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본 장 29장 장차 천하를 취하려 하면서 억지로 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무릇 천하는 신명스러운 그릇이니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그르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사물은 혹은 앞서 나가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뜨겁기도 하고 혹은 차갑기도 하며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꺾이기도 하며 혹은 북돋우기도 하고 혹은 망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한 것을 멀리한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夫天下神器也, 非可爲者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物或行或隨, 或熱或吹, 或彊或剉, 或培或墮. 是以聖人去甚去太去奢.1) 장차 천하를 취하려 하면서 억지로 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여기에서 '이(已)'는 동사가 아니라 어조사다(범응원). "나는 그것이 부득이함을 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천하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는 『노자』의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다. 앞에서 『노자』는 여러 번 이에 대해 조언했다. 바야흐로 천하를 취하려 한다면 언제나 일이 없음으로 해야 할 것이니 만약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취하기에 충분하지 않다(48). 올바름으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는 군사를 지휘하니 일삼음이 없음이라야 천하를 취할 수 있다(57). 이 때문에 성인이 백성 위에 자리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자리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 그러므로 앞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해롭다고 여기지 않고 위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 천하가 즐겨 추존하여 싫어할 줄 모르니 다투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66). 이런 말을 종합해볼 때 천하란 시세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지 억지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음 또는 일삼음이 없다는 것〔無事〕은 곧 무위이며, 무위는 인순과 순응이다. 무엇에 순응하는가? 세상의 변화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때가 무르익어 세상 사람이 모두 환호할 때까지 자기를 숨기고 의욕을 감추며 기다려라. 성왕 문왕이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가지고도 주왕을 섬긴 것이 바로 이런 전략이다. 중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명분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명분은 자기가 주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만들어주고, 때가 만들어주며, 사람들이 만들어준다. 뜻이 있더라도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고, 뜻이 없더라도 명분이 있으면 움직여야 한다. 인순은 명분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이런 명분 의식을 만들어놓았는가? 공자가 만들었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 적자가 두려워하였다(『맹자』 「등문공하」)." 중국을 이해할 때 『춘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명분의 역사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노자』를 이해할 때도 공자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천하를 취할 때 언제나 시세에 순응하라는 교훈은 『노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주희도 지적했다. 도가의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순〔因〕이라는 말이다. 모든 일은 단지 인순하여 행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순이란 사물의 이치〔理〕를 따르고 자기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유자(儒者)의 육경에서 종종 얘기하는 것이니 오직 도가의 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설혜). 이 말은 맞다. 단, 『노자』의 인순과 유가의 인순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유가의 인순은 주희가 말하듯이 이치〔理〕에 따르고, 『노자』의 인순은 도에 따른다. 유가의 이치도 도라고 할 수 있고, 도도 이치라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 함의가 다르다. 유가의 도는 결국 예고, 도가의 이치는 결국 반예(反禮)다. 같은 점도 있다. 유가의 인순이나 『노자』의 인순이나 모두 자기〔私〕를 버린다는 점에서는 같다. 유가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이치를 알 수 있다고 하고, 『노자』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도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노자』는 언제나 시세에 순응하라고 충고한다. 유가에는 설령 시세가 불리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한다면 행동에 옮기는 의식이 있다. 『노자』는 장생구시를 목적으로 하지만 유가에는 성인(成仁)을 위해서는 살신(殺身)해도 좋다는 신념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유가에게도 시세를 따르는 것이 곧 도덕이고 의무다. 시세란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도덕 원칙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유가는 난세에는 반드시 난세를 뒤집으라는 시대의 요청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천하의 공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낙관론이다. 『노자』도 마찬가지다. 난세가 깊으면 반드시 구세의 시기가 온다는 게 『노자』의 믿음이다. "뒤집어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낙관론이다. 유가는 도덕적 의무감으로 행동하고, 『노자』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여 행동하지만 행동의 때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와 도가는 서로 다투게 된다. 시세에 대한 독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가가 한 시대를 태평세로 읽는 동안 『노자』는 똑같은 시대를 난세로 읽는다. 시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것은 그를 둘러싼 이해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이해 관계가 다른 독해를 낳는다. 그래서 결국 이것들은 모두 명분이다. 도든 이치든 명분에 불과하다. 명분의 알맹이는 실리다. 그렇지만 실리를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명분을 소홀히 한다면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리의 추구는 다시 명분을 요구한다. 막강한 명분 의식만이 중국의 특성도 아니고, 막강한 실리 의식만 중국의 특성이 아니다. 이것들이 얽혀 있는 게 중국적이다. 얽혀 있으므로 명쾌하게 실마리를 풀 수 없고, 실마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이 나온다. 어쨌든 주희가 지적하는 대로 인순의 교훈이 『노자』만의 것은 아니다. 또 유가와 『노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자』에도 있다. "그 응하는 것은 억지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움직이는 것은 억지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심술상」)." 『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씨춘추』에도 있다. "천하를 취하려고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없으니 취하려면 몸이 먼저 천하에 의해 취함을 받아야 합니다(「계춘기·선기」)." "옛날의 왕들은 스스로 하는 것은 적었고, 따르는 것〔因〕은 많았다. 따르는 것은 제왕의 술법이고, 스스로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다. 스스로 하면 번거롭고, 따르면 고요하다(「심분람·임수」)." 이런 문장만이 아니다. 더 많이 있다. 무릇 천하는 신명스러운 그릇이니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그르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夫天下神器也, 非可爲者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신기(神器)는 신물로도 옮길 수도 있고(하상공), 지대한 그릇으로 옮길 수도 있으며(오징), 그밖에도 다른 여러 표현이 가능하다. 천하가 한 손에 버럭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묘사라면 어느 것도 좋다.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곤란하다. 신명스러운 그릇은 육희성의 표현이다. "위한다"든지 "잡는다"는 것의 목적어는 천하다. 이설도 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왜 천하를 취하려 할 때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가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왕필에 따르면 "만물은 자연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에 따를〔因〕 수는 있어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다." 사마광은 "억지로 하면 자연을 상하게 되고, 잡으려고 하면 변통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이 말도 좋다. 이 문장은 『회남자』 「원도훈」에도 나오고, 『문자』 「도덕」에도 나온다. 「원도훈」은 이 말을 소개하면서 "천하에 따라서〔因〕 천하를 위한다"는 정치적 교훈을 끌어내고, 「도덕」은 "하나(일)를 잡고 무위하여 천지에 따라서〔因〕 그와 함께 변화한다"는 정치적 교훈을 이끌어낸다. 모두 인순과 순응의 도리를 읽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설명과 맥을 같이한다. 사물은 혹은 앞서 나가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뜨겁기도 하고 혹은 차갑기도 하며,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꺾이기도 하며, 혹은 북돋우기도 하고 혹은 망치기도 한다 物或行或隨, 或熱或吹, 或彊或剉, 或培或墮 갑·을본에서 구할 수 없는 세 글자(吹·或·疆)는 통행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전후의 정황으로 보아 부혁본에 의거하여 보완한다. 범응원에 따르면 엄준·왕필·부혁·완적본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행(行)'은 여기에서 '앞선다〔先〕'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임희일) "앞서 나간다"는 말로 새긴다. '열(熱)'은 원래 '경(炅)'인데, 현재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본문처럼 고친다. '취(吹)'는 숨을 후후 불어서 더운 것을 식히는 것을 의미하며(고형), 그 의미가 확대되어 차갑다는 뜻을 지닌다. 『상이』에서도 이 글자를 차갑다는 뜻으로 보았다. '좌(剉)'는 상하게 하고 꺾는다는 뜻이다(부혁). '배(培)'는 더하는 것, 북돋우는 것이고, '타(墮)'는 떨어뜨리는 것, 망치는 것이다(부혁). 소철에 따르면 이러한 반대되는 성질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은 "사물의 자연스러움이고, 시세가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극단으로만 억지로 발전하려고 하면 자연에 어긋나고 결딴이 난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악한 것이고, 모두 선만 알면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2)"라는 말 등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한 것을 멀리한다 是以聖人去甚去太去奢 하상공은 여기에서 "심한 것"은 주로 성색(聲色)에 관한 것이고, "지나친 것"은 궁실과 누대에 관한 것이며, "사치한 것"은 음식과 복식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해설은 정확하지 않다. 『한비자』에 보면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하상공의 해설과 같지 않다. 하늘에도 대명(大名)이 있고, 사람에게도 대명이 있다. 향기롭고 맛난 음식과 좋은 술, 기름진 고기는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병들게 하고, 고운 피부와 하얀 이의 여인은 정에는 기쁘지만 정기를 해친다. 그러므로 심하고〔甚〕 지나친 것〔泰〕을 멀리해야 몸에 해로움이 없다. 권력을 드러내지 않고 소박하게 무위로 임한다. 일은 사방(신하)에 있고, 요체는 중앙(임금)에 있으니 성인이 요체를 잡으면 사방이 와서 조아린다(「양권」). 계손(季孫)은 선비를 좋아하였고 언제나 몸을 단정하게 하여 거처에서도 의복이 항상 조정에서와 같았다. 그렇지만 계손은 가끔씩은 게을러져 단정치 못함이 있었으니 언제나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객들은 그럴 때마다 자신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여 서로 원망하였고, 마침내 계손을 죽여버렸다. 그러므로 군자는 지나치고〔泰〕 심한 것〔甚〕을 멀리한다(「외저설좌하」). 앞에서는 "심하고 지나친" 것만을 이야기했는데 그 사례로 든 것이 성색·음식이며, 뒤의 고사에서 "지나치고 심한 것"은 지나친 취향을 가리키므로 하상공의 설명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임희일은 이 세 가지가 사실은 한 가지라고 하면서 그 불가함을 강조하기 위해 『노자』가 자주 그렇게 하듯이 거듭 얘기한 것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다른 뜻을 찾으려고 하면서 오독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이 옳다고 본다. 오징이 말한 대로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스러운 것"은 모두 극성한 때를 가리킨다. 결국 극성하면 반드시 쇠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추락할 때를 대비하여 "감히 천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67)"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노자』는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다(58)"고도 하였다. 아마도 이런 교훈은 "끝까지 올라간 용에는 후회가 있다(「건괘」)"는 『주역』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천하를 억지로 취하려는 것과 극성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은 모두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므로 성인이 취하지 않는다는 게 이 글(29)에서 『노자』가 말하는 핵심 교훈이다. 오징은 이 문장과 관련하여 소옹(邵雍)의 한마디를 소개한다. "술을 마실 때는 살짝 취하게 할 뿐이지 명정(酩酊)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 되고, 꽃을 볼 때는 반만 핀 것에 이를 뿐이지 활짝 필 때까지 가서는 안 된다." 향기롭고 맛난 음식과 좋은 술, 기름진 고기는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병들게 하고 고운 피부와 하얀 이의 여인은 정에는 기쁘지만 정기를 해친다 그러므로 심하고 지나친 것을 멀리해야 몸에 해로움이 없다 ―『한비자』 「양권」 각주 1) * 지워지지 않은 부분에서 갑·을본은 서로 일치한다. * 8구의 취(吹), 9구의 혹강(或疆)은 갑본에는 지워져 있고, 을본에는 빠져 있다. 정리조는 부혁·범응원본에 의거하여 이렇게 보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그에 따른다. * 열(熱)은 경(炅: 갑본), 좌(剉)는 좌(䂳: 을본), 배(培)는 배(坏: 갑본)·배(陪: 을본), 타(墮)는 타(撱: 갑본), 태(太)는 대(大: 갑·을본), 사(奢)는 저(楮: 갑본)·제(諸: 을본)의 본 글자이므로 모두 이렇게 고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