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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에 대한 총22부작 다큐인데 관심있으신분 시청해보세요^^
(1950년 11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유엔군 3만여 명과 중공군 7만여 명(전투병 6만명이상, 7개사단)이 격돌한 장진호전투)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0BDRJ_Qc-0&list=PLoB3gj5gCeL_MsxZvhuUrFO--CvuoyE_h&index=5
#3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에서 스탈린의 덪에 걸리다 "그들을 위한 전쟁" (장진호 전투 3부) [소피니언 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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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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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6chC2zcpcQo&list=PLoB3gj5gCeL_MsxZvhuUrFO--CvuoyE_h&index=6
장진호전투 #맥아더 #미육군#4 맥아더가 만들어 놓은 군벌 "나의 야망, 나의 군대" (장진호 전투 4부) [소피니언 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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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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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업로드)중국군의 참전 "가난한 군대가 싸우는 법" (장진호 전투 7부) [소피니언 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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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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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장진호 전투', 그 참혹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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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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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 중국에게 포위 당한 미국 | 1950 미중전쟁 2부 충돌 [다큐 인사이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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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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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 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3부작 - 2부 충돌 (2020.7.16 방송) 1950년 11월 말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 영하 30도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세계 3대 동계전투 중 하나로 꼽힌 장진호 전투. 미 제1해병사단이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은 7개 사단의 중국군에게 포위당해 2주간 격전을 벌인 전투다. 1950년 가을부터 1951년 봄까지 반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중 간 대규모 충돌을 장진호 전투와 군우리 전투를 통해 들여다본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1k97RyDO0YE
장진호 전투의 복병, 영하 40도의 강추위 | 1950 미중전쟁 2부 충돌 [다큐 인사이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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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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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u88ahaTBuS4
내 생의 최악의 날 [다큐 인사이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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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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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voakorea.com/a/korea_korea-politics_korean-war-special/6032295.html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VOA는 어제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한국전쟁의 의미와 시사점을 되돌아 보는 기획보도를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작전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드립니다. 김동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유엔군 3만여 명과 중공군 7만여 명이 격돌한 장진호전투의 참전용사를 일컫어 미국에서는 장진의 일본어 발음과 소수의 생존자만 돌아왔다는 의미를 따 ‘초신 퓨’ (Chosin Few)로 부릅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605
출처: https://namu.wiki/w/%EC%9E%A5%EC%A7%84%ED%98%B8%20%EC%A0%84%ED%88%AC
2.1.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장진호에는 미 해병대 1사단, 미 육군7사단 소속 1개 연대전투단, 영국 코만도 1개 대대 등 총병력 3만 명이 동원된다. 일단 병력은 중공군과 비등했고, 화력은 압도적이었으며, 항공 지원은 일방적이었다. 허나 지휘관의 경우 중공군은 펑더화이-쑹스룬이라는 환상의 콤비였고, 연합군은 무조건 진격만 외치는 맥아더와, 그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알몬드라는 환장할 콤비였다.
2.1.1.1. 제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
한국전쟁 당시 제1해병사단의 병력은 25,323명이었으며, 여기에 한국 육군 통역 110명과 한국 전투경찰중대 1개 중대가 있었고, 미 육군과 달리 미 해병대에는 편제표상 한국인 카투사는 없었다.[17] 여기에 별도로 미 해병대 제1사단을 직접 지원하는 미 해병항공단과 해병군수단을 합쳐 약 1만명 가량 된다.
즉 병력 면에서는 장진호의 미 해병대 2만5천 + 미 육군 4천5백 + 영국 해병코만도 300명 = 유엔군 총 3만명으로, 중공군(제9병단 기준) 12만명과 4배 정도 차이가 났다.[18]
2.2. 중국 인민지원군 편제
국공내전 시기까지 전형적인 중국 인민해방군 사단은 예하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편제되었다.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고, 다시 3개 사단이 모여 1개 군을 이루었다. 이렇게 3개 하부단위가 모여 1개 상부단위를 구성하는 편제를 삼각편제라고 하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에서는 이를 '33제'라고 불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공내전 막바지인 1949년 2월에 일제히 단대호를 정리하면서 이 33제에 맞춰 순서대로 배정했기 때문에, 단대호만 알면 어느 부대인지 추정이 매우 쉬웠다. 예컨대 1950년 10월 운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1사단에 일격을 가한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는 제13병단 제40군 제120사단 제360연대였다.
중략
그러나 1950년에 연이은 부대 재편 과정에서 제9병단의 실제 전력은 이런 33제의 틀을 벗어나 한층 강화된다. 우선 1월에 제30군이 해체되고 지휘부를 해군으로 보내면서, 예하의 3개 야전사단(제88·89·90사단) 중 제88사단은 제26군에, 제89사단은 제20군 예하로 편입된다. 이어 6·25 전쟁 참전이 결정되자 1950년 10월에는 제32군을 해체하면서 남은 제94사단을 제27군에 배속시킨다. 이를 통해 제9병단 소속 군들은 4개 사단씩을 거느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 사단의 전력도 보강한다.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각 연대도 1개 대대씩을 추가 배속시켜 4개 대대 편성으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제9병단의 편제는 '44제'(1개 군당 4개 사단, 1개 연대당 4개 대대)라고도 한다. 또한 수 개월의 참전 준비 과정에서 국민혁명군 출신 병력을 대거 충원하여 사실상 인력 면에서는 완편에 도달하였다. 이로 인해 제9병단 예하 12개 사단들은 국공내전까지 1개 사단당 6500~8500명 내외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숫자 상으로는 크게 양호했다. 각 사단들은 평균 1만2천명 가까운 규모였고, 예하 연대들도 3500~4000명 정도였다.
20군-27군의 8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장진호 서쪽에서 공격, 1개 사단은 동쪽에서 공격, 2개 사단은 하루 늦게 도착하여 장진호 남쪽의 보급로 차단 임무에 투입되면서 6개 사단이 1차로 동원되었다. 예비 부대인 제89사단은 우선 1개 연대만 제59사단에 배속되어 투입되었다가 제20군 전력이 급감하면서 추후 전 사단이 증원된다.
12월에 들어서서 미군의 기세가 확실하게 꺾이자, 쑹스룬은 병단 예비대였던 제26군 병력까지 본격적으로 투입을 명령한다. 12월 1일에 투입 명령을 내릴 때는 단 2일 만에 전선으로 전개하여 12월 3일부터 전 군이 미군의 탈출을 봉쇄하라고 지시했지만, 혹한 속에서 이동 수단이 부족하고 길도 헤매는 바람에 실제로는 4개 사단 중에 제76·77사단의 2개 사단만 12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62]
이들 제20·27군 소속의 8개 사단 및 제26군 소속의 2개 사단까지 도합 10개 사단은 전투 투입 시기에 상관 없이 격전에 휘말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최근 나오는 중국측 자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실제 투입된 사단을 총 10개 사단으로 집계한다. 반면 오히려 서방측 자료에서는 최근까지도 정확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투서열 파악을 못하던 관계로, 이들 제26군 예하 부대를 장진호 전투가 거의 끝날 무렵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참가 부대에서 누락시켜 6~7개 사단으로 축소 집계하는 경우들이 있다.
3. 장진호의 UN군과 중공군은 몇 명인가?
미군 제10군단은 당시 예하 병력이 육군 제3·7 보병사단, 제1 해병사단, 한국군 2개 사단(제3·수도사단)과 적지만 다양한 국가의 UN 참전군으로 편제되어 10만3천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순수하게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병력만 따지면 제1 해병사단 전체와, 제7 보병사단 예하 3개 보병대대와 제57야전포병대대, 영국군 코만도 부대 900명으로 보는게 합당하다. 당시 미 해병부대는 지상병력 1만5천명 외에도 주로 지상 지원을 하는 공중포대 개념의 제1 해병항공대와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해병·해군 부대를 합쳐 1만명이 더 있었다. 즉 UN군 측에서는 해병대 2만5천 명에 미 육군과 영국군의 병력을 합해 총 3만명 정도가 투입되었다.
간혹 미 육군과 영국군, 해병항공대와 후방부대까지 몽땅 제외시켜서 제1 해병사단 1만5천명만을 넣거나, 또는 이 가운데 전투 및 전투지원부대 1만2천명만을 넣어 UN군과 중국군의 병력 격차를 크게 보이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병력 상당수가 항공대와 후방지원부대인 미 해병대의 특성을 무시한 것으로 잘못된 집계이다.
한편 중국측을 보자면,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제9병단 3개 군(제20·26·27군)의 총 병력은 약 15만명이었다는 것이 2000년대 이후 중국측 자료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정설이다. 제9병단은 출병 준비를 하면서 무장과 피복 등 보급품은 여전히 부족했으나 최소한 병력 숫자만큼은 다른 중국군 사단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보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기본적으로 3-3 편제 ― 즉 각 군이 3개 사단으로 구성되고 각 연대가 3개 대대로 구성 ― 였으나, 제9병단은 4-4 편제 ― 군당 4개 사단, 연대당 4개 대대 편성 ― 로 재편되었다. 말하자면 제9병단의 각 군에는 4개 사단 × 3개 연대 × 4개 대대 = 48개 보병대대가 배속되었다. 야전 지휘관들에게도 최소한 병력 보충은 충분히 해줄테니 희생을 걱정하지 말고 몰아붙이라는 명령이 하달될 정도였다.
이러한 병력 보강으로 인해 평균적으로 각 군은 약 5만명, 각 사단은 1만2천명, 각 연대는 3천5백~4천명의 병력 수준을 맞추고 있었다. 가장 구체적인 숫자를 수록하고 있는 중국측 자료는 《혈전장진호》(2000, 충칭출판사)로, 여기서는 장진호 전투에 돌입할 당시의 제9병단 병력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63]
첫댓글 개마고원 끝자락에 엄창난 지하자원이 묻혓잇는데,고원 속에는 얼마나 묻혀 잇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