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이 참수되어 풍비박산이 난 남명학단이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에게 각각 비명을 받아 세웠던 비석들...
살아 남아야 했던 처절함이 저 묘 앞의 비석들이 증명이라도...
남명 조식은 삼가현(三嘉縣) 토골(兎谷)의 외가에서 서기1501년에 태어났다.
1452년 경재 하연(敬齋 河演)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안동부(安東府)는 " 務農桑 重禮讓節用"(농사와 양잠에 힘쓰고 예의와
절약을 중시한다" . 진주목(晉州牧)은 强敏富麗 崇文好武(굳세고 민첩하며
재물이 풍부하고 넉넉하여 문을 숭상할 뿐 아니라 무도 좋아한다).
조식의 출생지 삼가현의 속상은 "기질이 강하고 사납다(强悍)고 표현하였다.
진주는 남은, 남재, 성석린, 이원, 배극렴, 이직, 하륜, 변계량, 정이오,
정인지, 신숙주, 강맹경, 강희맹 등의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으니 이들을
훈구파(勳舊派)라고 할 수 있는데 외향과 처향을 따라 낙향하여 지방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경상우도는 경상좌도에서 회재 이언적과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과 같은
학자가 배출되기 전에는 인재의 반이 영남에, 영남인재의 반은 우도에서
나왔을 정도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김종직(밀양)을 비롯하여
현풍의 김굉필, 함양의 정여창, 청도의 김일손 등이 있었다.
그 중 조식에게 학문적, 정신적 영향을 끼친 학자는 한유한(韓惟漢),
조지서(趙之瑞), 정여창(鄭汝昌), 이온, 정옥량(鄭玉良),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김안국(金安國)이었다.
조식의 본관은 창녕(昌寧),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
(文貞)이며,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보잘 것 없었던 한미한 사족이었으나 부친 언형과 언경 형제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실직사족이 되었으며 고조모는 현풍의 대성
곽씨이고 증조모는 문익점의 조카의 딸이었다.
더구나 조모는 연산군의 사부였던 조지서의 누이였으며 외가는 고려 벌족인 인천이씨였고 처가는 남평조씨였으며 김해 지방의 큰 부호였다.
이렇듯 그의 가문은 통혼으로 인한 외계(外系)의 경제적기반 혜택으로
인하여 대체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관로로 출사(出仕)하지 못한 것은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을사사화(1545년)을 차례로 겪으면서 숙부 조언경이 기묘사화에 조광조와
같이 희생됨을 목격하며 사로(仕路)의 길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에 스승이 없었으며 독서와 가학이 고작이었다.
불교와 노장, 양명학은 물론이고 병가서까지 두루 수용하였다.
어릴적 서울에서 사귄 교우관계는 일재 이항(一齋 李恒), 숭덕재 이윤경
(崇德齋 李潤慶),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대곡 성운(大谷 成運) 등이다.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거처하며 사귄 인물은 임희무, 박승원, 노진,
강익, 김희삼 등과 교유했다.
조식의 학문적 사상은 한 마디로 경의(敬義)이다.
즉 주경행의(主敬行義)가 될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란 말에서 나왔다.
경상좌도의 퇴계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중시하였으니 도덕적인 원리인
천리와 우주의 이론을 탐구하여 이론적, 형이상학적인 것에 반하여
조남명은 실천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항상 차고 다녔으며 경의검이라는 패검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겨 차고 다녔다.
그는 늘 불교식으로 정좌수행(靜坐修行)을 하여 의기를 함양하고 행의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그가 지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의 현액에서 닭이 알을 품고,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을 발한다는 뜻은 노장의 사상에 심취한 숙세풍교
의 의지처럼 보인다.
그는 당시 주자학에 대하여 이미 퇴계가 이론적 정립을 하자 그에 반하여
성리학적 이론은 이미 주희에 의하여 충분히 제시된 것으로 그 이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고 저술함을 토대로 시시비비를 논할
가치를 못 느꼈으며 이론보다 실천위주와 민생고 해결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학문적 경향이 주자학 일변도에 대한 세태에
불만을 가지고 비난하였으며,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 또한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시하는 풍조에 대하여도 비판하였다.
그의 문하에 정인홍(鄭仁弘)이 경의검을 전수 받아 적전 제자가 되었고
외손서인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와 오건은 퇴계에게도
집지(執贄)하였다.
정인홍은 기축옥사에 삭탈관직 되었고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출처를 비판하였으며 영의정 유연경을 참하라는 상소로 영변에 귀양을
갔다.
임해군 옥사에 이원익과 동문인 정구와도 대립하였다.
77세에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로 유적(儒籍)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되는 갈등을 야기했으며 89세에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 폐모론
주동으로 참형에 처해졌으니 남명의 학단은 풍지박산이 난 것이다.
우선 그는 조식의 문인 오건의 이조정랑 후임을 둘러싸고 동문인 김효원과
훈구척신 심의겸의 대립에서 동서분당에 동인의 편에 섰지만
기축옥사에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하자 동문인 최영경이 옥사하고
김우옹이 귀양가고 자신도 장령에서 퇴출되자 퇴계학단의 서애 유성룡과
반목하여 그 문인 문홍도를 시켜 유성룡을 탄핵하여 실각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이 득세하자 북인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와
가까이 지내며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도산서원에 종향시켰으며,
1604년 남명집을 간행하면서 이언적과 퇴계의 출처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고
1610년 문묘종향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더불어 이언적, 이황이
포함되자 회퇴변척소로 논핵하여 경상좌.우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돌아 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니 정철과 성혼까지 축출하여 서인과도
원수관계가 되었다.
남인인 서애 유성룡을 탄핵하여 축출하고 특히 임해군 옥사에서 동문인
정구와 제자인 정온과도 사이가 멀어져 결국 절교하였으니 그의 사후
그의 제자들은 남인과 서인으로 양분하여 조식의 신도비명을
기호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과 정적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서 각각
위촉 받는 지경까지 갔으니 조식의 문파는 인조반정 이후에 급격히
쇠락하여 발 붙힐 땅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였지만 경상좌도를 대표했던 동갑내기
퇴계 이황의 학문적 태도를 늘 비판하였으며 퇴계의 정신적 스승인 회재
이언적 문묘종향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결국 남인과의 관계에 불신과 반목을
조장하였고 그의 문인인 정인홍으로 하여금 서인까지도 정적으로 만들어
결국은 남명학파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그의 사상과 기상은 대단했지만 학자로서의 언행은 결코 존경받을
그릇이 못됨을 알 수 있다.
대비를 구중궁궐의 한낱 과부라고 한 것이나 명종을 선왕의 어린자식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나 퇴계와 회재의 출처관을 비판한 말들은 결코
정제되고 심사숙고한 군자다운 언사는 아닌 것이니...
도대체 그의 출처관이 어떤 숭고함이 있다는 것인지 퇴계와 회재를 비난할
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학문적 깊이는 저작이 없으니 무슨 학문을 어느정도 어떻게 성취한
것인지도 모를 일인데,,,?
[출처] [공유] 남명 조식의 출처관과 인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