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 썬다씽에 대해서..
사두란 힌두교의 성직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목사직분에 해당된다고 보시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썬다씽은 인도의 사두 집안에서 태어나 티벱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으로 우리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일화를 읽어보면 우리들이 자주 인용하는 많은 말들이 그분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요단강의 비유>는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이야기지요.
어느 날 성지 순례길에 오른 썬더씽은 엄청난 양의 맑은 물이 흐르는 요단강가에 서서 명상에 잠겼었지요. 바로 그 전에 갈릴리 해변가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쫓다가 집채만한 고래 한 마리가 파도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요단강의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은 물고기들의 생동감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썬다씽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이윽고 요단강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 사해에 도착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해는 죽음의 연못입니다. 시간당 수천톤의 맑은 물이 요단강을 통해 흘러 들어가지만 사해에서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살수가 없지요. 썬다씽은 사해의 주변을 살피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요단강과 아르논강을 통해 수많은 물을 공급받으면서도 사해는 단 한 방울의 물도 다른 곳으로 나누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호수의 물은 뜨거운 태양에 의한 증발만을 계속한 덕분에 짜가운 소금의 바다가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
사해가 그 많은 물을 받아들여서 단 한군데도 나누어주지 않았기에 죽어버린 바다가 되고 말았듯 인간의 마음의 바다 또한 다른 이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눌 줄을 모른다면 그 마음은 사랑이 살 수 없는 짜디짠 소금의 바다가 되고 말지요. 일단 마음이 죽게 되면 인간은 능동적인 힘을 잃게 됩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고래처럼 제 아무리 그 몸체가 크다고 해도 죽게되면 파도에 흔들리는 무의지의 헛된 존재로 썩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작은 물고기일지라도 살아만 있다면 그토록 거센 역류일지라도 거슬러 올라 갈 수 가 있는 법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아름답습니다. 바로 살아 있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와 친구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어줄 때야 그 사랑은 살아 있는 사랑이 되고 싱싱하고 보기에 좋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 썬다씽은 우리들의 일상적이며 표피적인 사랑에 많은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그가 이야기 한 강물 속의 자갈 이야기는 이럴 경우 아주 적절한 비유가 되겠지요. 하루는 썬다씽이 강가에서 설교를 하다가 무릎까지 옷을 걷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강 가운데 잠겨있던 자갈돌을 하나 꺼내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무리에게 물었지요.
"이 자갈을 깨트리면 그 안이 젖었을까요, 아니면 말랐을까요 ?"
어떤 이는 젖었을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고 어떤 이는 말라있을 것이라고 대답을 했지요. 썬다씽은 그 자리에서 자갈을 깨어 보였습니다. 방금 강물 속에서 건져 온 돌이었지만 그 속은 깨끗이 말라 있었지요.
그러자 썬다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믿음과 사랑이 많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바로 이 강물처럼 교회마다 믿음이 넘치고 사랑 또한 넘쳐 납니다.
그런데 막상 그 믿음과 사랑의 홍수 속에 잠긴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 돌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이 돌에서 물방울을 짜낼 수 없듯 여러분의 마음에서 믿음과 사랑을 베풀게 하기가 힘듭니다. 베풀지 않는 사랑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의 13절의 말씀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라고 하신 말씀은 짠맛을 잃지 않은 소금으로 남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금 전체로 녹아 희생하라는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는 온갖 사랑이 넘쳐흐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나눔에 있습니다. 자신의 일부를 나누는 희생의 사랑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입니다.
썬다씽은 결국 티벱의 선교 도중 십자가에 매여 화형을 당하고 맙니다.
화형 직전 그의 개종을 요구하며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고문이 가해졌지만 그 분은 오히려 기쁨의 기도로 일관 했습니다.
"주여, 그들이 저의 영혼을 당신께 보내기 위해 무거운 육신을 덜어냅니다..."
믿음에 이 만큼에 이르면...사랑이 이토록 지극하다면 그의 순교가 헛될 리가 없겠지요. 그 분의 순교로 힌두교의 성지 티벱에도 기독교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