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칠봉산(506m) 회암사지 답사 [G10] - 2
일자: 2014년 11월 22일(토) 8~14도 비내린 후 흐림
트레킹 코스: 양주/동두천 칠봉산(506m), 천보산(423m), 회암사지
참가자(2명): 요산대장, 후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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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 대도사
11:51 매봉(응봉)
12:13 깃대봉(칠봉정 정자)
12:23 석봉
12;27 6.25유해발굴지역(1호)
12;30 투구봉
12:32 헬리포트
12:37 말봉(발리봉)
12:41~13:24 정상(돌봉) 점심
13:30 솔리봉 (수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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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51장림고개 MTB용 육교
14:12: 천보 25보루
14:14~26 천보산정상 (423m) (사과)
14:29~30 망경대 (명품소나무들)
14:48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모조비
14:50~58 회암사
15:06~31 회암사지전망대에서 해설사 해설 청취
15:42 회암사지입구 버스정류장
16:05 덕정역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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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장림고개 MTB용 육교에서
회암사(檜巖寺)의 역사
회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12세기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말~조선조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말 인도의 구승 지공(指空)이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현재의 인도)의 나란타 사원과 같기 때문에 이 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그 수기에 다라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또한 조선초에는 무학(無學)이 회암사 의주지가 되었으며, 태조(太朝)도 왕위를 이양(移讓)한 후 이 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효령대군(孝零大君),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비롯한 많은 왕실 인물들이 불사(佛事)를 후원하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고승들이 주석(住席)함에 따라 국가적 차원의 비호를 받는 최대의 사찰로서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회암사지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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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고개 육교
MTB 표지판을 여러개 보다 내리막에 장림고개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해발 300m. “오토바이 진입금지‘표지판이 다리 진입로 옆에 서 있다. 지금은 천보터널이 뚫려 꼬불꼬불 옛길은 탐방로로 변했다. 조망은 역시 안된다. 플래카드가 걸린 ”에코유 캠프파크“가 다리 동쪽 바로 아래에 있다. 다음지도에는 ’인디언조이 캠핑마을’로 나온다.
육교 아래 서쪽으로 옛고개길(앞)과 천보터널을 빠져나와 난 379번 도로가 보인다
지난해 여름 캠핑파크 문 열어
지난해 8월 캠핑장을 연데 이어 12월 눈썰매장을, 금년 6월 물놀이장을 열었다고 한다. http://www.ecou.co.kr (경기 동두천시 탑동동 495-3 / TEL: 070-8839-3700) / 비수기 주말 5만원, 평일 4만원 / 성수기 7만원 / 수영장, 눈썰매장 등 시설이 좋아 보인다.
다리 난간은 MTB를 상징하는 산악사이클리스트를 형상화해 놓았다. 인증샷 한 장씩... 지금은 터널이 생겨 겨울에 눈이 내려도 위험하지 않다.
379번 시도 북동쪽으로 가면 동두천 불현동이 나오고 남사쪽으로 내려서면 양주시 회천동이 나온다.
육교 동쪽으로 지난해 여름 연 캠핑파크... 지붕과 건물이 이국적인 분위기
철모르는 진달래
다시 전진. 진달레가 봄인줄 알고 봉우리를 피운다. 철모른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듯 한데 날씨가 봄이니 어떻게 하나요?
천보 25보루
천보지맥이 의정부 녹양역까지 계속된다. 고구려때 축성된 천보 25보루 (해발 420m). 천보산 보루군중 꽤 큰 것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해 놓았다.
운무 걷히는 천보산(423m) 정상
곧바로 양주 천보산(423m) 정상이 나온다. 의정부 북쪽 통신쌍철탑이 있는 봉우리도 천보산이라고 한다. 운무가 슬그머니 걷히면서 주위 능선과 양주 옥정택지지구, 발아래 회암사, 회암사지가 나타난다. 늦게 나마 보상을 받는 듯 싶다. 또 다시 서로 인증샷 한 장씩... 다부진 부부가 배낭을 빵빵하게 매고 녹양역에서부터 오는 중이란다. 둘이서 다니는 걸 보면 부럽다. 송대장은 취미가 같으면 삶이 더욱 풍부할 거란다.
정상석 뒷면에는 ...
운무가 약간 걷히어 남쪽으로 뻗은 천보지맥 능선이 보여
서남쪽 회암사로
우리는 서남쪽 회암사(800m)와 회암사지(1.5km)로 가기로 했다. 사실 지난 4월 부모님 산소를 갔다가 포천 어하고개에서 여기서 남쪽 1.4km 지점 회암고개(투바위고개)까지 왔다 회암사지를 들렀기에 이곳 칠봉산을 오고 싶었다. 그런 차에 송대장이 필자에게 번개를 친 것이다. 그래서 쉽게 응할 수 있었다.
사진작가들 유혹하는 망경대 명품 소나무들
조금 게걸음하듯 서쪽으로 걸어가는데 명품 소나무들이 나온다. 송대장은 카메라를 대보란다. 여러 컷을 잡 보았다. 나중에회암사지에서 해설사에 들은 얘기인데 이 명품 소나무를 찍으러 오는 사진 작가들이 많다고 한다. 이 자리가 서울을 바라보는 망경대(望京臺). 이태조를 두고 한 거라며 당시는 서울이 개경(정종은 다시 개경으로 서울을 옮김)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거란다.
회암사, 나옹을 기리는 선각왕사비, 회암사지가 한 눈에 들어와... 필자는 무학대사비 자리를 선각왕사비로 잘 못알아
108바위
나옹 추모하는 선각왕사비
명품 소나무를 뒤로 하고 아래 고개를 보니 큰 비가 서 있다. 그래서 두갈래 등로에서 북쪽 등로를 택했다. 내려가보니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죽은지 1년만에 선각왕사 나옹(1320~1376)을 위한 추모비인데 파손되어 그 앞에 모조비를 세워놓아 보였던 것. 천보산과 능선이 멋지게 둘러져 있다.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나옹은 다음의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선사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惜兮(료무애이무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론 한글로 쓴 것은 아니지만 한글로 번역해 놓은게 더 명품.
토속신 셋을 모시는 회암사 삼성각으로 내려가
대웅보전(가운데), 관음전(왼쪽), 조사전이 한 컷에
나옹선사, 지공화상,무학대사 부도, 비 등이 위아래로 나란히
맨 위에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계단을 한참 내려와 인도 출신 지공화상의 부도와 석등, 비석, 그 아래에 무학대사비와 부도, 석등을 볼 수 있었다. 해설사가 설명 듣기 전이라 그렇게 좋은 자리로 여기지 못했다. 모두 문화재다.
나옹화상 부도와 석등은 시간이 촉박해 올라가지 보지는 못했다.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자 이 폐허가 된 회암사를 중창한 선사이고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이자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며 이 태조가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 정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곳이었다.
나옹의 인도인 스승인 지공선사의 사리탑, 부도, 비 뒤로 계단을 오르면 나옹선사의 부도와 사리탑이 나와
무학대사 비 자리는 국내 5대 명당 중 하나
해설사는 무학대사비 자리가 우리나라 5대 명당중 하나라고 한다기에 그 비로 착각하고 그 쪽으로 잘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무학대사 비는 회암사 남쪽 언덕에 있는 거란다. 삼성각으로 내려와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협시로 부처님을 양쪽으로 모신 대웅보전, 자비의화신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으로 내려왔다. 독경소리가 크게 들린다.
우리는 조사전과 “회암사(檜巖寺)현판이 걸려있는 요사채를 지나 남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회암사는 고려시대 3대 사찰 중 하나.
회암사지로 내려가는 말끔하게 포장된 길
회암사지 전망대에서 해설사 해설 들어
우리는 회암사지 전망대로 내려왔다. 전망대 옆 양주문화관광안내소를 들여다 보았더니 여성 두 분의 해설사가 앉아있다. 천보산 정상에서 전화했더니 5시까지만 오면 된다고 친절 200%였던 해설사가 반갑게 밖으로 나와 맞는다. 남순자여사. 경력을 물으니 몇년 됐다며 말을 자른다.
역사 얘기는 잘 알테니 구체적으로 하지 않겠다며 소나무와 명당자리 얘기부터 꺼낸다.
망경대 이야기
소나무 명품 얘기는 앞에서 했다. 소나무만 찍기 위해 오는 분도 많다고 한다. 청계산 망경대는 조준 동생인 조견(휘)이 개성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망경대인데 이 곳 망경대는 태조가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곳.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아드님께 태조가 여생을 회암사에서 보내겠다며 작은 궁을 하나 지어달라해서 여기서 머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후대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 일제시대 경(京)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을 바라보셨다고 하는데 실제하고는 맞지 않단다. 태조가 이곳에 나올 때는 정종이 한양에 못있겠다 해서 개성으로 옮아간 때이기 때문이란다.
열심히 설명하는 남순자 문화관광 해설사
폐사 전 회암사의 전각들
명당 무학대사 비 자리
망경대에서 서울을 볼게 아니라 무학대사 부도자리를 봐야된다고 알려준다.
풍수가들의 필수답사 코스란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5대 명당자리 중 하나. 거기서 바라보이는 무학스님 부도자리가 가장 잘 보인다는데 의식하지
못하고 내려왔다. 오히려 선각왕사비가 또렷이 잘 보였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때 한 중국 풍수가가 이 나라를 와 보고 이렇게 좁은
조선땅에 이렇게 좋은 명당자리가 있었느냐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명당이란 좋은 기가 올라오는 곳. 그래서 기가 막히면 죽기 때문에 기를
뚫어준다고 한다. 기를 충분히 받아 수험생이나 아픈 사람을 안아주면 기가 전달된다는 말이 있다. 내 기가 전달되면 그 사람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양주는 기가 많아 자주 오면 좋은 곳이란다. 무학의 아들이 있었다면 한자리
했겠지만 중이라 아들 없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명당도 사람의
그릇이 맞아야
일예로 지금 여주 세종대왕릉 그 자리가 광주이씨 선산이었는데 조선초 꽤 명문가
집안으로 지관이 절대 봉분 만들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는데 세도가집에서 안만들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만들었는데 세종릉이 경기도
광주에서 천장하려고 땅을 보는데 지관이 돌아다니다 비가 와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하다 이 광주 이씨 묘를 보았는데 명당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씨보고 선산을 옮기라고 하고 이곳에 세종대왕릉을 썼다고 한다.
혹시 광주이씨 집안에서는 명당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순조 때
후손 이응진씨가 부친이 돌아가시니까 지관을 통해 이곳 무학대사비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고 한다.
무학대사비
자리에 다른 사람 묘
그런데 회암사 절은 명종과 선조 사이에 폐사된 곳. 폐사지인데 명당자리라
무학대사 부도를 끌어내리고 이곳에 부친 묘를 썼다고 한다. 그 자리에 묻힐 큰 그릇이 아니면 큰 화가 온다는 말이 있는데 후에 이를 알아채고
이응진에 대해 사형 등 논란이 많았으나 전례가 없어 귀양보내고 무학대사비를 복원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또 하나의 명당
남연군 묘
명당에 관한 얘기는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 묘를 잘 써 아들 고종과 손자인 순조
임금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고 고속도로 낼 때 박대통령의 선친 묘자리를 그대로 두어 손녀 박근혜 대통령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다.
무학대사 비
주위 소나무들
무학대사 부도 주위의 소나무가 바람따라 기울어져 있어야 하는데 부도쪽으로
모여있는 것도 예사일이 아니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양주가 크게 서울의 인접했음에도 발전 안된 이유는 군부대 때문이라고 남해설사는
얘기한다. 남여사는 “제일 좋은 명당은 절이 차지하고 그 다음 명당은 부대가 차지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잠실, 노원, 도봉구등 모두가 ‘62년까지 양주였지만 서울로 편입되었고 잠실,
중랑구, 구리 등이 다 양주 아니었냐고 반문한다.
평양감사는
안해도 양주목사는 하고 싶어 해
그래서 조선시대 기생까지 갖춘 평양감사(도지사)는 안해도 양주목사(군수)는 하고 싶어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던 곳이란다.그래서 양주가 중요한 위치라고 강조한다.
회암사는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여말에 나옹선사가 중창했고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후원을 받던 사찰이다. 특히 이성계는 숭유억불 정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내 놓고 여생을 여기서 마치려고 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격이 높은 사찰이었다.
세종때 작은형 효령대군이 중이 되었는데 주로 이곳에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세종은 불교를 축소했으나 작은 형님 효령이 계신 이 곳은 땅을 주거나 노비를 주는 등 후원을 잘 해 주었다고 한다.
살아서
국왕의형, 죽어서 불자의형: 양녕대군
효령대군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불사를 짓는데 양녕대군이 역시 들에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절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되지 않소」하니 양녕이 말하기를「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5·6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세종28년:병인
1446)>
무차 법회와 문정왕후
궁에서 후원하는 가운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는 불교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분이
보우스님을 회암사에 주지스님으로 보내 크게 더욱 번창하게 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종의 장자 인종이 독살됐다고 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는데 즉위
8개월만에 죽자 문정왕후는 친 아들이 명종 임금이 되었으니 건강한 세손 탄생을 위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보우 스님을 통해 무차라는 법회를 하도록 했다. 당시 보우 스님이 입은 가사적삼이 중국 황제가 입은 옷보다 더 화려했으며 탱화 400점을 내려보냈는데 그 중 100점은 금을 입혔다고 전한다. 얼마나 화려하고 치밀하게 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란다.
그런데 내일 무차대회가 끝나는데 오늘 문정왕후가 돌아가셨다. 장례치르고 난 후
5달 후 유생들이 회암사를 없애라, 보우를 처형하라며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보우는 제주에 귀양갔다 피살되었다. 그리고 회암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회암사 터에 불에 타다 남은 큰 종이 있는데 그것을 녹여 화포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글이 실록에
처음으로 한 줄 나왔다는 것이다. 그 당시 폐사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란다. 그래서 명종과 선조 사이에 폐사됐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나서 순조 때 회암사 부도 얘기가 나온단다.
회암사지에 태조
위한 정청 건물 추정 장소
회암사지는 현재 10,000여평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가 중심
사찰로 비로나자불을 모시는 보광전이 있던 곳. 관음상 십척짜리와 함께 15척짜리 비로나자불을 모셨다고 전한다. 굉장히 큰 사찰로 지름이
30cm 인 청동 풍경을 봐도 알 수 있단다.
담장 있던 곳이 정청 건물지. 태조께서 저기에서 머무셨나보다. 여기서 수막새
청기와 등 임금님이 기거하는 곳에 사용되었던 기와 편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림의 19번과 20번. 태조와 무학대사가 돼지, 부처로 보인다는
환담을 했던 곳이 아닌가 한다.
혜문스님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
궁궐에서 회암사에 하사한 금도금한 탱화 100점 중 6점이 현존하는데 4점이
일본에, 한점이 보스턴대에, 남은 한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혜문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하는 분으로 보스톤대에 있는 한점을
가져오려고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공스님과 나옹스님 사리가 같이 모셔져 있어 반환 운동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보스턴대측은 사리는 몸의 일부이니까 주겠는데 고려시대 것인 사리구는 못주겠다고 하여 밀당을 하고 있다고 한다. 회암사지
박물관에는 모조품 한 점이 걸려있다고 한다. 우리측은 다 돌려달라는 것이다. 무학스님 부도와 함께 훼손된 것. 나옹선사는 밀양으로 귀양가는 중
병이 나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강가 삼층석탑지가 다비식 한 곳.
당간지주 너머로 양주 천보산(423m)이 보여
회암사지를 한참 내려와 본 칠봉산(506m:왼쪽)과 천보산(423m) 능선
양주시에 문화관광 해설사가 11명이란다. 내년 3월 G10 공식 탐방 때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해설사의 얘기를 듣고서 정문에서 78번 버스를 타고 덕정역에서 전철을 탔다. 6시 30분 미금역에서 세번째 모임에 합류해 저녁식사를 했다.
P.S. 전철 속에서 82세 노인이 한반도 5대 명산 으로 첫째 평안도 묘향산(1,909m), 둘째 백두산(2,744m), 셋째 금강산(1,638m), 넷째는 함경도 길주에 있는 칠보산(907m), 다섯째가 지리산 (1,915m)이라고 알려준다. 보이스카웃을 49년 하셨다는 이노인네는 다 올라가 보았다며 칠보산은 사람이 진흙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고 설명해 주신다.
이 노인은 자신도 젊었을 때 산을 많이다녔다고 한다. 산 같이 좋은게 없다며 젊어서 부지런히다니라고 조언을 해 주신다. 도봉산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후묵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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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린 후의 맑은 산-- 천보산 그리고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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