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史 한씨(韓氏)는 그 세보(世譜)의 출발점을 기자조선(箕子朝鮮)(기원전(前) 115년)으로 적고 있다. 기자조선과 마한(馬韓)시대를 지배했던 고왕족(古王族)의 후예인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1대를 30년으로 계산한다면 1백회 이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해 온 3천년 노거수(老巨樹)인 셈이다. 한씨는 이렇듯 뿌리가 깊으면서도 정확한 득성(得姓)의 연원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한씨(韓氏)의 세보(世譜)에 따르던 중국(中國) 당(唐)나라 주왕(紂王)의 숙부였던 기자(箕子)가 은(殷)나라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망하자 조선(朝鮮)으로 나와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후조선(後朝鮮)(일명 고조선(古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한씨조선(韓氏朝鮮))을 건국한 뒤 자신을 문성왕(文聖王)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9백29년 만인 41대 애왕(哀王)준(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전북 익산군(益山郡))에 도읍을 정하고 마한(馬韓)을 세웠지만, 이 마한도 1백 77년 만인 9대 계왕(稽王)(기원전 17년)에 이르러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에게 망한다. 이때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평(友平)·우량(友諒) 우성(友誠)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로 귀의해 우평은 북원(北原) 선우(鮮于), 우량(友諒)은 상당(上黨)(지금의 청주) 우성(友誠)은 행주(幸州)) 기(奇)씨가 되어 이때부터 한씨의 성(姓)이 비롯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선우,·한. 기씨는 모두가 기자의 한 핏줄을 받은 후예로 지금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오늘의 청주한씨는(淸州韓氏)는 우량(友諒)의 31세손인 지원(智原)의 네 아들 중 셋째의 한 란(韓 蘭)은 청주한씨의 시조가 된다. 한씨의 본(本)은 당초 청주를 비롯해 곡산(谷山), 평산(平山), 안변(安邊), 한양(漢陽), 당진(唐津) 등 10여 개로 분관(分貫)했으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환보(還譜)되었다. 시조 한 란韓 蘭)의 아래 대에서 30여 파로 갈렸다. 그중에서도 번창하기는 양절공(襄節公)(한확(韓確)), 문정공(文靖公)(한계희(韓繼禧)), 충간공(忠簡公)(한리(韓理)), 몽계공(夢溪公)(한철충(韓哲?)), 관북(關北) 예빈윤공(禮賓尹公)(한연(韓連)), 충성공(忠成公)(한명회(韓明澮))파(派) 등 6파로 이를 통칭〈한씨(韓氏)6파〉라 일컫는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시조 한 란(韓 蘭이고려태조가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종군, 삼한(三韓) 통합을 이룬 공으로 고려 태위(太尉)에 올라 왕실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권문(勸門) 거족(巨族)으로 등장했다. 특히 고려조와 조선조 전반기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 고려조에 명인(名人) 14, 조선조에 상신(相臣)(영의정(領議政), 좌(左을)·우의정(右議政)) 13, 왕비(王妃) 6 부마(駙馬) 4, 공신(功臣) 25, 대제학(大提學)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자·문필·서예가를 남겼다. 몽고 침략기에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려의 대표적 무장으로 여(麗)·원(元)연합군의 일본(日本) 정벌에 선봉장으로 활약한 한희유(韓希愈), 고려말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함경도 일대의 여진(女眞) 격퇴에 앞장선 한방신(韓方信)은 애초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오른 문무(文武) 겸전의 인재였다. 충렬왕 때 원(元)에 사절로 다녀와 ‘고금록(古今錄)’을 저술한 한 강(韓 康)은 당시 고려 외교계의 중진. 공민왕 때 외교가이자 시인이었던 한종유(韓宗愈)는 예술을 사랑했고 그 자신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였던 공민왕의 남다른 아낌을 받았는데 술에 취하면 으레 ‘양화사(楊花辭)’를 읊조려 당시의 문인들은 그를 양화도(楊花徒)로 불렀다는 풍류담이 전해 온다. ‘유항시집(柳巷詩集)’을 남긴 한 수(韓 脩)도 시문과 글씨로 당대 일류의 평을 들었던 인물. 이들중 고려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13세손 한철충(韓哲?)은 고려가 이성계(李成桂)에게 멸망하자 “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끝까지 벼슬을 거절했다. 그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는 후손들에게 충절(忠節)의 표상으로 빛난다. 조선조 전반기의 한씨일문(韓氏一門)은 크고 작은 정치적 변혁과 역사적 사건에서 권력구조의 핵심세력으로써 위세를 떨친다. 조선 개국초 시조 한 란(韓 蘭)의 12세손 한상질(韓尙質)은 태조의 주문사(奏聞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조선(朝鮮)」이란 국호(國號)를 전해받아 온 인물.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주인공 한명회(韓明澮)의 조부(祖父)가 된다. 한상경(韓尙敬)은 한상질(韓尙質)의 동생으로 태조의 개국에 공을 세워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후에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겸 영경연예문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藝文春秋館觀象館事), 세자사(世子師),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올라 한씨문중(韓氏門中)이 조선조에 충성을 다짐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또 그의 애종심(愛宗心)이 출천(出天)하여 한씨(韓氏)중흥을 이룩한 거목(巨木)으로 이(李)태조 이후 한씨(韓氏)의 번연(繁衍)을 이룬 검교참판공(檢校?判公), 문양공(文襄公), 문정공(文靖公), 참판공(參判公), 양평공(襄平公)의 할아버지가 된다. 한명회(韓明澮)는 조선조 한씨(韓氏) 융성의 큰 길을 연 인물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 단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물리친 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고 세조에 이어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남이(南怡)의 옥사(獄事)」사건 등 4차례의 크나큰 역사적 사건의 중심 세력으로 활동한 인물. 한씨일문(韓氏一門)이 그에게 힘입어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고 명문세가(名門世家)의 반석 위에 올랐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불리는 수양(首陽)의 쿠데타와 그 이후〈새질서〉형성에서 한명회(韓明澮)를 중심으로 한씨일문(韓氏一門)이 적극 가담해 10촌 이내의 친척만도 17명이 조정 핵심부에 등장한다. 영의정(領議政)을 비롯해 좌(左)·우의정(右議政)에 오르거나 판서(判書)를 지내는 등 참판(參判)급 이상의 요직에 오름으로써 난공불락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다. 한명회(韓明澮)가 영의정(領議政), 한 확(韓 確)이 좌의정(左議政), 한 확의 조카 한치형(韓致亨)이 다시 영의정…. 한명회(韓明澮)는 조선개국에 참여하고 태학사(太學士)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였으나 젊어 뜻을 얻지 못하고 경덕궁(景德宮)지기의 말직에 있었다. 그러다가 왕위 찬탈의 야심에 불타 천하의 책사(策士)·장사(壯士)들을 수하에 모으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만나게 된다. 수양은 한명회의 지모와 책략에 놀라「나의 장자방(張子房)(장량(張良))」이라며 심복으로 손을 맞잡고 쿠데타를 모의하여 성사시켰다. 그의 아들 보(堡)와 딸 넷은 모두 권력의 핵심이던 왕실, 세가와 연혼(連婚)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됐고, 둘째딸은 그와 함께 수양(首陽)의 쿠데타에 주체세력이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신숙주(申叔舟)의 맏며느리였고, 셋째, 넷째 딸은 각각 예종(睿宗)·성종(成宗)의 비(妃)가 된다. 한명회(韓明澮)의 손자 한경침(韓景琛)은 또 성종의 부마로,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조선 왕실과 두 겹·세 겹의 인연으로 얽혔다. 한씨(韓氏)가의 혼인을 통한 세력기반은 중국(中國)에까지 연결된다. 세조조의 좌의정(左議政) 한 확(韓 確)은 누이 둘이 명(明)에 들어가 큰누이는 명세조(明世祖)의 후궁(여비(麗妃))이 됐고 작은누이는 선종(宣宗)의 후궁이 됐다. 이 인연으로 그는 명에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의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다. 그의 딸은 또한 세조의 맏아들 덕종(德宗)의 비가 되어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낳았다. 덕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었으나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는 왕의 외조부가 됐다. 이같은 확고한 세력 기반 위에서 융성을 구가한 한씨(韓氏) 집안은 또 많은 학자·문인들을 배출했다. 세조의 아낌을 받아 덕종의 스승이 되기도 했던 한계희(韓繼禧)는 당대의 석학으로 최 항(崔 恒)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등 편찬사업에 중심인물로 참여했다. 그의 후손 한백겸(韓百謙)은 선조조에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한 실학의 선구자. 그의 9대손되는 한원진(韓元震)은 영조 때〈강문(江門)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성리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어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를 저술했고 문집 ‘남당집(南塘集)’을 남겼다.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우리 역사 연구에 힘써 ‘해동석사(海東釋史)’71권을 편찬했다. 조선 최대의 명필가 한석봉(韓石峰) 역시 한씨가(韓氏家)의 큰별. 그의 이름은 한 호(韓 濩),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조선서예사의 쌍벽을 이룬 서예가로 그때까지의 중국(中國)의 서체·서풍을 모방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우미전아(優美典雅)한 석봉체(石峰體)를 창시, 지금도 그의 ‘석봉서법(石峰書法)’·‘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이 전해진다. 정조조의 한 구(韓 構) 또한 명필로 꼽혀 그의 글씨체가 구리활자로 만들어져(한 구자(韓 構字)) ‘낙당집(樂堂集)’, ‘동강집(東江集)’등 저술이 인쇄되기도 했다. 그림에선 한종유(韓宗裕)가 있다.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정조대(正祖代)에 이름을 날렸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이같이 화려한 영화의 뒤안길에서 고려말의 한철충(韓哲?)처럼 권세와 시속을 멀리 하고 깨끗한 성품을 지키며 산수간에 숨어 사는 은둔 초탈의 한 흐름이 있다. 한씨(韓氏) 영화의 터를 닦은 한명회(韓明澮)의 손자 한경기(韓景琦)는 일찍부터 뜻을 버리고 평생을 산수간에 노닐며 시와 글을 짓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공신의 큰 손자라 하여 조정에서도 남다른 배려를 했으나 그는 한사코 번거로운 벼슬살이를 피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못할 일이 없었던 할아버지에게 느낀 바가 있었음인지, 당시 함께 어울린 탈속(脫俗)의 선비들과 함께〈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며 보헤미안적 시와 풍류로 일생을 살았다. 그래서 한국(韓國)의 이태백(李太白)으로 불리기도 했던 특이한 인물이다. 인조 때 포천(抱川)의 인적드문 산기슭에 은거하며 요봉사(繞鳳寺)의 스님으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다는 한세량(韓世良) 또한 숨은 현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을 것을 미리 내다보고 방비를 하도록 상소했으나 조정이 믿지 않자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라 화를 면했다고 한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나자 인조는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해 그를 남양군수(南陽郡守)로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고 산간에 숨어 천문·지리·역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쳤다 한다. 성종조에 특히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써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한형윤(韓亨允)도 청주한문(淸州韓門)의 인물이다. 연산군3년에 문과에 급제, 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참판(參判)을 지내고, 이듬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만경(萬頃)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풀려나와 다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으며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청백리(淸白吏)에 록선되었고, 효헌(孝憲)의 시호가 내려졌다. 중종 때의 한승정(韓承貞)도 청빈으로 후세의 귀감이 되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 벼슬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으나 죽었을 때 장례 치를 비용조차 없었을 만큼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한숙창(韓叔昌)·한 순(韓 恂)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각각 판결사(判決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선조 때의 한 준(韓 準)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고발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썼으며 사자관(寫字官)을 지냈다. 시호는 정익(靖翼). 한 교(韓 嶠)의 호는 동담(東潭), 벼슬은 고성군수(高城郡守)·참판(參判)·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朗廳)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에 나서 공을 세웠고, 인조반정에 참가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성리학(性理學)과 병학(兵學)에 통달한 학자였던 그는〈동담집(東潭集)〉·〈가례보주(家禮補註)〉·〈사칠도설(四七圖說)〉등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손자(孫子)〉·〈오자(吳子)〉등 병법칠서(兵法七書)와 비견되는 병서(兵書)〈기효신서(紀效新書)〉를 주해(註解)하였다. “님은 갔습니다/아 아/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제치고…”란 ‘님의 침묵’으로 이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시혼(詩魂)을 심어준 일제시대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근세백년(近世百年) 최대의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로서 3·1운동 서명자 33인 중의 한사람이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섬세한 언어로 절정의 시상(詩想)을 표현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인도의「타고르」와 비교되고 혹은 사라져버린 그의 호적(戶籍)처럼 승계자가 있을 수 없는 독존(獨存)의 경지로까지 찬탄되기도 한다. 그는 28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하자 중국에 망명, 항일투쟁에 뛰어든다. 3·1운동에 불교계를 대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3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국내의 항일 통일전선 신간회(新幹會) 창설에 활약, 중앙집행위원과 서울지방부장을 맡아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혼을 지킨 불굴의 투사였다. 문둥이 시인, 천형(天刑)의 한(恨) 속에서 인생의 절망과 슬픔을 담은 ‘보리피리’의 주인공 한하운(韓何雲) 역시 한씨(韓氏)의 일문(一門)이다. “보리피리 불며/봄언덕/고향 그리워 필-닐니리…” 자신의 불행했던 생애를 시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야말로 보릿대 같은 인생이었다. 중국 북경(北京)대학을 졸업, 경기도청에 근무중 나병에 걸려 방랑의 길을 나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소록도로 가는 길에 읊은 그의 ‘전라도 길’은 언뜻 황톳길 같은 역사를 걸어 온 이 민족의 비애를 보는 듯하다.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해방 후 서훈을 받은 한씨(韓氏)가의 인물들로는 의병대장 한봉수(韓鳳洙)·한상렬(韓相烈)과 독립운동가 한 훈(韓 焄)·한필호(韓弼浩) 등 52명에 이른다. 상해(上海)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한위건(韓偉健)·한남수(韓南洙)·한기악(韓基岳) 등도 민족 자주독립의 밑거름이 된 한씨 일족. 특히 의병대장 한봉수(韓鳳洙)는 구한말 청주(淸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삼국(三國)지방을 돌며 일본군(日本軍)과 33차례나 전투, 일본군 70여명을 사살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소위 한일합방 경축특사인 합방대사(大赦)로 풀려났지만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무려 50번이나 일본경찰에 체포됐을 정도로 끈질긴 투쟁에 일생을 바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구한말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있다. 1905년 일본(日本) 특명전권대사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한국(韓國)의 외교권을 빼앗는 보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완용(李完用) 등 후세에 이르러 오적(五賊)으로 불리는 친일파 대신들에게 대항하여 이를 끝까지 반대하다 참정대신(參政大臣)의 신분으로 일본헌병에 의해 구금까지 됐던 애국지사이자 정치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했던 그의 기품은 오늘에까지 빛난다. 한말 독립운동과 사회사업 활동에 헌신한 한 흥(韓 興)은 한씨일문(韓氏一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12년 간도(間島) 명동(明東)학교 강사로 잠시 근무하다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 통신원으로 일했다. 1920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투옥, 5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新幹會)의 멤버로 항일구국의 길을 걸었다. 1929년 함흥중앙(咸興中央)학원 설립을 시작으로 1943년 숙명여자실업(淑明女子實業)학원장을 지낼 때까지 육성사업을 통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한글학자이자 언론이던 한 징(韓 澄)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한씨(韓氏)집안,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징역형을 받고 옥사, 순국(殉國)했다. 상해(上海)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월봉(月奉) 한기악(韓基岳)선생은 초기 한국언론계의 인물이다. 보성(普成)전문학교를 졸업,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창설 당시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시대일보(時代日報) 편집국장, 조선일보(朝鮮日報) 편집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4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출처 야후 더골드 http://cfs12.planet.daum.net/upload_control/pcp_download.php?fhandle=M3pOY2pAZnMxMi5wbGFuZXQuZGF1bS5uZXQ6LzEyMzczNjkxLzEvMTAxLmFzeA==&filename=Atti070113-1.asx type=application/octet-stream enablecontextmenu="0" autostart="true" AllowScriptAccess="never" volume="0" loop="-1" invokeURLs="false">
[출처] 청주 한씨|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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