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ker30/ 메멘토모리, 카르페디엠
③ 메멘토모리, 카르페디엠
세상의 모든 이별과 상실이 가슴 아프지만 죽을만큼 강렬한 건 없습니다. 죽음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별이 그렇긴 하죠. 대충 사랑한 사이라면 헤어져도 그만, 어쩌다 다시 볼 수도 있고, 그래도 그만저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가장 사랑하던 사람은 이별해서 다시 만나기 힘듭니다. 끝내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또 만날 수도 있고, 그러리라는 바람이라도 가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건 영영 만나지도 못하고, 만날 기대조차 영영 못하게 되는 겁니다.
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는다는 걸 잊지 마라.’ ‘우리는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걸 잊지 마라.’ 간단히 말해 ‘죽음을 잊지 마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이 말은 로마공화정 시절의 개선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승전해 돌아온 장군은 얼굴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면서 시내를 가로질렀습니다. 군중의 열렬한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개선문을 통과하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마치 신으로 숭배받는 듯한 벅찬 감동에 휩싸였을 겁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개선식의 마차에는 항상 노예, 그것도 아주 비천한 노예 한 명을 옆에 탑승시켰다고 합니다. 개선식이 이어지는 동안 이 노예는 끊임없이 이 장군의 귓가에 속삭여주어야 했다는군요.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그러니까 죽음을 잊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죽음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였을까요? 아니죠. “야, 나대지 마. 너무 우쭐해하지 마. 지금 네가 이렇게 대접받지만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일 뿐이야. 너도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고 끊임없이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죠. 그 뒤 이 말은 현세에서의 쾌락이나 부귀나 영예가 부질없고 공허하다는 의미로, 즉 다소 허무주의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쓰이기 시작합니다. 오르고 뜨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뫼만 높다 하는 나태와 의지박약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오르고 또 오르면 뭐하겠느냐는 지적인 셈이지요.
티벳에서
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꽃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그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세계사, 2000)
히말라야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갠지스 강의 발원지, 설산 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또 오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와보니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 오려고 그 많은 등짐을 지고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알파니스트 여러분 괜히 흥분하지 마시고, 이 시의 히말라야를 부디 헛된 욕망, 맹목적인 인생의 목표 지점 정도로 읽어주세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죽음도 마찬가지,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놓고 빈 몸으로 가는 건데, 평생 뭐 하러 그렇게 많은 짐을 지고 고생해왔던가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정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설령 오른들 어차피 그 끝에는 허무, 빌 허(虛), 없을 무(無), 말 그대로 텅 비고 아무것도 없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죽음은 단순한 허무 그 이상입니다. 로마시대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치 수천 년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라. 와야 할 것이 이미 너를 향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선한 자가 되라.” 허무한데 왜 최선을 다해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일까요?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정신없이 살 때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삶을 사는 거지. 그런데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산다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의미 있는 건가? 그런가 하면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깨닫게 되죠. 죽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사실을 통해 ‘아, 나도 죽는구나’ 하는 삶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요약하면, 살다가 죽은 것 아닐까요. 이렇게 인생에 대한 설명이 단순해져버리는 순간 오히려 삶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역설도 만들어집니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의 일부입니다.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축사의 내용은 제가 자주 인용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이야기하는 바와 참 잘 통합니다. 키팅 선생은 학교 역사박물관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우리나라로 치면 ‘영재과학특목자사고’ 같은 보딩스쿨 학생들에게 졸업생 선배들의 사진을 쫙 보여주죠. 역사박물관에 사진이 걸릴 정도라면 모두 성공한 선배들이겠죠? 이쯤 되면 학생들에게 시중의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성공학 이야기라도 들려줄 법한 상황인데, 키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가운데 한평생 소년 시절의 꿈을 마음껏 펼쳐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며 세상을 떠나 무덤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능력이,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까? 천만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을 뒤쫓는 데 급급해서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헛되이 써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지금 땅속에서 수선화의 비료 신세로 떨어지고 만 것이지.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들이 여러분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자 들어 봐! 어서 들어봐!”
다소 얼뜬 표정으로 아이들이 정말로 사진에 귀를 기울이자 키팅 선생은 사진 속, 아니 무덤 속 선배들을 대신해 속삭입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카르페디엠!”
선배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모두 잘나간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흙으로 돌아가 수선화의 비료가 되었죠. 허무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안타까이 후배들에게 말해주고픈 겁니다.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이 말의 원조 격인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대가 현명하다면 포도주는 바로 오늘 체에 거르라고, 짧기만 한 인생에서 먼 희망은 접으라고, 시간은 우리를 시샘하며 흘러가 버리니 내일은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카르페디엠을 ‘오늘을 즐겨라’라고 번역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때를 놓치지 말라는 뜻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카르페디엠은 메멘토모리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카르페디엠과 메멘토모리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2.1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