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화권이든 착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란 평가를 듣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연속선상의 양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기주의 <--------------------> 이타주의)
이기적인 사람들은 내 이익이 커지는 방향 위주로 의사결정을 하며,
이타적인 사람들은 타인(또는 집단)의 이익이 커지는 방향 위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타주의적 행동의 본질이 다소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왜 그들은 자신보다 남들을 더 챙기는 걸까?
그게 충만한 인류애나 따뜻한 심성, 또는, 뛰어난 공감 능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이 착한 사람들의 이타주의를 전적으로 설명해주진 못 해요.
가령,
따뜻한 사람들 중에서도 남들이 아닌 자신의 삶을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딱히 온정적인 성격이 아니더라도 이타주의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대다수 이타주의적 행동의 기저에는 모종의 "불편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A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B를 적극적으로 도울 때,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C는
'와, 참 A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판단하기 마련이겠지만,
사실 A는 B의 곤경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이타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면???
따뜻한 심성의 본질이
남들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을 돕게끔 유도하는 기질이라면???
수동적 이타주의자
우리 나라에서 착하다라는 평가는 딱히 듣기 좋은 소리만은 아닙니다.
내 밥그릇 챙기지 못하고 남들에게 퍼주기만 하다 밑둥만 남은
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미지가 겹쳐보이기 때문이죠.
소설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도 만족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이 이타주의적 행동의 본질은 사랑이자 대상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말이었죠.
만약 나무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 착한 나무였다면,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들어주다 밑둥만 남는 결말이었다면,
이건 동화가 아니라 국민신문고에 등장할 만한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들의 딜레마는,
이타주의적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불편감의 해소나 내적 충만감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만 하다 결국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면서 느끼는 상실감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착한 사람들의 주 성격은 "고 우호성"이고,
고 우호성의 핵심 특질은 이타주의와 공감능력입니다.
즉, 기질적으로 남들의 불편감에 더 잘 반응하게끔 태어났다는 것이죠.
※ 롤이란 게임에 유기적으로 딜러, 탱커, 서포터란 포지션이 있듯이,
구석기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도 사회의 유지를 위해 각각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고,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해내면서 결국 인류가 지구 생태계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체계화된 언어가 부족했던 원시 인류들은 어떻게 각각의 역할을 찾아서 유기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까?
학자들은 성격과 기질이 바로 원시 인류들의 역할을 태생적으로 분류하는 시스템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령, 고 우호성인들은 남들을 돕는 서포터의 기능에 적합하게 태어나고,
고 외향성인들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집단을 확장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진화는 현대 기준이 아니라 원시 시대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격이나 기질 또한, 현대인들이 아니라 구석기인들의 생존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돼 왔어요.
즉, 각각의 성격은 현대인인 내가 느끼기에 굉장히 불편하다거나 불합리해 보이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왜 서포터로 태어나야 해?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의 곤경이 일일이 신경쓰일까?
나도 이젠 내 생각만 하면서 날 위해 살고 싶어.
이 일련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게 되었으면,
내 성격을 따르느냐? 아니면 내 성격에 역행하느냐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남들에게 주고만 있는지 나조차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치 끌려다니듯 자기희생적 행동들을 지속할 것인가?
혹은,
내 기질과 성격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나의 본능에 새겨진 불편감과 맞서 싸우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할 것인가?
물론, 이타주의적 행동 자체로 내적 충만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존재합니다.
이타주의적 행동의 본질이 인류애인가? 나의 기질적 불편감인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려 할 때,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에 그것을 거절하는가? 아니면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받아들이는가?"
이타주의적 행동으로 내적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남들 또한 나처럼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길 원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이 나에게 베푸는 호의를 마다하지 않으며, 그러한 교류들을 통해 진심으로 즐거워합니다.
반면, 남들의 손해에 기질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못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남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잘 못 해요.
남들이 나를 위해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쓰는 일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죠.
왜? 나는 기질적으로 서포팅에 알맞게 태어났기 때문에.
성격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성격은 늘 가치중립적이라고 설명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고 우호성의 경우,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의 착함을 올바른 대상에게만 집중시킬 수 있는가?
내가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 불편감을 감내할 수 있는가?
남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할 때,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수동적 고 우호성"은 때때로 스스로를 굉장히 힘들게 만듭니다.
불편감에 끌려다니면서 남들에 촛점을 맞춘 삶을 살다보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나 자신에 대한 회한과 상실감을 느끼면서 짙은 우울의 그늘에 빠지는 것이죠.
인생이 B와 D 사이의 C라면,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만큼,
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 여부가 될 것입니다.
나에 대해 알아가고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
우리의 삶을 진전시킬 수 있는 선택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 무명자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hsune
첫댓글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제 얘기네요. 좀 더 컨트롤을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노력하고 있으니 잘되겠죠?
너무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요
크...너무 좋은 양질의 글 감사하게 잘읽었습니다.
내 착함을 올바른 대상에게 집중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요새 고민 중입니다
글로 정형화 되니, 제가 집중해야 될게 무얼지 알겠네요!
감사합니다.
저랑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깊게 관찰해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고 우호성의 성향을 가진사람은 내향적이 될수밖에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부분이네요...
감사합니다. 너무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