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모양새가 어떻든 일제도 일단 법치주의를 표방하기는 했기에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하기 전에 재판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 제대로 된 변호를 받지 못했고 가혹한 형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해주는 민족 변호사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했던 것은 가인 김병로, 긍인 허헌, 애산 이인으로 이 세 인물의
호나 이름에 ‘인’이 들어가므로 보통 ‘삼인’으로 지칭되었다.
오늘 소개해 드릴 것은 삼인의 하나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가인은 전북 순창(淳昌)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조선 말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金相熹)의 아들이며,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5대손이다.
김병로는 구한말의 거물 유학자인 간재 전우의 제자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란
인물로 신학문을 접하며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인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을사조약이 불법 채결된 1905년에는 최익현의 의병 부대로 들어가 의병 활동을 참여하기도
했으나 의병활동은 간단치 않았고 일제가 ‘호남대토벌작전’이라 지칭한 탄압으로 인해 해산
해야만 했다. 김병로는 이후 무장투쟁보다는 계몽운동 및 자강운동 쪽에 힘을 쏟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이 법이다.
일본대학 및 메이지대학에서 변호사를 목표로 법을 공부하였다.
그가 변호사를 목표로 한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일본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
2.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는 것
3.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을 것
1919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그는 독립운동 관련인들을 위한 변호를 지속했다.
의열단 사건 및 6.10 만세운동, 안창호, 안재홍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변호를 받았다.
김병로 본인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인물이었지만 변호에 있어서는 그런 구분을 두지 않아
조선공산당 사건이나 간도 공산당 사건 같은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도 거절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상옥 사건, 의열단 사건, 6.10 만세 사건, 안창호 선생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수임, 무료로 변호했다.
그 중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일제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 변론은 유명하다. 당시 언론은 가인 선생의
변호에 대해 “조리가 있고 매우 열띤 변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조리(有條理)
최열렬(最熱烈)한 변론’이라고 소개했다.
가인 선생은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 넣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물론 일제가 이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정직처분을 받기도 했고 신간회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결국 1931년부터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도 거부하여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받지 못하는 등 힘겹게 살아가야만 했다.
명망 있던 법조계 인물인 만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이 된다.
이 정도면 나름 권력의 중추가 되고 편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딱히
그렇진 않았다. 가난한 나라였던 만큼 대법원장이라고 대단한 보수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청렴한 성품을 가진 그는 법원의 난방도 꺼가면서 허리띠를 졸라 맸다.
1950년대 어느 날 박봉에 견디지 못한 한 시골판사가 사표를 들고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를 찾아갔다. 가인은 “나도 죽을 먹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라며
만류해 그 판사의 사표를 돌려보냈다.
잉크병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판사들의 호소에 가인은 영하 5도가 되기 전까지는 난방은
꿈도 꾸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법원의 물품을 구입할 때 “다른 관청에서는 다 외제를 쓰는데
우리만 질나쁜 국산을 쓴다”는 직원들의 건의에는 “나라를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관청에서
국록을 먹는 우리가 국산품을 쓰지 않으면 우리 산업은 누가 키우냐”며 타일렀다.
우리나라 판사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는 가인 김병로(1888~1964)는 일제 강점기와
격동의 1950년대 법률가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로 청빈을 신조로 조국과 인권, 사법권의 독립을
실천한 시대의 ’변호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년이 지났다.
김학준이 쓴 ’가인 김병로 평전‘에는 그의 ‘지독한’ 청빈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기름을 때면 다른
법원장 관사에도 기름을 때야 한다”며 톱밥이나 연탄을 썼고 담배 한 개비도 두 토막으로 잘라 피웠다.
손잡이가 부러져 반 토막이 난 도장을 대법원장 도장으로 재임 기간 10여년 동안 사용했고 대법관에게
승용차를 주자는 건의에는 “법관이란 집에서 법원에나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인데 차는 해서 무엇
하느냐”며 거절했다. 비싼 양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었고 직접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정부에서 내려온 예산도 돌려 보내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 앞장섰다.
가인(街人)이라는 아호도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실을
개탄하고 독립을 바라는 의미로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거리의 사람답게 낮은 곳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한 길을 걸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대법원장으로서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의 초안을 직접
담당해 사법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수 있도록 정치권과 경찰, 검찰
등의 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했다.
1954년 독재를 연장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사오입 개헌이 단행됐을 때는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
이라도 그 정신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에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절대권력
앞에서 꼿꼿이 맞섰다. 당시 그를 눈엣가시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이 사표를 요구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응수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요즘과 같은 ‘전관예우’도 가인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번호사업을 접고
1932년 낙향해서 해방될 때까지 그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았다.
1950년에는 골수암 치료 과정에서 한 쪽 다리를 잘라야만 했는데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피난 가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이와중에 아내가 인민군에게 총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반공보다는 인권을 우선시했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는 여러 차례 대립하였다.
그는 판사 회의에서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하여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로는 1957년 정년을 채우고 대법원장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는 퇴임 후에도 재야에서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5.16군사정변 또한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야권통합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병로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1964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1957년 대법원장 퇴임사에서는 ”정의를 위해 굶어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병로 선생은 평생 청령함과 법의 정의를 강조하였다. 대법원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라도
한결같았다. 그러나 후임 대법원장들은 그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심하게는 정권에
아부하기도 했다. 진보당 사건, 사법 파동, 유신개헌 등을 거치며 사법부의 독립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의 정신을 이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민족시인 고 노산 이은상 선생은 가인 선생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요 다음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이시다. 그는 강직한 성격과 청렴한 생활로 일세의
스승이 됐다”
“세상 사람이 다 부정의에 빠져간다 할지라도 우리 법관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하여야
할 것이다.”
-1954년 3월, 제2회 법관 훈련 회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