의 개세마두였던 갈태독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패할 리야 없겠지만 노기인을 협공해서 죽였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수많은 비난이 쏟아지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마와 사로 구분이 되어있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동류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어둠 속에 있던 천사맹의 출두가 비난과 함께 시작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정사항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맹주님!'
'아직은 우리가 유리한 입장이에요.
저분은 아니더라도 그 옆에 있는 저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는 있겠지요.'
재빠르게 오고간 전음이었다.
나이 백오십이 넘은 전대 고인을
자신들의 휘하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옆에 있는 열세 명의 청년들,
비록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지만
용왕유권이란 전설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고 도강까지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소림사와도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노리는 다른 한 가지는
저 청년들과 천장지옥마의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하게 같이 여행하는 동료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저들만 잡아 둘 수 있다면 꼭 천사맹 소속은 아닐지라도
전대의 고인인 갈태독을 자기편으로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중원 최대 부호인 만금돈노 석숭까지…
이것은 대어 중에서도 초특급 대어가 아닌가.
"진정 노선배님이셨습니까? 저는 적인수라고 합니다.
강호 동도들이 사자혈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적인수가 놀라운 눈으로 갈태독을 쳐다보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과거야 어찌 되었던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이름을 날렸던 무인이고,
전설이 되어버린 인물과 상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극진하게 모셨을 터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자신은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있고,
자신의 부하가 저 노기인이 있는 일행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이고 무림의 세계다.
"저희 수로연맹에서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목숨에는 목숨으로 변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맹이 수로채를 통합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추진했던 사안이었다.
'형제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목숨의 대가는 반드시 목숨으로 받아라. 그래야 깔보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은 적중했고
수적의 무리라고 무시했던 강호의 무림인들도 수로채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수적 하나 잘못 건드렸다 평생을 쫓기며 살 짓을 왜 하겠는가.
"내가 부탁해도 안 되겠는가."
갈태독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후배에게 부탁이란 말을 썼다.
그만큼 싸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 광견조, 석두, 백산 등 일행의 수는 별로 안 되지만
싸움이 일어난다면 강물이 피로 물들 것이다.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무공을 익히고 있기에 광견조원들의 능력을 안다.
더구나 이곳에는 광천뢰가 두 상자나 있다.
다가오는 배에 하나씩만 던져도 천사맹은 거의 전멸할 것이다.
즉 양자강을 피로 물들이는 것은
이곳의 주인이라는 저들이 될 것이기에 말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적인수는 그러한 갈태독의 마음을 알지 못했으니….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연맹에서 죽어간 그들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본론이 나온 것인가.
갈태독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먹히리라는 계산이었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휴-우!"
"그만 하시오, 영감!"
한숨짓는 갈태독을 만류하며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백산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들 위에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오연하게 서 있는 적인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적인수라고 했나?
너하고는 더 이상 대화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저 안에 처박혀 있는 너의 대장을 불러라.
여기 있는 영감하고 너 같은 조무래기 놈하고 격이 맞는다고 생각하나?"
자신은 영감이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적인수가 갈태독과 말싸움하고 있는 것은 싫었나 보다.
"죽고 싶은 게냐, 놈?"
적인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입고 있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그만큼 화가 났음이다.
자신은 갈태독을 선배로 대접해 주고 있는데 그의 일행이란 놈이 자신을 조무래기라 했다.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도발하는 언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쿡쿡쿡! 죽고 싶냐고 했냐? 좋아,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하자고."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이던 백산이 몸이 그대로 갑판을 박차고 흑룡호 위로 날아올랐다.
"이런 죽일 놈이!"
조금전 갈태독에게 고함을 지르던 황의 대한이
신속하게 검을 뽑아들며 백산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자신의 가슴을 향해 들어오는 검을 흘끗 쳐다본 백산이
오른 발을 들어 가볍게 검면을 쳐내며 바닥을 향해 내리 눌렀다.
"이익!"
황의 대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놈의 발바닥에 붙어있는 검이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온힘을 다해서 검을 빼내려 했으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서 고기나 한 두어 마리 잡아와라, 네놈에게는 그게 더 어울려."
천천히 검을 내리누르던 백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리고,
동시에 오른발은 검면에 붙인 채 그 힘을 바탕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퍼-억!
이어지는 왼발에 의한 선풍각,
황의 대한의 앞면에서 피가 날리며 양자강 물 속으로 떨어져 나갔다.
첨벙!
단 두수였다.
배 위로 올라와서 찔러오는 검을 발로 막으며
선풍각을 이용하여 상대를 날려버릴 때까지 움직인 횟수였다.
적인수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쏟아지는 비도 퉁겨내지 못하고 있기에 별 것 아닌 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부하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해버렸다.
그리고 저자가 보여주었던 무공,
접인신공이었다.
격공섭물(隔空攝物)이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잡아당기는 무공이라면
접인신공은 격공섭물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물체도 아니고 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의 검이 아니던가.
"자, 올라왔으니 죽여줘!"
적인수를 쳐다보는 백산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 때 보여주는 표정이다.
단순히 갈태독을 윽박질렀다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건방진 놈! 부하 한 명 이겼다고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백산을 노려보며 두 팔을 늘어뜨린 적인수의 손에 붉은 색의 혈륜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사혈륜(死血輪).
지름이 손바닥 크기정도에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전부 칼날이 달려 있는 적인수의 독문 병기이름이다.
혈륜을 꺼내든 적인수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두 개의 혈륜에서 붉은 광망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맹주님! 말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뇌 석정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맹주라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천사맹으로 끌어들려야 하는 자들인데
비무 중에 다치기라도 하면 더욱 곤란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저들의 실력도 볼 겸 잠시 더 두고 보지요. 기도 좀 죽일 필요도 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건방져 보였다.
어찌되었던 장강수로연맹의 총채주는 적인수가 아닌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반말을 하지 않나,
죽여달라는 등 도발적인 언사를 일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부하로 받아들여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도
무력으로 눌러놓아야 뒤탈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 고생을 시킨 뒤 적당한 순간에 적인수를 멈추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혈륜혈풍(血輪血風)!"
그때 배의 앞쪽에서 적인수의 우렁찬 외침이 그들의 귀전을 때렸다.
"부 맹주의 무공을 오래 만에 견식하게 되는군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는 듯 석정이 빙긋 웃으며
막 비무를 시작하는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이잉! 위이잉!
두 개의 붉은 혈륜이 무서운 속도로 백산을 향해 지쳐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움직이는 혈륜은 일정한 방향이 없었다.
혈륜에 내재된 힘 때문에 제대로 된 위치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다가들고 있는 것이었다.
무공이름에 풍자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재미있군!"
붉은 혈륜이 살기를 풍기며 다가서고 있었지만
적인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백산이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르는 결투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무인들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 같으면 일단은 힘을 못쓰게 해 놓고 상대가 무력해졌을 때
절반의 힘을 쓰던지 아니면 우롱을 하는데
무인이란 놈들은 처음부터 약하게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백무천과 싸울 때도 겪었던 사항이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백산의 몸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손에 비도가 있으나 없으나 싸움을 할 때 그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천방지축팔방무였다.
사실 박투를 함에 있어서도 그만큼 좋은 보법도 없다.
두 팔과 다리를 사방을 향해 휘젓고 있으니
언제나 뻗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즉 휘두르는 사지에 힘만 실어주면 바로 타격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얼굴을 노리며 날아오는 하나의 륜을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피하고,
이어서 다리를 노리며 날아오는 다른 륜은 두 다리를 구부려 올리며 피한다.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그대로 인채 다리만 구부려서 아래쪽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쳐다보는 적인수의 얼굴에 비릿한 살소가 맺혔다.
놈은 앞에서 오는 혈륜만 생각했지 그 다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놈! 칠성의 힘도 받아내지 못하는 놈이….'
백산의 생각대로 적인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죽여야 하는 생사비무가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징계만 하자 싶어서였던 것이다.
적인수가 내 뻗었던 손을 가볍게 가슴 앞으로 끌어들이자
뒤쪽으로 날아가 있던 혈륜이 무서운 기세로 백산의 등 쪽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앞으로 전진하는데 만 열중하고 있는
백산의 모습을 본 적인수의 얼굴에 득의 표정이 어렸다.
'두 귀를 잘라주마 놈!'
아주 가벼운 상처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평생을 간직해야 하는 상처,
그가 노리는 곳은 백산의 두 귀였다.
팔이나 다리를 자르고 싶지만
자신들의 일꾼으로 부려야 할 자이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적인수는 백산을 너무 몰랐다.
뒤쪽에서 날아오는 두 개의 혈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도합 열두 개의 철구가 뒤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경험했던 그에게
두 개의 혈륜은 애들 장난에 불과할 뿐이었다.
"헉!"
잘린 귀를 기대하고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적인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그림 같았다.
뒤에서 날아오는 혈륜을 간발의 차로 고개를 숙여 피한 놈이
그 혈륜이 회수되는 속도와 똑같이 자신의 코앞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놈의 눈 옆에서 자신의 면상을 향해서 날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놈의 주먹.
"멈추세요!"
그 순간 흑룡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당한 내공이 포함되어 있는지 양자강 물결이 사방으로 요동을 쳤다.
"운이 좋군, 털보."
적인수의 얼굴 앞에 있던 주먹을 활짝 편 백산이
그의 뺨을 툭툭 치면서 미소를 지었다.
"애들 장난감은 아무나 쓰는 게 아냐. 이 정도는 되어야지."
"크윽!"
적인수의 뺨을 장난스럽게 건들던 백산의 오른손 팔목에서 붉은 빛이 번쩍 하더니
적인수의 귓가에 핏방울이 날렸다.
"이익!"
굴욕감으로 적인수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자신이 너무 방심했다.
분명 놈은 뒤쪽에 있는 혈륜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끝났다는 생각에 다음동작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놈이 혈륜을 피하고 바로 코앞까지 들어 와있지 않은가.
놈을 너무 경시했다.
자신이 무인이었다는 것을 망각했다.
무인이면 언제나 암수에 대비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것을 무시한 대가가 바로 이 꼴이었다.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하나? 내가 방심만…"
"병신…."
"이쪽으로 모시세요, 부맹주."
"그나저나 여자라…"
백산도 놀란 표정이었다.
천사맹이란 거대 단체의 수장이 여자일 거란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휘호! 대단하구먼.
없는 사람들 등쳐서 꾸린 살림치고는 너무 고급으로 살고 있는 것 아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적인수의 뒤를 따르는 백산의 입에서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는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담호혈이라 할 수 있는 천사맹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만상투인루의 사 층에서 보았던 그런 가구들이며 물품들을 보며
또다시 배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손에 있는 광천뢰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모양새가
천상 뇌룡현에 있을 때의 건달 모습 그대로였다.
"주둥이 조심하거라, 놈. 뉘 앞이라고 망발을 하느냐?"
맹주라는 여인의 옆에 있던 혈의인이
안하무인격인 백산의 행동을 보고 일갈을 토해냈다.
그도 백산과 적인수와의 비무를 보았고, 놈이 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적인수가 방심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박투술 가지고 접근하지도 못했을 놈이 아닌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서 이긴 비무를 가지고
마치 실력으로 이긴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놈이다.
아마 갈태독의 위세를 믿고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분명 적인수보다 더 높은 인물인 줄 알면서도 인사는 고사하고
얼굴 가득 비웃음을 흘리며 자신들의 맹주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온 소리라니,
천사맹으로 끌어들일 마음만 없었으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 것이 아니잖아, 늙은이!
창녀들의 몸 판 돈, 소매치기들이 훔친 돈, 도둑들이 도둑질한 돈,
그런 돈으로 이렇게 개기름이 질질 흐르게 살고 있는 것 아냐?
그래도 창피한 것은 알아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고.
안 그런가, 천사맹의 맹주 양반?"
"헉!"
백산 일행을 제외한 천사맹 인물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새어나왔다.
"취익!"
더욱더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광풍대원들의 출신이 그런 곳이었기에 잘 알고 있다.
창녀들의 생활과 소매치기의 설움을.
구리돈 몇 문을 벌기 위해서 손님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하고,
간혹 성질 더러운 놈이라도 만나게 되면
화대는 고사하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는다.
또 남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는 어떠한가.
훔치다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손목이 잘리고 평생을 병신으로 살아간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어느 이름 모를 골목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런 것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석숭에게 들어서 안 사실이었지만
천사맹이란 단체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곳이라 하였다.
개방의 거지를 제외한 또 다른 거지들과 소매치기,
힘없는 건달들이 모여서 만든 하오밀문(下午密門),
도둑집단인 공공문(空空門),
기루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환희궁(歡喜宮),
그리고 마방에서 일하는 이들과 주루의 점소이들이 모여서 만든 구유문,
강호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지켜보기 위해서 만든
그런 단체들의 연맹이 바로 천사맹이었다.
그런 서러운 돈을 받아서 사는 놈들의 생활이 너무 화려했다.
"놈! 죽고 싶은 게냐? 그것을 어디서 들었느냐."
혈의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자신들만의 비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너무 수상했다.
천장지옥마라는 전대 고인이 문제가 아니다.
이곳은 천사맹의 최고 심처,
아무리 하늘을 뒤집는 재주가 있어도 자신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저들은 이곳에서 죽는다.
"참으세요, 사부님. 손님들입니다."
천사맹주라는 여인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녀도 백산의 말에 분노했는지 복면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천녀가 천사맹의 맹주를 맡고 있는 수영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원나라 수군이 쓰던 곳 그대로입니다.
저희가 꾸민 것이 아니고요."
갈태독에게 하는 말은 정중했지만 백산에게는 서릿발같은 음성이었다.
물론 환희궁, 하오밀문, 공문 등으로부터 매달 군자금이 올라오고 있다.
그 돈이 어떤 돈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안다.
은자 한 냥을 쓸 때도 그녀들의 눈물을 생각하곤 했다.
이런 욕을 들어야 할 정도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은 참아야 한다.
천사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처리방안은 그 뒤에 생각해지 늦지 않을 것이다.
"이분들은 혈사삼존이라 불리신 마령혈존과 혈영사존 되십니다.
저의 사부님들이시고요."
혈사삼존.
천사맹을 지탱하는 세 기둥으로
대형인 구유혈존(九幽血尊) 수제인(帥帝仁)과
마령혈존(魔靈血尊) 만구득
혈영사존(血影邪尊) 상인효 삼인을 일컫는 말이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구득(滿邱得)입니다."
"상인효(常仁孝)입니다."
마령혈존 만구득, 혈영사존 상인효 두 사람 다 백년 전의 인물들이다.
만구득은 공문 문주였고,
상인효는 하오밀문의 문주로 갈태독이 귀혼곡에 갇혔던 직후에
강호 활동을 시작한 인물들이었기에 갈태독이 알 리 없었다.
석숭만이 놀라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갑네, 갈태독이네."
"앉으시죠, 어르신."
"저희들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앉자
수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백산 일행의 천사맹 가입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자신했다.
강호란 무공만 강하다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한 무공에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천사맹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갈태독이란 거물만 생각했지
옆에 있는 비뚤어진 놈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굴에 기분 나쁜 흉터가 있는 자가
일행의 대장이란 것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들이 천사맹이란 단체를 만들어서 없는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이유가 뭔가?"
"이런 육시랄 놈!"
끝까지 돈을 갈취한다고 한다.
천사맹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됨이 없다.
적지에 들어와 있는 사람치곤 너무나 유들유들했다.
"네놈이 갈 선배를 믿고서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있는 것이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맹주."
혈영사존 상인효의 분노의 외침에도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구유천사 수영만 쳐다보고 있었다.
듣고 싶었다.
과연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천사맹이란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불쌍하게 핍박받으며 살고 있는 화녀들,
거리의 인간들 그들의 등불이 되고자 함이에요."
"그럼 그렇게 살아왔나?
홍등가에 창기들, 구걸하는 거지들, 손목이 잘리고 발목이 잘린 도둑들,
그들의 등불이 되고 힘이 되어주었느냔 말이다.
너희들이 한 것이 뭐지?
힘을 키운다 어쩐다 하면서 이런 엄청난 배를 타고서
장강을 따라 유람이나 하고 살지 않았느냔 말이다."
"닥치지 못할까!"
"이봐 늙은이, 당신 상관하고 이야기 중이야. 주둥아리 닥쳐!"
백산의 몸에서도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는 다 부숴버리고 싶은 것을 힘들게 참고 있는 것이었다.
저번에 석숭과의 대화 때 겪었던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제하고 또 인내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전부 다 죽일 것이냐 하던 갈태독의 말이
지금껏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혈영사존 상인효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백산을 향해서 손을 써왔다.
'혈영극마수(血影極魔手).'
그의 독문장공이자 금나수(禽拏手)이다.
붉은 혈장(血掌)이 백산을 향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멈추세요, 태상!"
사부가 아니라 태상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도 화가 나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분노를 삭이며 상인효가 물러나고 있었으나
백산을 향한 살기는 더욱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사자혈륜 적인수를 비롯한 마령혈존 만구득 등
선실의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살기가 백산 일행을 향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운이 좋군!"
상인효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천사맹주인 수영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천사맹주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백산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만일 상인효가 중간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하세요."
천사맹주인 수영이 백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해보라는 소리였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을 위한다는 너희들이 천선비도라는 보물을 탐했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천선비도는 아주 비싸니까.
그것을 구해서 팔면 큰돈이 되겠지.
그런데 말이다, 비도를 도둑질하려던 와중에 너희들 부하 백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수하를 죽였던 우리를 영입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더란 말이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그들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느냐?
그들의 삶을 알기나 하는 건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백산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혈영사존도,
맹주인 수영도,
백산의 말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기반이 되고 있는 서러운 인생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들이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요.
그러나 저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한때는 저도… 몸을 파는 창기였어요."
"맹주!"
"맹주님!"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의 입에서 통곡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원히 숨겨야 할 맹주의 비밀이다.
총관 적인수도 군사인 석정도 모르고 있던 일이다.
그런 것을 스스로 밝히고 말았다.
"다 죽인다!"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이 분노했다.
인간이 가장 분노할 때가 언제인가.
감추고 싶은 치부가 드러났을 때이다.
그것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 드러난 경우이다.
자신들의 제자인 수영,
화류병으로 죽어가던 그녀를 구했고,
다행히 무공에 엄청난 자질이 있어서 천사맹의 비천을 모두 익혔다.
어두웠던 과거를 잊고 이제야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그녀였다.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녀딸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내려섰는지 오 인의 인물들이 나타나서
맹주인 수영을 사방에서 호위하며 감싸고,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은 죽음의 살기를 뿌려대며
백산을 향해서 다가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