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안토니안 셰필드(Gary Antonian Shiffield, 1968년 11월 18일 출생)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8개 팀으로 활약한 전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 외야수다.
그는 현재 스포츠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다. 셰필드는 대부분의 선수 생활 동안
좌익수, 3루수, 유격수, 그리고 1루수에서 몇 경기씩 뛰었지만 우익수로 뛰었다.
밀워키 브루어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플로리다 말린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뉴욕 메츠에서 뛰었다. 셰필드는 브루어스 팀의 1라운드 선발로
1986년 플로리다 주 탬파 힐즈버러 고등학교에서 열린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그를 6위로 뽑았다.
그는 오른손잡이 투구를 한다.
셰필드는 2009년 4월 17일 500호 홈런을 쳤다. 셰필드는 지난 경기를 기준으로 볼넷(1,475개), 3위(1,636개),
4위(1676개), 5안타(2,689개), 홈런(509개), 6위(135개)를 기록했다.
셰필드의 타격 스윙은 야만적인 스피드와 핀포인트 컨트롤의 모범적인 조합이었다.
세필드는 높은 홈런에도 불구하고 22시즌 동안 80개의 삼진을 두 번 돌파하는 데 그쳤고,
역대 20개의 볼넷 선두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스포츠 작가 조 포스난스키가
더 무서운 타자가 맞닥뜨린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고 썼다.
그의 첫 번째 감독인 톰 트레벨혼은 게리는 38구경 총알을 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드와이트 구든의 조카다. 은퇴 후, 그는 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객 중에는 전직 구원투수 제이슨 그릴리가 포함되어 있다.
셰필드는 미첼 리포트에 의해 주장되었고, 그의 메이저리그 경력 동안 경기력 향상
약물의 사용과 관련하여 2004년 BALCO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어린 시절]
셰필드는 플로리다 주 탬파에서 태어났으며 폰세 드 레온 프로젝트 근처에 있는 벨몬트 하이츠에서 자랐다.
그와 그의 가족은 뉴욕 메츠의 에이스 투수가 되는 그의 삼촌 드와이트 구든과 함께 살았다.
이들은 야구를 자주 했고 셰필드도 자신보다 4살밖에 위인 구든에게서 직구를 치는 법을 배웠다.
셰필드는 공개적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운동선수로서 그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그의 삶에 상당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셰필드는 리틀 리그에서 좋은 타자였다. 그러나 셰필드에게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계속될 성미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한번은 연습에 늦었을 때 코치가 벤치를 했고 셰필드는 방망이를 들고 온 들판을 쫓아다니며
1년 동안 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셰필드가 11살이었을 때, 미래의 시카고 컵스 1위 선정
타이 그리핀, 미래의 메이저리거 데릭 벨, 그리고 다른 미래의 MLB 선수들이 포함된
벨몬트 하이츠 리틀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팀은 1980년 리틀 리그 월드 시리즈 결승에 올랐지만
대만에게 4 대 3으로 졌다. 그는 브래들리 스미스에 의해 2012년에 깨질 복식 기록을 세웠다.
[고등학교]
1983년 셰필드 감독은 힐즈버러 고등학교 농구팀을 만들었다. 주니어 시절에는 175파운드까지 불어나
투수, 3루수로 활약했다.선배 시절에는 직구가 80대 이상에 달해 홈런 위력을 자주 보였다.
타자로 나선 셰필드는 공식 타석 62개에서 5할 5푼 15리의 홈런을 쳤다.
시즌 말에 그는 게토레이 올해의 국가대표 선수로 선정되었다.
[마이너리그]
고등학교 졸업 후 밀워키 브루어스는 1986년 MLB 드래프트 1라운드 중 여섯 번째 선발로 셰필드 초안을 작성했다.
셰필드는 나중에 1라운드에서 징집되지 않았다면 아마 마이애미 허리케인스에서 대학 야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징집된 후, 그는 파이오니어 리그의 헬레나로 보내졌는데, 그 곳에서 그는 57경기에서 타율 0.365와 71타점을 기록했다.
유일한 문제는 그가 어떤 자세로 뛸 것인가였다. 그는 유격수에서 골을 넣었지만 많은 실수와 거친 공을 던지며
그 자리에서 고전했다. 1987년 그는 캘리포니아 클래스 A 리그의 스톡톤에 배속되어
수비가 향상되고 플레이트에서 생산되었다. 타율은 3할 아래로 내려갔지만 103으로 리그 선두였고,
연말에는 브루어스의 최고 유망주로 뽑혔다. 세 번째 시즌에는 더블A에서 메이저로 진출했다.
엘파소 디아블로스와 덴버의 134경기에서는 타율 0.327에 28홈런 118타점을 기록, 메이저 출전 준비로 평가받았다.
[밀워키 브루어스]
셰필드 감독은 9월 선수 명단 확대와 1988년 9월 3일 메이저리그 데뷔 때 마이너리그에서 소집됐다.
그는 10대 때 첫 안타는 마크 랭스턴과의 홈런이었지만 셰필드가 타율 0.238, 홈런 4개로 시즌을 마쳤지만
빠른 출발을 보였다. 경기 침체 및 몇 번의 부상 후에, 그는 자신이 유격수 선발전에서
빌 스피어스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3루로 옮겨져 흑백 문제라며 팀을 비난했다.
1989년 시즌 말, 타율 0.247로 5홈런 32타점을 기록했다.
1990년에 그는 그들의 타격 코치로 고용된 돈 베일러 밑에서 일했다.
그는 시즌 타율 0.294를 10개의 홈런으로 마쳤다.
그의 플레이가 향상되는 동안, 클럽하우스에는 셰필드와의 문제가 있었고,
화이트 스파이어가 경기하는 유격수에서 그를 연기하는 대신 그를 3위로 잡아둔 후,
이 단체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브루어스와의 마지막 시즌에서 그는 50경기에만 출전하면서 손목, 엄지, 어깨를 다쳤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밀워키에서 4시즌을 보낸 브루어스는
1992년 3월 26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리키 본즈, 호세 발렌틴, 맷 미스케를 트레이드했다.
셰필드는 1992년 5월 12일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삼촌 드와이트 구든과 처음으로 맞붙어 3타수 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첫 올스타 시즌에 트리플 크라운에서 1년 내내 경합을 벌였으며,
홈런(33개 팀 동료 프레드 맥그리프)과 타점(100개, 리더 대런 도튼보다 9개 적은 9개)을 놓치는 동안
내셔널리그 타격왕(토니 그윈이 우승하지 않은 파드레 역사상 유일한 9개)을 차지했다.평균 0.330
1993년 홈런 10개와 타율 .295로 시즌을 시작해 중간 시즌에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플로리다 말린스]
1993년 6월 24일, 리치 로드리게스와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어 트레버 호프만,
호세 마르티네스, 안드레스 베루멘과 거래되었다. 말린스 시절 10홈런, 타율 0.292타, 37득점을 기록한 시즌을 마쳤고,
올스타전에서 NL 선발 3루수로 활약했다. 시즌 막판 말린스는 4년 계약을 해 3루에서 최고 연봉자가 됐다.
1994년 시즌 동안 말린스는 그를 3루에서 우익수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그는 인상적인 팔로 큰 성공을 보여주었다.
셰필드는 1996년 42홈런을 포함해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말린스와 함께 112홈런을 터뜨려 1996년 올스타전에 출전,
199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1998년 말린스가 계약 연장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시 다저스의 모회사인 뉴스 코퍼레이션이 인기 있는 다저 마이크 피아자를 트레이드하는 대가로
말린스와 텔레비전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8년 5월 14일 마누엘 바리오스, 찰스 존슨, 바비 보닐라, 짐 아이젠레이치와 함께
LA 다저스로 마이크 피아자, 토드 질레와 트레이드되었다.
셰필드는 다저스의 타율 .316, 홈런 16개로 57점을 몰아치며 시즌을 마쳤다.
다저스에서 31⁄2시즌 동안 129개의 홈런을 치고 367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는 다저스와 경기하는 동안 3번의 올스타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최고의 외야수가 되었다.
하지만 비수기 때는 다저스가 바보같이 돈을 쓰고 엉뚱한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아
트레이드 로비를 시작했고 감독들과 팀 동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2년 1월 15일, 셰필드는
브라이언 조던, 오달리스 페레스, 앤드류 브라운을 위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브레이브스에서 2003년 132개를 포함해 64홈런, 216타점을 기록하면서 두 시즌을 보냈다.
브레이브스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2003년 10월 27일 긴 선수 생활에서 처음으로 자유계약선수가 되었다.
[뉴욕 양키스]
2003년 12월 19일 셰필드-조지 슈타인브레너 간의 협상 끝에
뉴욕 양키스와 3년간 3천9백만 달러 상당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계약에는 이연금으로 1,350만 달러와 2007년에 1,300만 달러의 팀 옵션이 포함되었다.
데릭 지터, 제이슨 지암비, 새로 영입한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포함된 라인업에 합류했다.
양키스와의 첫 시즌에서 셰필드는 천천히 출발했지만 36홈런, 121타점, 타율 0.290으로 시즌을 마쳐
블라디미르 게레로에 이어 MVP 투표에서 2위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7월 27일, 셰필드는 9회초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미샬 나카무라에게 통산 400호 홈런을 쳤다.
양키스와의 두 번째 시즌에서 그는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34개의 홈런을 치고 123득점을 올렸다.
셰필드는 3할 타율과 30홈런의 페이스로 2006시즌을 시작했고,
그 후 그는 2006년 4월 29일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셰아 힐렌브랜드와 충돌했다.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손목 수술이 필요했다. 셰필드는 9월말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양키스가 트레이드 마감 거래에서 취득한 바비 아브레우에게 제대로 된 야전 일자리를 잃었었다.
이로 인해 셰필드는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에서 처음으로 1루수로 뛸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시즌 말, 양키스는 셰필드의 2007년 옵션을 들어 그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트레이드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편집]
2006년 11월 1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마이너리그 투수 훔베르토 산체스, 케빈 W란, 앤서니 클래게트와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후 셰필드 사는 2년 연장, 2800만 달러에 합의했다.타이거즈와의 첫 시즌에서 그는
25개의 홈런, 75타점, 타율 0.265를 기록했다. 셰필드도 2004년 이후 처음으로 3루타를 쳐
1990년 이후 처음으로 20개의 베이스를 훔쳤다. 그는 또한 알렉스 로드리게스, 그래디 시즈모어,
이안 킨슬러, B.J. 업턴, 커티스 그랜더슨 당시 팀 동료와 함께
최소 20홈런, 20도루를 기록한 6명의 타자들 중 한 명이었다.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 2008년 9월 8일, 쉐필드는 메이저리그에서 25만번째 정규시즌 홈런을 쳤다.
이 홈런은 지오 곤살레스의 만루 홈런이었다.[12] 셰필드는 이전 타석에서 곤살레스를 상대로
한 야구의 249,999번째 홈런을 쳤다. 셰필드는 2008년 시즌을 499개의 통산 홈런으로 마감했다.
2009년 3월 31일, 셰필드는 14만 달러의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에 의해 방출되었다.
[논란]
1987년 셰필드와 그의 삼촌인 MLB 선수 드와이트 구든은
플로리다 탬파에서 경찰과 싸우고 체포에 저항한 후 체포되었다.
다저스 시절 연봉 개선을 요구하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전을 거부하는 등
충분한 재정적 보상과 존중을 요구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2005년 4월 14일, 레드삭스의 팬이 펜웨이 파크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제이슨 바리텍이 친 공을 던지려고 할 때
셰필드에게 정신을 빼앗겼다. 셰필드가 글러브를 들고 그에게 스윙을 한 후 다시 내야로 공을 던진 다음
그와 말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팬 간섭은 불리지 않아 바리텍의 타점 트리플과 동점이 되는 경기가 되었다.
오랜 시즌 티켓 소지자인 이 팬은 펜웨이 파크에서 퇴출되지는 않았지만, 남은 2005년 시즌 티켓을 남은 시즌 동안
어떠한 논란도 피하기 위해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셰필드는 그 사건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팬과 셰필드 둘 다에 대한 고발이 기각되었다.
셰필드(당시 디트로이트 타이거)는 GQ지 2007년 6월호에서 라틴계 야구선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보다 많아
라틴계 야구선수가 더 많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됐다.
내가 한 말은 검은 얼굴을 더 보게 되겠지만 영어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라틴 선수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라틴 선수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우리를 통제할 수 없어.그는 그들은 우리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 고 덧붙였다.
그들을 섬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우릴 돌려보낼 순 없어 우리는 이미 왔다.
셰필드 감독은 2007년 7월 HBO의 레알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양키스 조 토레 감독이
흑인 선수들을 백인 선수들과 다르게 대우했다며 자신, 케니 로프턴, 토니 우맥 등을 예로 들었다.
로프톤은 나중에 다르게 대우받는 것에 대한 셰필드 씨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인종이 동기부여 요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데릭 지터가 혼혈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셰필드는 "그는 흑인이 아니었다 고 말했다.
2008년 9월 19일, 셰필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투수 로베르토 헤레디아 에르난데스
(당시 파우스토 카르모나라는 이름으로 피칭)의 투구를 맞고 1루로 걸어갔다.
에르난데스(카르모나)가 1루로 던지자 셰필드와 말을 주고받았고 셰필드가 마운드에 올라
에르난데스와의 태클을 시도했으나 헤드록에 걸려 몇 차례 머리 꼭대기에 주먹을 날리면서 벤치를 치우는 싸움이 벌어졌다.
에르난데스, 셰필드는 인디언스의 포수 빅터 마르티네스, 타이거스의 2루수 플라시도 폴란코와 함께 퇴장당했다.
9월 22일, 위원회 사무실은 싸움으로 인한 네 번의 정지를 발표했다. 에르난데스는 6경기 출장정지를 받았고
셰필드는 4경기 출장정지를 받았고 마르티네즈와 인디언스의 내야수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는 각각 3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다.
셰필드 감독은 출전정지 이후 인도 출신의 관련 선수들도 그에 의해 페널티킥을 받을 것 이라고 밝혔다.
[스테로이드 혐의]
2001년 배리 본즈와 함께 운동하는 동안, 무릎 수술로 찢어진 실밥을 치료하기 위해 트레이너에 의해
쉐필드의 무릎에 크림을 발라주었다.
셰필드는 자신의 저서 내부 파워 에서 스테로이드가 함유된 크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당시에도 그렇게 가정할 이유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크림이 무릎 강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한 그 사건 이후 그의 수치를 보면 나아질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2007년 12월 13일, 쉐필드는 스테로이드를 입수하여 사용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미첼 보고서에 이름을 올렸다.
Mark Fainaru-Wada와 랜스 윌리엄의 주장에 따르면, 기자들은 쉐필드가 자신과
배리 본드의 개인 트레이너 Greg Anderson으로부터 테스토스테론과
인간 성장 호르몬과 같은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고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또한 앤더슨이 소지하고 있는 스테로이드 달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2001년 시즌 이후 셰필드가 수행하게 될 수많은 스테로이드 사이클을 요약한 것이다.
[개인 생활]
그와 그의 아내 델레온은 플로리다 탬파에 산다. 그들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셰필드는 이전 관계에서 다른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델레온은 복음 녹음 예술가로
옛 양키스타디움과 다저스타디움에서 내셔널 앤섬을 불렀다.
1995년 10월 셰필드는 강도 미수 끝에 왼쪽 어깨에 총을 맞고 신호등에 차를 세웠다.
셰필드의 사촌 데릭 페드로는 밀워키 브루어스 조직에서 외야수로 뛰었다.
셰필드의 친척인 팀 카터는 와이드 리시버로서 프로 축구를 했다.
[팀]
밀워키 브루어스(1988~1991)
샌디에이고 파드레스(1992~1993)
플로리다 말린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8–2001)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02–2003)
뉴욕 양키스 (2004–2006)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2007–2008)
뉴욕 메츠 (2009)
[커리어 하이라이트 및 시상]
9번의 올스타 (1992, 1993, 1996, 1998–2000, 2003–2005)
월드시리즈 우승자(1997)
5번의 실버 슬러거 상(1992, 1996, 2003–2005)
NL 타격 왕(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