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은 안수 집사님이었는데 예수님을 전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스테판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왔으며 공회 앞에서 변론하고 있습니다.
스테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야기 후에 요셉 이야기를 하는데, 야곱에게는 아들이 열두 명이 있었고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11개의 별이 자기한테 절하는 꿈이고 그의 형들 10명은 이 꿈 때문에 그를 더 미워하여 그를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팔렸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가 갇혀 있는 감옥에 이집트 왕 파라오의 신하 두 명이 갇히게 됩니다.
많은 날들이 지난 후에 파라오의 신하 두 명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받아서 그들의 꿈을 해석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직위에 복귀하고 한 사람은 죽게 된다는 해석이었고 요셉의 해석처럼 한 사람은 사형당하고 한 사람은 복직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어느 날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감옥에서 복직된 그 신하가 감옥에서 만난 요셉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파라오의 앞에 가서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였습니다.
그 꿈의 해석은 앞으로 7년간 풍년이 들어 풍성하게 거둔다는 것이고, 7년의 풍년 이후에 7년의 흉년이 들어 곡식을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한 후에 흉년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모았다가 7년 흉년 때에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지혜로운 자를 선택하여 이 일을 맡겨야 한다고 조언하였으며, 파라오는 요셉만큼 지혜로운 자가 없다면서 요셉을 총리로 세워 줍니다. 이집트에 팔려서 감옥에 있던 요셉은 가장 높은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말대로 이집트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 안에도 7년 흉년이 들고, 그는 그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척 75명을 이집트 땅에 살게 데려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약속된 땅은 이집트 땅이 아니라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이집트에 살지 못하고 언젠가 가나안에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때가 가까이 온 것에 따라 그 백성이 성장하고 증가하게 되었습니다(행 7:17).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이집트에 왕으로 일어난 때까지입니다. 요셉 이후에 400년이 지나서 왕조 자체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행 7:18). 새로운 왕조는 과거의 역사적 인물인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조였습니다.
그들의 종족을 교활히 다룬 이가 그 갓난아이들을 살려두지 않기 위해 그들의 조상들을 학대하였습니다(행 7:19).
사도행전 7장 20-22절에 “그 시간에 모세가 낳음을 받았으며 그가 그 하나님께 아름다우며 그 아버지의 집에 3달을 기름을 받았으나. 밖에 놓인 그를 파라오의 딸이 취하고 그녀 자신에 그를 아들로 길렀고. 모세가 모든 지혜로 훈련되었으나 그 말과 행위들에 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스테판이 모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인데,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인 사람입니다.
산헤드린에 모인 자들은 그 역사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테판은 바로 그 이야기를 꺼내 사실은 그들이 역사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들이 조상들의 많은 잘못된 전철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스테판은 본문에 모세 이야기를 통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다른 조상보다 모세를 특별히 자랑했습니다.2) 그런데 모세는 훗날 있을 예수님을 미리 예고한 표상(type)입니다.3)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발랐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실 십자가의 표상이었습니다.4)
성경은 세월의 격차를 두고 살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놀랍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메시지로 일관합니다. 여러 표상이 있고 때와 저자가 달라도 모두 같은 대형을 가리킵니다. 표상들은 저마다의 방식에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이루어 가시면서 같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5)
모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상들에서도 최대의 표상일 것입니다. 산헤드린이 배척하고 부인하는 예수님의 표상이 모세인 것입니다.6)
모세를 기르셔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원자를 탄생시켜 기르셨습니다(행 7:20).7)
하나님께서는 그 작정하신 시간에 구원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조급하며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하고 짜증을 내나, 구원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깁니다.8)
모세가 태어난 때에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도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표상이었습니다.9)
파라오의 딸이 그를 취하고 그녀를 위해 아들로 길렀습니다(행 7:21). 이 일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고 그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은 것입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난 때에 모두 강물에 던지라는 파라오의 명령 때문에 모세가 파라오의 딸에 의해 건짐을 받고 왕의 집에 살 수 있은 것입니다.
모세가 지혜로 훈련되었고 말과 행위들에 할 수 있었습니다(행 7:2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지혜와 키(stature)에서 증진하셨습니다(룩 2:52).
1. 모세가 40년 동안 왕궁 안에 살고서 망명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29절에 “그에게 40년의 기간이 채움을 받았을 때에, 그의 형제들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방문하기가 그의 마음 위에 올랐으며. 그가 잘못 행함을 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때려 복수를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구원을 주시는 것을 형제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다가오는 날에 모세가 싸우는 그들을 평화 안으로 화해시키며 말하기를, ‘너희는 형제들인데, 무엇 때문에 너희가 서로 잘못 행하느냐’라고 하나. 그 이웃을 잘못 행하는 자가 모세를 밀어제쳤으며 모세에게 말하였기를, ‘누가 심판자로 임명하였느냐? 나를 해치울 것을 바라느냐’고 하였으나. 모세가 이 말 안에 도망하였고, 그가 미디안의 땅 안에 외국인이 되었고, 그가 아들 둘을 낳은 곳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방문하기가 그 마음 위에 오른 것인데(행 7:23). “방문하다(visit)”가 우리 성경에 “돌보다”로 번역됩니다.
“방문하다(visit)”는 말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에 사용되었습니다.10)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방문하셨으며 구출을 행하셨습니다(룩 1:68). 하나님의 자비의 심장들 안에 동방이 높은 곳에서 방문합니다(룩 1:78). 동방의 떠오르는 해와 같은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방문하다”는 말은 항상 ‘돕거나 구조하려는 목적’을 함축하고 있으며, 풀어주고 해방시키고 고치고 자유롭게 만들려고 방문하는 것입니다.11)
모세는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전공을 세운 지휘관이었다고 합니다.12)
예수님의 표상인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7).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련되는 진리입니다.13)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모세가 그림자로 가리킨 실체를 발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방문하여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14)
그는 잘못 행하여짐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때려 복수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장 11-12절을 언급한 것입니다(행 7:24).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구원을 주심을 그들이 알지 못합니다(행 7:25). 모세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가오는 날에 모세가 싸우는 그들을 평화 안으로 화해시켜 말하기를, ‘너희는 형제인데, 무엇 때문에 너희가 서로 잘못 행하느냐’고 말합니다.
그 이웃을 잘못 행하는 자가 모세를 밀어버렸으며 모세에게 말하기를, ‘누가 심판자에 임명하였느냐? 나를 해치울 것을 바라느냐’고 말합니다.
모세가 이 말로 인해 도망하였고 그가 미디안의 땅에 외국인이 되었고 그가 아들 둘을 낳은 곳입니다(행 7:29).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의 현장에 나갔습니다.
모세는 그 형제들을 구원하러 갔으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밀어버리고 배척합니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영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역에서는 완전하게 눈멀어 있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었으므로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노예 신세로 전락한 현실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15)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사탄의 권세와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노예로 전락한 다른 형제의 숨통을 겨누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16) 자신의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죄는 마음을 어두워지게 만들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게 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이유는 마음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17)
본문의 히브리인은 모세가 그를 해치우기 바란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자에 대해 오해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인간의 적이라고 말합니다.18)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개입하시는 것도 싫어합니다.19)
사람들은 하나님의 간섭을 부당한 간섭이라고 느낍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들의 구원자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몹시 싫어합니다.20)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버리고 고난의 현장에 함께합니다. 예수 크리스트께서도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세를 배척한 것과 같이 예수 크리스트를 배척합니다. 이와 같은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자 예수 크리스트를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외에 다른 이 안에 구원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행 4:12).
2. 모세가 40년 동안 황야 안에 살고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30-34절에 “40년이 채워진(had passed) 뒤에, 그에게 시나이 산의 황야에 천사가 가시덤불의 불의 불꽃에서 보였으나. 그 모세가 바라본 때에 그가 그 광경을 기이하게 느꼈으나 주의하기 위해 그의 접근하는 동안 주의 음성이 생겼으며(came). ‘너의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나 전율한(tremble with fear) 모세가 감히 주의하지 못하였으나. ‘너의 발의 그 신발을 풀라, 너의 선 그 장소는 성별된 땅이기 때문이라.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의 학대를 보았고 그들의 한숨을 들었으며 그들을 빼내러 내려왔고 너를 이집트로 파송하노라’라고 하셨노라”고 말하였습니다.
“40년이 채워진 그에게”는 모세가 80세가 된 때를 뜻합니다(출 7:7). 모세가 80세 때 하나님께 사명을 받는 출애굽기 3장의 내용을 말합니다.
모세가 목자로 살던 40년이 채워진 뒤에 천사가 보였습니다(행 7:30). 천사가 시나이 산의 황야에 가시덤불의 불의 불꽃 가운데서 보였습니다.
모세는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망도 버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도하였지만 나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개입하시는 구원의 때가 있습니다.21)
모세가 바라본 때에 그가 그 광경을 기이하게 느꼈으나, 주의하기 위해 그의 접근하는 동안에 주의 음성이 생겼습니다(행 7:31).
모세는 호기심에 끌려 그 현상을 잘 보기 위한 욕구를 느꼈습니다.22) 그는 가시덤불에 불이 붙어 있는데 타지 않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그는 가시덤불 속에서 나오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23)
‘너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나 모세가 전율하였으며 감히 주의하지 못하였습니다(행 7:3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역사를 알고 있던 모세는 이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한 것입니다.2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분명히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셨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므로 하나님의 시간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25)
‘너의 발의 그 신발을 풀라 너의 선 장소는 성별된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7:33).
사람이 수억 만 마일 떨어진 장소나 수억 만 년의 시간에 대해 말해도 자신이 얼마나 자고 의미 없고 한계가 있는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26) 사람이 자신의 발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이집트의 나의 백성의 학대를 보았으며 그들의 한숨을 들었으며 그들을 빼내러 왔고 너를 이집트로 파송하노라’고 하셨습니다(행 7:34).
나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살 때에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시간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나의 이상을 이루려는 집착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꺾여야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보십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질할 때 지켜보십니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고 물속에 가라앉아 죽으려고 할 때에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독립을 위해 어떤 투쟁도 할 능력이 없었을 때에 그리고 모세에게 있어서도 이집트의 권력이 사라지고 “내가 누구이기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할 것입니까?”라고 할 때에, 그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출 3:1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학대를 보시고 그들의 한숨을 들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빼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는 하나님께 와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3절의 영어 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떼로부터 헤매는 낯선 자일 때에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이 작사한 것입니다. 복의 근원 예수님께서 한숨 쉬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3. 모세가 40년 동안 황야 안에 교회에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35-43절에 “이 모세를 하나님께서 통치자와 구속자로 그 가시덤불 안에 그에게 봄을 받은 그 천사의 손 안에 파송하신 것이라. 이집트와 홍해와 황야에서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한 이가 끌고 나왔노라. ‘너희의 형제들에서 나와 같이 예언자를 일으키시리라’고 말한 모세라. 이가 이야기하는 그 천사와 함께 그 황야 안에 그 교회 안에 생겨난 자며 그는 살아 있는 신탁들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받은 자라. 그에게 우리의 조상들이 순종하게 되었기에 바라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이 밀어버렸으며 그 마음들 안에 이집트 안으로 돌아섬을 받았으며. 그 아론에게 말하였기를 ‘우리를 위해 우리의 앞서 갈 신(神)들을 만들라 우리를 끌고 나온 이 모세에게 무엇이 생겼는지 알지 못함이라’고 하고. 그들이 저 날들에 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제사를 데리고 올라갔고 그들이 그들의 손의 행위들을 기뻐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돌아서셨고 그들을 하늘의 군대에게 섬기기에 넘겨주셨으니 그 예언자들의 책 안에 기록된 것에 따라서니(as), ‘희생 생축들과 희생 제사들을 너희가 나에게 황야 안에 40년을 바쳤고. 너희가 그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神) 렘판의 별자리를 집어 올렸느냐 내가 너희를 바벨론의 저쪽에 이주민을 옮기겠노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예수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행 7:35). 모세는 예수의 예표자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 미리 표현된 것입니다. 스테판의 선포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치자와 구속자로 보내셨듯이 예수를 통치자와 구속자로 보내신 후에 군주와 구주로 높이신 것입니다.
모세가 기적들로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기적들로 흑암의 왕국으로부터 인도하셨습니다(행 7:36).
모세가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끌어낸 것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갈대의 바다를 갈라 주셨는데 기적이었습니다.27)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부활 때까지 기적이었습니다.28) 처녀에게 나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게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며 초자연적 기적입니다.29)
모세는 기적들을 행하여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자입니다.30) 예수님께서도 지옥을 멸하시고 믿는 자들을 자유롭게 만드십니다.31)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와 같이 예언자를 일어나게 하실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 7:37).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이 일으키실 “그 예언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였듯이 그도 그와 같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여러 면에서 모세와 같은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불모의 땅을 지나는 순례자인 나를 안내해 주소서
나는 연약하나 주는 강력하시니 주의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소서 (찬송가 377장 전능하신 주 하나님)
윌리엄 윌리엄스가 작사한 찬송가 377장인 “전능하신 주 하나님”인데 위대하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나를 안내해 주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나를 안내해 주소서”라는 부분은 생략되었습니다.
세상은 불모의 땅이며 나는 이 메마른 땅을 지나는 순례자인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안내해 주셔야만 이 메마른 땅을 통과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안내해 황야를 통과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에(Him) 들어야 합니다(신 18:15, 행 7:37). 복음 전파 목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한 것에 있습니다.32)
사람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모른다는 사실에 무관심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점이 어리석은 것인데, 사람들은 절대적인 사실과 현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33)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삶이 항상 비극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참혹한 실패를 겪는 이유를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람이 손질하기는 하지만 마지막 형태를 빚는 이는 신(神)이십니다.34)
우리가 예수님께 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인 질문에서 철학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무지합니다.35)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장려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위한 준비 작업을 목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36)
모세는 율법을 가르쳤고 또한 장차 있게 될 일도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당대의 문제 외에 장차 있게 될 일도 알려 주었습니다.37)
구약성경 전체와 사도들이 예수님께 들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도들을 변화시키셔서 놀라운 자들로 만드셨는데 이 사도들이 그분께 들을 것을 권하니 우리는 그분께 들어야 합니다.38)
예수님께 들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죄 용서의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의 성취가 되시는 분이십니다.39)
예수님께 들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들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 때문입니다. 또 그분의 말씀뿐 아니라 그분의 행동 때문에 그분께 들어야 합니다.40)
우리는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들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고 말씀도 하셨습니다.4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류가 창조된 의도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류는 과학 지식은 많음에도 자신에 대한 진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개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모습과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좋게 바뀌지 못하는 존재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42)
모세가 이야기하는 그 천사와 함께 그 황야 안에 그 교회 안에 생겼고 그는 살아 있는 신탁들을 우리에게 넘겨주려고 받은 자입니다(행 7:38).
이가 그 교회(congregation) 안에 생긴(was) 자며 시나이 산 안에 그에게 이야기한 그 천사와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였으며 그는 살아 있는(living) 신탁들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황야 안에 그 “교회”였습니다.43) 모세는 “황야 교회”에 있었습니다.44)
그 교회의 날 중에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과 함께로부터 요구한 것인데 스테판은 신명기 18장 16절에 사용된 “교회”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황야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황야 안에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신탁(oracle)”(로기온)은 “말”(로고스)에서부터 나왔고 한국어 개역개정 본문에는 “말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신탁(神託)”이라는 한자어는 “신(神)의 부탁”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부탁(付託)하셔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신탁”인 것입니다.
스테판이 율법을 “살아 있는 신탁들”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45) 단순한 세상의 역사의 관점으로는 유대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회중입니다.46)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47)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지식에 도달하리라고 믿습니다. 철학자들은 힘을 다하였으나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48)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시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인류는 오직 신탁들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49)
하나님께서 단 하나밖에 없는 해방의 길, 즉 구원의 길을 말씀하셨고,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들, 즉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압니다.50)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탁들을 우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 때도 그가 본 그 구조로 만들었습니다(출 25:40). 모세는 산에 자신이 본 그 구조로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51)
모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 되어 쓰인 것입니다(딤후 3:16). 하나님께서는 신(神)의 현현(顯現)을 통하여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영감(靈感), 즉 성령의 감동을 떠나 성경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52)
스테판은 “신탁들”을 가리켜 “살아 있는” 신탁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탁들은 본질상 계속 살아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이런 오래된 책을 연구할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53)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십계명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합당한 징벌을 받습니다.54)
하나님의 말씀은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의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55)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능력의 말씀으로 명령하셨습니다.56)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시니 무덤에서 나왔는데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니까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57)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임을 알게 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합니다. 말씀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의 진정한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람의 마음까지 침투하여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58)
하나님께서 시나이 산의 계시를 통하여 황야 교회에 말씀을 주셨는데, 살아 있는 말씀들이 있는 교회라야만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인 것입니다.
구원영생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120살까지 삶을 산 모세의 생애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40년씩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살까지 왕의 집에서 살다가 미디안 황야로 망명하였습니다. 모세는 80살까지 황야에서 동물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 사명을 주셔서 모세를 이집트 땅 안에 보내십니다. 모세는 그 사명대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황야 안으로 이끌고 나왔고 그들은 황야 교회였습니다. 세상은 황야와 같은 곳이니 세상에서 우리는 황야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황야 교회를 설립하셨는지 그 과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도 설립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마 16:18).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살아 있는 말씀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들이 늘 전파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와 성도들이 됩시다!
1) D. M.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설교 5, 정상윤 옮김 (복 있는 사람, 2007), 11.
2) D. M.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설교 4, 이길상 옮김 (복 있는 사람, 2011), 311.
3)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13.
4)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14.
5)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15-417.
6)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18-419.
7)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0.
8)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1-422.
9)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3.
10)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4.
11)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5.
12)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6.
13)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7-428.
14)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29-430.
15)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74-477.
16)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78-480.
17)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81-483.
18)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94-495.
19)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96-497.
20) Lloyd-Jones, 『영광의 기독교』, 498-500.
2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31.
2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56.
2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70.
2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70.
25)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71-72.
26)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73.
27)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50-51.
28)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52.
29)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54-55.
30) I. Howard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3), 김현광·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187.
3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05.
3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59-260.
3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61-262.
3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63-264.
35)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65-266.
36)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67-268.
37)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69-270.
38)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71-272.
39)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73-275.
40)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76-277.
4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80-281.
4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293-296.
4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15.
44)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88.
45) Marshall, 『사도행전』,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189.
46)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15.
47)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16.
48)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23-124.
49)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25-126.
50)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27.
51)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28-129.
52)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30-132.
53)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44-145.
54)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46-147.
55)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48-149.
56)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51.
57)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52.
58) Lloyd-Jones, 『도전하는 기독교』, 15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