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0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안기철 집사 ▶시편찬송 시편42편 다같이 ▶경 독 시편42편 사도행전21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과 함께;“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118편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31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123편 헌 상 안기철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21:15-25① 요한복음 강해(132) 주의만찬 행10:38-43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315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오후 교리공부: “성경과 교리”(27)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31주일 제83문: 천국의 열쇠란 무엇입니까? 답: 거룩한 복음의 설교와 회개를 위해 시행되는 기독교 권징입니다. 즉 이 두 가지를 통하여 천국의 문은 복음 전파와 권징을 통하여 신자들에게는 열리고 불신자들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제84문: 어떻게 천국의 문이 복음 전파에 의하여 열리고 닫힙니까? 답: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즉, 모든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함으로써 천국의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고 공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함으로써 천국의 문은 닫히는 것입니다. 금생과 내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러한 복음 증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제85문: 어떻게 천국의 문이 기독교 권징에 의하여 닫히고 열립니까? 답: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한다 할지라도 비기독교적인 교리를 믿고 비기독교적인 생활을 하고 교우들의 계속적인 권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과 사악함을 끝까지 고집하여 그 사실이 교회의 직임자들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그들의 훈계마저 거부한다면, 그 직임자들은 그러한 자에게 성례참여를 금지(수찬정지)시킴으로써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 참다운 회개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해 보이면 그리스도와 그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
▣성찬본문/ 행10:38-43
『 (행10:38-43)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설교본문/ 요21:15-25
『 (요21:15-2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
▶우리는 지난 2021년 첫 주부터 시작한 3년여 어간, 사도요한과 함께 하는 복음여행의 막바지에 도달했습니다. 이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에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됩니다. 주님은 넘어졌던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처음 부여하신 소명의 자리에 다시 세우십니다. 교회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이 나누시는 마지막 담화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그 진한 여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마지막 담화이야기는 오고 오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 ‘은혜의 복음아래서 안녕하라!’고 복을 빌 게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언약의 백성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디베랴바다 강가에 차려진 주님의 식탁에서 제자들은 조반을 먹었습니다. 이 식사는 성례전적 의미가 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1병1어의 기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그들의 믿음을 도우신 것과 같은 성례전적인 언약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는 지상의 모든 사도적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은혜를 보증하고 실제로 영적인 양식과 음료로 교회를 양육합니다. 교회는 지금도 이 성례의 은혜 안에서 회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습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이 성례전적 은혜가 주는 영속적인 효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예표적 증인이 됩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담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그분이 식사를 준비하시고 그 식사에 초청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버린바 있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공식적으로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믿음과 헌신에 실패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영예와 소명을 사실상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찬의 식사에 제자들을 초청하심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왜 성례가 교회의 표지로 작동하며, 은혜언약의 인(印,seal)과 표(表,sign)로 고백되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언약안에 들어간 신자는 안전합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그들 자신에게서 만회되거나 보상하도록 촉구 받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대하시는 그리스도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자신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행10:41)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예수의 초상입니다.
▶이 복된 식사가 마친 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부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개인적 담화를 나누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사도교회의 기초를 놓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실패와 불신앙은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책감과 제자로서의 열패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처음 베드로를 부르시던 장면을 소환시킵니다.
▶(요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 낯설지만 익숙한(?) 호칭은 베드로에게 무게 있게 다가갑니다. 베드로는 처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고 그분은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개명이 일어나는 사건에는 하나님의 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병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실 때(창17:5),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을 때(창32:28) 아브람의 불순종과 야곱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도 주님은 시몬을 베드로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킴으로서 인간의 어떤 불신앙과 불순종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박해를 받고 마침내 순교의 잔을 마시게 되는 최후의 시간으로 인도하십니다.
▶(요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보십시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과 의지를 상기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을 장차 베드로가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당할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한 현장으로 그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소명을 받던 자리로 이끌고 가고 계십니다. 또한 그의 소명이 성취되는 마지막 자리로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는 항상 실패한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만회하려하거나, 좌절하거나 합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결과이고 또한 현재는 오는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는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특별은총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초청받습니다. 처음이라는 과거와 미래의 마지막 시간으로 말입니다. 그 사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투쟁하면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에 흔들리고 넘어지면서 이 길을 갑니다. 그러나 신자의 모든 지상적 방황과 실패는 그리스도의 승리 곧 십자가와 부활안에 수렴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 전부터 지상교회를 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계02:0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우리는 ‘종말은 창조를 앞선다!’는 개혁파신학의 격언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실패와 좌절과 연약함은 미래의 파국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증명하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가 됩니다.
▶갈릴리 바다의 기적 중에 하나를 떠올려보십시오.(눅8:22-25;마8:23-27)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던 중 큰 풍랑이 일어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외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주님은 배 고물에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지만 그렇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 배는 침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의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있는 신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가 그리스도를 3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고 돌이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부인한 후 닭울음 소리와 함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마26:75)하였을 때 그의 영혼은 표류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작가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살려면 붙어 있으라! 가을비에 흠뻑 젖은 낙옆 마냥 바닥에 쩍 달라붙어 있으라! 비질을 해도 당췌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옆처럼 붙어있으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말씀과 성례)가 신자를 적심으로 우리가 아니라 그 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어있게 하는 것입니다.
▶(시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랑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차례에 걸쳐 사랑을 묻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차례에 걸쳐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 세 차례에 걸친 담화는 분명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과 데자뷰를 이룹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을 다시 언급하심으로 그의 상처난 양심에 소금을 뿌리지 않습니다. 그를 난감하고 망신스러운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실패의 원인을 온유한 방식으로 교정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의 상처 난 양심에 길르앗의 향료를 바릅니다.
▶이 세 번에 걸친 주님과 베드로의 담화는 수많은 해석과 상상(?)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과 답은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온전히 회복시켜 그 처음 소명의 자리로 세우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다시 부각시켜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는 듯 한 거친 해석은 이 대화가 이끄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본문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요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사랑’(아가파오)와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필레오)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스콧) 그럼에도 요한이 다른 단어로 표현한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아람어로 나눈 대화였을 것입니다. 아람어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처럼 다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기록하면서 이 대화의 흐름과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 번째 반복된 질문에서 베드로는 당혹해합니다. 아가파오로 질문하시던 주님이 필레오로 질문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앞의 두 고백의 진정성을 물으시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 베드로의 고백 |
아가파오 | 필레오/오이다 |
아가파오 | 필레오/오이다 |
필레오 | 필레오/기노스코 |
베드로의 답도 역시 세 번째 답에 특이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을 주님이 아신다고 고백하면서 첫째(15절)와 둘째(16절) 고백에서는 ‘오이다’(oida,인지하다,이해하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셋째 고백(17절)에서는 ‘기노스코’(ginwvskw,경험적으로 인지하다, 사귐에 따른 앎)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왜 세 번째 고백에서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할까요? 분명 세 번째 대화는 다른 뉘앙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노스코라는 단어는 앞의 단어보다 훨씬 내밀한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은 이제 그리스도 한분을 향한 그의 단독자로서의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 사람들보다’(touvtwn,중성복수대명사,than these)라는 말은 문법상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①“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②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③“이것들(배와 그물, 혹은 생선따위)보다”
그러나 문맥상 첫째 해석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베드로의 고백과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믿음과 사랑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탁월한 믿음과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경쟁적이고 비교우위에 따른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헌신과 충성심에 의해 입증되고 주장되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탁월한 사랑, 가장 많은 사랑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고 배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유일한 존재를 향한 유일하고 독특한 사랑만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더 혹은 덜 사랑하는 일에는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나름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나 사물과의 관계는 일정한 질서를 형성하고, 이것이 우리들의 가치관에 따라서 그 우선순위에 따라 순차적 서열을 이룹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아내나 자식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소유인 물건 중에서도 없어져도 그리 불편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물건이 있지만 손때 뭍은 물건은 집안을 뒤집어서라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도 그게 없어졌다고 해서 아쉽고 속상할 지라도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대상화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다른 무엇과 비교되거나 견줄 수 있는 비교가치가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고 목적이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랑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사랑처럼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나 무엇과 비교되어 더 나은 사랑이 아닙니다.
▶일본은 선교역사(1550년부터)에 비해 복음화율이 1퍼센트도 안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막부시대에 극심한 기독교박해가 있었을 때 소위 ‘후미에’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예수상이나 십자가를 밟아 기독교인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선교사는 수많은 일본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밟습니다. 형제사랑과 하나님사랑이 충돌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인의 신적사랑이 휴머니즘으로 변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의 개방과 함께 기독교박해가 그치게 되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실한 신자를 찾는 것은 매우 희귀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결코 비교될 수 없고 교환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고, 절대적인 분이시기에 어떤 경쟁관계도 우선순위 논쟁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온전하고 배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질문은 궁극적으로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과 분리시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결코 집단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고, 그는 단독자로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이전에 마16장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대해 신앙고백한 것은 공교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공유하며 고백해야하는 신적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결코 획일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전체 담화의 뉘앙스는 결국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소명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요한의 소명과 자신의 소명을 비교하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른 제자와 상관없이 ‘너는 나를 따르라!’고 강조하십니다.(요21:21-22)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배타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아06:0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43편
1. 오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나님,
당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우리의 명분을 판단하는 일을 마침내 시작하옵소서. 우리는 당신에게 참된 예배와 순전한 신앙을 바치려고 노력하며, 따라서 그것은 선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친히 우리를 사악하고 타락한 사람들로부터 구출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교회의 위로와 힘과 토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당신의 이름과 고백과 가르침에 부족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긍휼은 회개하고 당신에게 돌아오는 자들의 모든 부정과 숨겨진 죄악을 사하시는 긍휼이며, 그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위들을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빛과 진리에 참여하게 하셔서, 여기서 우리가 거룩한 회중들 속에서 순전한 예배를 당신에게 올려드릴 수 있게 하시고, 이후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이 거하는 거룩한 장소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지금 우리의 영혼은 슬프고 낙심되며, 두려운 생각들로 우리 마음이 거듭 심란하며, 공포로 인하여 우리의 위장은 내부로부터 심하게 울렁거립니다. 선한 아버지여,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취선을 소망할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지난 후에 참으로 그러하듯이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가 얻은 구원을 즐거워하며 당신을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