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사진
게티이미지 http://www.gettyimagesbank.com/view/장례-죽음-슬픔-영정사진
아버지 파고다공원에서
‘영정 사진 무료촬영’이라고 써놓은
플래카드 앞에 줄을 서 계신다
금요일만 되면 낡은 카메라 가방을 들고
무료 봉사하러 나온다는
중년의 한 사진사가
노인들의 영정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다
노인들은 흐린 햇살 아래 다들 흐리다
곧 비가 올 것 같다
줄의 후미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사진은 나중에 찍고 콩국수나 먹으러 가시자고 해도
마냥 차례만 기다린다
비둘기가 아버지의 발끝에 와서 땅바닥을 쪼며 노닌다
어디서 연꽃 웃음소리가 들린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새겨진 연꽃들이 걸어나와
사진 찍는 아버지 곁에 앉아 함께 사진을 찍는다
사람의 영정 사진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부처님께 밥 한 그릇은 올려야 하는가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나기다
나는 아버지와 비를 맞으며 종로 거리를 걷다가
양념통닭집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무료로 영정 사진을 찍었다고
이제는 더이상 준비해야 할 일이 없다고
열심히 양념통닭만 잡수신다
―「파고다공원」 전문
상가(喪家)에 가면 꼭 나 혼자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일도, 밤새워 고스톱을 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나 혼자 은밀히 영정을 바라보는 일이다.
상가에 가면 먼저 신위 앞에 서서 꽃을 바치거나 향을 피우게 되는데, 나는 그때 반드시 영정을 쳐다본다. 그것도 한번 힐끔 마지못해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망자와 말 한마디 나누는 심정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망자를 위해 절을 하거나 상주와 절을 나눈 뒤에도, 또 몇 마디 상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뒤에도 물끄러미 영정을 쳐다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될 때에도 다시 한번 영정을 쳐다본다. 그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다.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마지막 얼굴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영정에 쓰인 사진은 분명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이나, 그것 또한 검은 리본이 드리워져 쓸쓸한 죽음의 얼굴이다. 나는 그 얼굴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다. 죽음이 삶의 결과라면, 그 결과에 다다른 이의 얼굴엔 어떤 진실이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영정은 없다. 모든 영정은 다 슬프다. 한없이 막막하고 절망적이다. 말 또한 없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영정 사진 중에 빙그레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은 드물다. 거의 대부분 막막하고 심각하다. 아니, 쓸쓸하다. 사진 속의 인물이 던지는 시선의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연전에 가까운 친지 한 분이 돌연사를 당해 영정 사진을 내가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급히 사진을 찾아보아도 마땅히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었다. 그렇다고 주민등록증 사진을 사용하기는 싫었다. 몇 차례 뒤지고 뒤진 끝에 마침 사진 한 장을 골랐다.
그것은 빙그레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급히 사진관을 찾아 헤맸으나 작은 흑백사진을 확대해주는 사진관을 찾기가 어려웠다. 서너 시간 동안 광화문 일대에 있는 사진관을 일곱 군데나 뒤져 주인에게 웃돈을 주고 사정사정해서 사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신위 앞에 사진을 세워놓자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하필이면 왜 웃는 사진을 걸어놓았나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죽음 앞에 웃음은 필요 없는가. 죽음 앞에서는 망자 자신마저도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가. 어떤 때는 가만히 영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정 속의 인물이 꼭 내게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영정의 주인공이 생전에 가깝게 지낸 분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생전의 그분의 말씀, 그 목소리가 쟁쟁히 귓가에 맴돈다.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아라. 서로 불쌍하게 여기고 살아라. 남한테 해코지하지 마라.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많은 사진을 찍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싫든 좋든 사진을 찍는 기회는 많다. 나는 그 많은 사진 중에서 어떤 사진이 내 영정 사진으로 쓰일지 궁금하다. 아니, 궁금해할 게 아니라, 오늘이라도 나 스스로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하다. 내 부모님이 일흔이 넘어 영정 사진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시는 어머니가 한번은 평소와 달리 화장을 곱게 하고 한복으로 싹 차려입고 나가셨다. 아버지 또한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새 양복을 꺼내 넥타이를 매고 나가셨다. 나는 두 분이 꼭 참석해야 할 누구 결혼식이라도 있나 했으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교회 가까운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을 찍고 오신 거였다.
“자, 사진 준비됐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미리 준비했다. 나중에 일 당하면 이 사진을 쓰도록 해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은 쓸쓸했다.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나는 한참 동안 부모님이 건네주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두 분 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표정이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쓸쓸하고 적막한, 어디로 부는지도 모르는 한겨울 바람 앞에 선 그런 표정이었다. 부모님은 아예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건네주셨는데, 액자 상단에 검은 리본만 얹는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정 사진이었다.
나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하고 말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하실 필요가 없어요. 나중에 제가 다 알아서 할 텐데요.”
“그래도 그게 아니다.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다.”
부모님은 사진관에 들러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틀림없이 당신들의 장례식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지금 찍은 이 사진이 영정 사진이로 쓰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슬퍼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
나는 부모님이 건네주신 그 사진을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난 내 욕심일 뿐 결국 그 사진을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은 내 방 책꽂이 한 켠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이제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 자신도 그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 양복을 입고 평소 좋아하던 넥타이를 매고 영정 사진을 찍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상가에 들러 바라보는 영정 사진, 그것은 남의 사진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의 사진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런 얼굴로 남 앞에 놓일 나 자신 말이다. <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정호승, 비채,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2. 5. 화룡이) >
첫댓글 영정 사진도 시의 소재가 되는군요
저도 영정사진은 촬영해 놓았습니다
영정사진도 촬영해준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시로 나타내지 못할 일이 있을까요?
사진을 찍듯
'아니다' 싶은 것도 바라보는 관점과 방향을 바꾸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될 터,
시가 되느냐 안 되느냐 따지지 않고
일단 쓰는 것이 먼저인 줄 압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고치면 되지 않겠는지요?
토론거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떤 여유시인은 어머니의
입관을 보고서
시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시는 소재가 뮤한하여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