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해바라기 얼굴」서울 신촌 연세대(노래가 된 시:11)
◎슬픈시대 맑은영혼의 민족적 서정/긴세월건너 우울한 80년대에 「민족동요」로 새생명/주로 조국서 보낸 연희전문4년동안 활발한 시작
겨울 해는 두터운 구름장 뒤편에 숨어 있다. 참나무 사이에 고절하게 서 있는 시비는 검은 점판암을 만장 속의 얼굴처럼 드러내고 그의 「서시」를 부끄럽게 보일 듯 말 듯 낭송한다.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갈망하는 식민지 청년의 맑은 영혼은 어두운 하늘 아래 조용히 숨어 있다. 세기말의 한 해도 다 저물어가는 서울 신촌동 연세대학교 교정. 다사롭고 웅숭깊은 청년이 가장 화려한 시혼을 밝혔던 교정에 그 시비는 그렇게 서 있다. 잠시 구름이 해를 비껴 흘러가는 틈에 시비 왼쪽 모서리에 사이키조명처럼 빛이 흘러든다. 시비 아래 화강암 항아리에는,향로로 서 있는 그 차가운 돌덩어리 둥근 외곽에는 장난처럼 「76학번 짱구들 드림」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세월을 건너뛴 맑은 후배들과의 그 교감이 그렇게 장난일 수만은 없는 사연을 누가 왜 모르랴. 키가 눈짐작으로 7m는 족히 넘음직한 참나무들이 시비를 듬성듬성 에워싸고 있다. 바닥에는 다갈색 마른 참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휩쓸려 돌아다닌다. 까치 두어 마리가 그 바닥에 앉아 앙증맞은 부리를 끊임없이 휘돌리며 먹이를 찾아 헤맨다. 그 까치들 뒤편으로 시인이 조국에서 짧은 세월 동안 기거했던 기숙사 건물이 황갈색 회색 주황색의 돌무늬로 새롭게 외벽을 치장한 채 시비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시 해는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
『누나의 얼굴은 / 해바라기 얼굴 / 해가 금방 뜨자 / 일터에 간다. // 해바라기 얼굴은 / 누나의 얼굴 / 얼굴이 숙어들어 / 집으로 온다』(「해바라기 얼굴」 전문)
78년 12월 우리 음악의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던 작곡가 김영동씨(45·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노래로 만들어 발표했다. 국악 형식을 빌려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애초에 동요라는 장르에 작곡가가 스스로 포함시켰지만 80년대 내내 아이들보다는 대학생을 비롯한 성인층에서 애창되어왔다. 70년대 후반부는 YH사건을 비롯해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던 시점이었고,그중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초점으로 부각되던 시절이었다. 80년대로 접어든 시점에서야 노동문제의 사회적 문제 환기 비중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진 것은 당연하다. 일제 말기 암흑기에 순정한 영혼으로 살다가 식민주구의 악랄한 생체실험에 희생됐던 시인 윤동주(1917∼45)의 시혼이 세월을 건너뛰어 접목됐던 것이다.
윤동주는 이승에서 불과 만 27년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겸허하고 관유하고 온화하였고 내성적이었던」 그는 주변에서 한 번도 누구와 다툰 적을 본적도 없었고 아무리 성격이 괄괄하고 시비 붙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언성을 높여도 그가 좌중에 섞이면 조화롭게 정지되던 인품의 청년이었다. 그의 많지 않은 시편들은 공통적으로 드러내거니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식민지 세월의 운명과 자신의 삶에 관한 「부끄러움」의 시각은 맑은 영혼의 시적 자질과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좋은 시절에 났다면 한국 현대시의 명맥을 제대로 발전시켜 금쪽같은 서정시의 사표를 제시했을 그는 불행하게도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적인 운명 속에 쓸쓸히 사라져갔다.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 //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고향집만주에서 부른」 전문)
윤동주는 1917년 항일사상의 온상이었던 땅 북간도 명동촌의 기독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소학교에 1년을 더 다닌 이듬해에 집안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그곳의 은진중학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으나 일제의 간악한 신사참배 강요와 식민지적 교육풍토를 견디지 못하고 간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938년 용정의 광명중학을 졸업하고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서 학교 기숙사에 몸을 담는다. 간도 주민이었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조국에 머물렀던 연희전문의 4년여 조국 나그네의 세월은 그의 주요한 시편들이 활발하게 씌어졌던 시기였다.
고종사촌 송몽규와 연희전문도 같이 다녔고 일본에 건너가서도 숙식을 함께 했던 윤동주는 그와 함께 일경에 체포된다. 일본에서 불량선인들의 민족의식 함양과 인텔리 독립운동 모사 계획이라는 게 그 체포의 연유였다.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까지 모두 부쳐 두었던 시점이었고 고향에는 부친이 세상 돌아가는 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했다. 부친은 윤동주의 귀향의지를 담은 편지를 받고도 무언가 불안해서 동주의 누이를 두만강가의 역에 보내 아들을 학수고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싸늘한 전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자주 맞던 끝에 동주는 차가운 시체로 변했고 아들의 시신을 하루바삐 인수하지 않으면 의과대 해부 실습용으로 넘기겠다는 협박조의 글도 그 전문에는 적혀 있었다.
『백골이 우는 것이냐 /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 지조 높은 개는 /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쫓는 것일 게다. / 가자 가자 /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또 다른 고향」 중에서) 시인이 일찍이 썼던 시편처럼 그는 끝내 백골의 가루가 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식민지 청년의 간절한 고통과 부끄러움,차라리 개를 부러워하던 부끄러움은,운명적으로 일제의 차가운 생체실험 실습용으로 살다가 그렇게 고향에 돌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를 두고,생전에는 한편의 시도 공개적으로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를 두고,그를 「저항시인」이라고 이야기하는 평자들에 대해 격렬하게 「과학적」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일군의 시인 평론가도 있다. 그것은 일제의 암흑기 40년대에 우리를 만족시켜줄만한 투사적 정신의 시인이 전무했던 것에 대한 남은 사람들의 견강부회 때문이라는 그들의 공격적 빌미 또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한 시인의,아니 식민지의 맑은 지식인 청년에 대한 또다른 모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는,윤동주는,그들의 어떠한 평가를 받기 위해 그 운명의 길을 걸어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끄럼 없이 한 생애를,한 시대를 살기를 간절하게 소망한 슬픈 시대의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까닭이다. 그가 연희전문 시절에 출간하기를 소망했지만 끝내 불발로 그치고 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서시」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깊은 밤 촛불을 밝혀두고,그 촛불마저 암울한 시대의 바람에 꺼져버린 공간에서 기도처럼 씌어진 시편이다. 후일 작곡가 박상문은 그 시 또한 가곡으로 만들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전문)
돌아오는 길,한총련의 격렬한 불지핌에 그을렸던 동주의 화려했던 교정을 돌아서 나오는 그 길에,끝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조용호 기자>
신동엽 「산에 언덕에」/충남 부여읍 생가(노래가 된 시:12)
◎외세… 압제… 「껍데기」 거부한 민족혼/모더니즘 지배 60년대 시단에 투철한 역사의식 우뚝/가난한 이웃에 대한 짙은 애정불굴의 민초삶 형상화
『들으라 잊지 못할 나의 벗들이여/ 나를 추모하는 뭇 벗들이여/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이것만이 내 생명의 율동이 요구하는 벗들에 향하는/ 마지막 바람이어라.』(「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중에서)
모더니즘의 유희적인 말장난과 관념놀음이 한국 현대시를 지배하던 60년대에 각성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서정적인 시혼에 접목시켜 짧은 세월 절창으로 노래하다 병마에 잡혀간 신동엽(1930∼1969) 시인. 충남 부여읍 동남리 501의 3번지 그의 집 마당에는 아직 녹지 않은 잔설과 더불어 수국과 장미줄기와 대추나무와 향나무가 마르고 황량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
초가지붕을 개량해 기와를 얹기는 했지만 툇마루와 창살문에선 세월의 오래된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흔적은 마루에 그대로 배어 있다. 오랜 세월 먼지가 쌓이고 쌓여 누군가 생각날 때마다 걸레질을 해도 두터운 먼지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빛바랜 마루는 시인의 육성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인,그저 기념물일 뿐임을 실감케 한다. 방문 위쪽에는 시인의 아내 인병선씨가 써놓은 시편 하나가 검정 목판 속 진노랑 양각으로 새겨져 걸렸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담 밑 가장자리에 지난 여름의 탐스러운 수국은 만지면 그대로 금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황갈색 노추로 매달려 있고 새침데기 가시내처럼 온 줄기에 가시를 뻗친 장미 줄기는 채도가 탁한 빨간 열매를 주절주절 달고 서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빨래 건조대가 아이의 내복 바지와 수건,양말,팬티 등속을 걸치고 차가운 대기 속에 서 있다. 행랑채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가 겨울의 냉기는 아랑곳 없이 옛날 이야기라도 나누듯 제 멋대로 놓여있다. 인기척을 눈치 챈 사내 하나가 방문을 나선다.
서산여중 미술교사 임의수씨(38). 교사와 일반인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동엽생가관리모임」의 일원인 그는 신동엽의 부친이 아들을 그리며 홀로 생가를 지키다가 지난 90년 이승을 떠난 뒤 아예 이곳 행랑채로 살림을 옮겼다. 그는 이제 1년이면 5백여명이 다녀가는 시인의 생가 안내인이 돼 버렸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연 곰나루의,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전문)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서사시 「금강」은 신동엽을 상징하는 시편들이다. 한반도를 뒤덮은 무기들과 외세에 대한 격렬한 심정적 반발과 함께 순결한 고향의 대지에 맥맥히 흐르는 백제의 정신을 녹여낸 것들이다. 이를 두고 평자들은 『민족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과 표현력으로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이라거나 『우리의 시의식은 「금강」으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신동엽은 1930년 8월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의 1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에 이어 2대독자로 태어난 아들에게 부친이 쏟아부은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 독한 가난과 사랑 속에서 부여초등학교를 마친 시인은 학비와 기숙사까지 무료로 제공되는 전주사범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부친은 부여에서 전주까지 백리길을 마다 않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자전거 뒤에 인절미 따위를 매달고 한달이면 서너번씩을 왕래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제대로 줄 줄 아는 법,이렇게 청년기를 보낸 시인의 가슴은 뜨거운 감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전주사범 시절,시인은 문학과 철학서적을 읽으며 홀로 고독을 생활처럼 씹었다. 그의 개성적인 시편들과 투철한 자존의 논리,역사적인 시각은 모두가 당시의 독서량과 사색에 힘입은 결과라고 친우들은 술회한다.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부여에 머물며 한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시인은 서구적인 가치질서에서 벗어나 동양의 정신과 만난다. 주위에 산재한 수많은 백제 유물들에 새삼스런 관심을 쏟으며 백제정신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인은 부친 곁을 떠나 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6·25가 닥쳤고 반도에 널려 있던 시체더미와 처참한 상처들을 기억 속에 슬프게 저장해야 했던 시인은 전쟁통에 얻은 병으로 충남 보령에 있는 주산농고 교사로 있다가 끝내 각혈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요양 중에 썼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돼 시인은 본격적인 시업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의 길로 접어들자마자 신동엽은 또다시 역사적인 4·19를 만난다. 혁명의 기운은 시인의 세계관과 맞물려 민족의식의 정화를 담은 독보적인 시편들을 한국 현대시사에 줄줄이 쏟아내게 만들었다.
『동학이여 동학이여./ 금강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삼월」)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사월은 갈아엎는 달」)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에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진달래 산천」)
시인은 그러나 69년,데뷔 10년만에 간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민족과 역사에 눈 뜨기 시작하던 그의 절친한 벗 김수영 시인이 창졸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1년만에 그 또한 그렇게 쉽게 가버렸다. 시인은 병석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산에 언덕에」를 썼고 이 시편은 부여 나성터 백마강변에 서 있는 그의 시비에 음각됐다. 작곡가 오동일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산에 언덕에」 전문)〈조용호 기자〉
유치환 「그리움」/경남 통영(노래가 된 시:13)
◎사랑하므로 행복했던 「생명시인」/한 여인과의 운명적 만남 보편적 「문학언어」로 승화/“줄기차고 섬세한 명상”… 고향땅 동백꽃 여전히 붉어
「바람이 애터지게 불어쌓는」 충무항 오후 4시. 포구에 가지런히 어깨를 기대고 도열한 어선들은 그들 사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잇대어 놓은 스티로폴과 타이어 따위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고기 부스러기를 좇아 온 갈매기들이 끼루룩 대는 울음과 어선들이 내는 신음소리가 뒤섞여 충무항 오후 4시 무렵은 쓸쓸하다. 그 쌀쌀한 바람 속에서 새벽에 출항해 막 돌아온 고깃배에서는 물메기,광어 등속을 배 밑창에서 떠올리는 사내들과 그 고기들이 행여 바닥으로 떨어질새라 조심스럽게 함지박에 받아내는 아낙들의 마지막 작업이 부산하다. 깃발은,청마 유치환(1908∼1967)의 그 「노스탈쟈의 손수건」은,포구 구석에 처박힌 선박들에서 일제히 제멋대로 흔들린다.
광막한 이승의 대지에서 바위같이 단단한 생명의지와 그 극단에서 양립하는 허무의지로 한국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간 청마 유치환. 그의 사랑과 시는 두고두고 남은 사람들의 정서를 무시로 뒤흔들거니와,그의 시는 못다 이룬 애달픈 사랑으로 더욱 눈물겹고,그의 사랑은 대바람 소리 청청한 뜨거운 언어들의 조탁으로 더욱 애틋하다. 노래가 된 「그리움」(정회갑 작곡)은 청마의 모든 시편 중에서도 그의 감정을 가장 직정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어서 그 애틋한 사랑의 사연을 아는 이들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는 짧은 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은 1908년 지금은 통영시로 행정구역명이 바뀐 충무시 태평동 500에서 한의사 집안의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청마는 후일 극작가가 된 친형 동랑 유치진과 함께 도쿄 풍산중학에 입학해 4년간 공부하다가 가운이 기울자 귀국해 부산 동래고 5학년에 편입했다. 다음해에 그는 시문학에 뜻을 품고 연희전문대 문과에 합격했지만 1년만에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의 소꿉친구 권재순과 결혼하고 일찍이 이름을 날렸던 정지용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시쓰기에 몰두한다. 그의 형 유치진과 더불어 「소제부」라는 회람을 발간하며서 문학활동을 개시했고 드디어 1931년 「문예월간」지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장한다. 교과서에까지 수록돼 중등교육만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의 시 「깃발」을 포함한 53편의 시를 수록해 39년 처음으로 「청마시초」를 펴낸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깃발」전문)
세상 잡사의 질긴 인연과 사랑의 여신에게 밉보이지 않았던 순수한 시절에 그는 이 「깃발」을 썼다. 그러나 그 애증의 씨앗은 이미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으로 공중의 깃발 속에 펄럭이고 있었으니,시인이기를 떠난 범부의 애틋한 감성의 준동을 누가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청마는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한 1940년 형 유치진이 먼저 가서 개간해놓은 만주의 텃밭으로 가족으로 이끌고 이주한다. 해방 직전인 45년 6월 통영으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아내 권재순은 일본인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유치원을 경영한다.
통영여중시절,청마는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중이던,21살에 남편을 여의고 외딸과 살고 있던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때부터 청마는 죽기까지 20여년 동안 절절한 연서 5천여통을 그녀에게 보낸다. 집에서 가까운 우체국에 가서 그녀에게 매일 일기 쓰듯 편지를 보냈고,그녀에게서 오는 편지는 사서함을 개설해서 그 우체국에서 개봉했다.
살가운 아내와 귀여운 세 딸을 두었던 유부남 유치환. 윤리의식과 사회적인 체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의 애틋한 감정은 청마 사후 그가 보낸 편지 중에서 2백여통을 골라 책으로 묶어낸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 절절히 담겨 있다. 이러한 그의 아픈 사연을 염두에 두면 그의 시편들 중에는 새롭게 다가서는 구절들이 많다.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중략)/그리고 너는 나의,나는 너의 눈과 눈을/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오라 어서 오라/나의 기다림도 정녕 한이 있겠거니/그때사 네가 온들,/빈 창밖엔/멧비둘기만 구구구 울고/뜰에는 나의 뱉고 간 피의 낙화!』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청마 유치환을 이처럼 사소할 수도 있는 애정의 편린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분명 무모한 편견이다. 그의 시는 『줄기 차고 섬세한 명상,거대하면서도 면밀한 시세계,그리고 명확하고 힘찬 진술과 어조로써 높은 수준과 풍격을 유지했으며』 또한 『그의 시는 인간적이요 윤리적이며 현대적 기법 내지는 현대성이라는 척도로 재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줄기찬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청마가 이여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들 또한 문학 전반에 걸친 그의 생각들을 포함해 일종의 정서적 고백록처럼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어찌 그처럼 문학적이고 플라토닉할 수만 있는가. 그 이면의 고통들에 대해 무심할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이들은 기실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청마의 시비는 충무항 왼쪽 모서리에 작은 동산처럼 솟아 있는 남망산 공원 산책로에 서 있다. 산책로 주변 동백나무에는 막 벙글 준비를 마친 핏빛 꽃망울들이 짙은 녹색의 이파리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충무항 뱃길이 환히 내다보이는 남망산 산동네 어느 허름한 집 마당에 우뚝 서 있는 동백나무는 탐스런 연분홍 동백꽃을 이미 온몸에 달았다가 하나 둘 피를 토하듯 송이째 마당에 떨어뜨린다. 부산남여상 교장시절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혼자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이승을 떠난 청마. 그가 간 지 한달 후 이영도 여사는 친구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청마의 애정에 질질 끌리는 먼먼 세월 속에 제가 얼마나 청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가 가버린 오늘에야 깨달을 수 있구먼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흐뭇하게 애정할 수 있었을 텐데…. 오직 남은 세월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가 제게 남은 형벌 같습니다』
그러나,청마는 죽기 전 그녀를 이렇게 위로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앞에 와서/너에게 편지를 쓴다/(중략)/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희망도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이여,그러면 안녕!/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조용호 기자〉
정호승「맹인부부가수」/서울 서대문구 냉천동(노래가 된 시:14)
◎소외된 이웃에 바친 뜨거운 서정/「슬픔넘는 강한의지」로 시대아픔거리의 민중삶 노래/성장기 지독히 가난… 「반시」 동인 활약 모더니즘 거부
시가 노래가 되고,노래는 울음이 되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고음의 통성이 아닌,어느 가난한 맹인부부가수의 겉으로는 밋밋하기 그지 없는 거리의 노래였다. 그렇게 먹고 살기 위해 노래부르며 구걸하는 그 부부가수를 붙들고 시인이 울었다. 눈 내려 어두운데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시인은 그 부부를 마음 속으로 붙들고 그렇게 울었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입구. 「핸드백 구두수리센터」라는 꽤 무게있는 간판을 내건 구두닦이집이 초라하게 골목에 서 있고,그 입구에서 바라본 정면에는 한껏 멋을 부린 교회 하나가 서 있다. 뒤를 돌아 대로 쪽을 보면 온통 냉동창고속 같은 차가운 대기를 뚫고 차들이 무섭게 질주한다. 그 대로의 서대문 버스정류장 옆에 그 맹인 부부가수가 있었다.
정호승 시인(1950∼)이 은평구 응암동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매일 서대문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때는 시 속의 계절과는 반대로 땡볕이 살갗을 태우는 듯한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 곳에서 노래부르는 맹인부부가수 한쌍을 목격했다. 맹인 남편이 더듬더듬 걸어가 근처 구멍가게에서 하드 두 개를 사오더니 아내에게 주었다. 그 하드를 똑같은 맹인인 아내에게 건네주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아내를 더듬거리더니 팔뚝에서부터 죽 훑어내려와 두 손이 만나서 힘들게 하드가 건네지는 것이었다. 광화문 덕수제과 옆 육교 위에서도 보았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가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놓고 먼지가 더덕더덕 내려앉은 앰프 하나를 재산삼아 목청껏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 노래부르는 장면을. 이들 두 부부가 시인으로 하여금 70년대말의 시대적 어둠을 온 가슴으로 노래하게 만든 것이다.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맹인 부부가수」 전문)
79년에 시인이 낸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이 시는 수록됐고 80년대 노래운동의 일원이었던 문승현씨가 곡을 붙였다. 정작 시인도 오랜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이 노래는,70년대 말이 어둠이었다면 이제는 칠흑속 압제의 밤이었던 80년대 벽두부터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속으로 차가운 소주처럼 흘러들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대학 공연장에서 부른 가수는 있었겠지만 특정 지정가수는 없는,지난 시대의 구전가요였다. 그 시대의 눈 내리는 가슴들이 너나들이로 불렀던 노래다. 잔잔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눈내려」로 시작되는 첫 마디는 이내 반음씩 무너지듯 내려오는 「길을 잃었네」로 이어지는 노래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듯한,그러나 햇볕은 유난히 맑은 날,세종문화회관 뒤편 분수대 광장에서 시인을 만났다. 시인 옆에 젊은 청년 하나가 따라온다. 그 청년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인의 장남 영민군. 그 청년은 시인이 「맹인부부가수」를 쓰던 해에 태어났다. 벌써 2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린 징표가 바로 그 장성한 아들이다. 그는 그 맹인부부가수의 설움을 알까. 불과 엊그제 같은 그 시대의 어두운 골목길 토악질 냄새를 상상할 수나 있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세기말을 앞둔 지금,사람들의 가슴 속에 흐르는 노래의 길은 여전히 갈망으로 뚫려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이제 아무 곳에서도 그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눈먼 가슴들의 노래는 공허하게 퍼지고 있겠지만 어설픈 시대의 허영과 무관심의 극단과 이기심의 포효 속에서 그 노래를 받아들일 뜨거운 가슴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때 대구로 옮긴 뒤 그 곳에서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은행원이었던 부친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뒤 민감한 감수성이 준동할 무렵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인은 도시 변두리에서 지독한 가난의 세월을 지내야 했다. 졸업앨범도 수학여행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어린 시인은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기 위해 전국고교문예현상모집에 「고교문예의 성찰」이란 평론을 써서 당선돼 대학문을 들어선다. 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당선된다.
그의 대학시절은 첫 시집에 발문을 쓴 동창이자 늦깎이로 데뷔한 박해석 시인의 진술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은 난해한 모더니즘 시를 쓰던 선배시인들을 거부했고,심지어는 미당 서정주 화형식을 치르기까지 한다. 잠잘 곳이 없이 대학 강의실을 숙소로 전전하며 문학의 열병을 뜨겁게 앓아냈다. 박해석씨는 『그의 시의 점액질은 슬픔의 토양에서만 가능하고 슬픔의 촉매인 한과 그리움 또는 기다림에 얽매이지 않는,오히려 그것을 어디로든 이끌고 가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라고 정호승의 시세계를 압축해낸다.
시인은 유신 중기에 접어들던 76년부터 김명인 김창완 김명수 하종오 이종욱 등과 더불어 「반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반」자에서 알아보듯,그들은 시대의 아픔과 민중을 향한 시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나는 한 번도 그 시대에 앞장서 본 적이 없었다. 어떤 평론가는 무심히 당신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고 말했지만,이분법이 극단적으로 횡행하던 시절에 나는 시인이 행동하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서정적인 장치는 고운 눈으로 봐주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서정이 빠져버렸다면 지금까지 누가 내 시를 읽겠는가』
그의 따뜻한 서정이 작동된 탓일까. 그의 시편들은 맹인부부가수 외에도 백창우씨가 작곡한 것을 지난해에 자살한 가수 김광석씨가 유작앨범에 실었던 「부치지 않은 편지」도 있다.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마치 김광석이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듯 부르는 시편이다. 가수 이동원씨가 최종혁씨의 작곡으로 부른 「이별 노래」는 비교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다. 『떠나는 그대/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사랑하기 아직 늦지 않으리//그대 떠나는 곳/내 먼저 떠나가서/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노을이 되리니…』
서대문 버스정류장까지 동행한 시인은 아들과 함께 두 손을 코트 앞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미소를 남기고 먼저 총총히 떠났다. 시인은 왜 조만간 녹아버릴 숙명을 지닌 허망한 눈사람을 기다림의 실체로 그의 시편들 곳곳에 세워놓았을까. 눈 한송이 날리지 않는 쌀쌀한 골목길에 그가 남기고 간 노래만 남아 떠돈다.〈조용호 기자〉
신경림「돌아가리라」/충북 중원군 노은면생가(노래가 된 시:15)
◎굳센 민초삶 일깨운 신명의 가락/끈끈한 서정사회과학적 안목 배합…80년대 젊은 가슴들 애창
신경림(62),그의 시에서는 소주 냄새가 난다. 그의 시 속으로 복류하는 물줄기에서는 울음소리가 난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밑바닥에서 신명을 억압당한 채 한숨과 눈물바람으로만 살아가는 수많은 민초들의 가슴을 서정적인 노랫가락으로 위무해낸다.
시와 노래가 옛날부터 한몸이었다면,그는 우리시대의 시인이기를 떠난 뛰어난 가객이라 부를 만하다. 시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가 구사하는 운율은 대부분 민요의 리듬을 닮아 있다. 김소월이 구사했던 고전적이고 교조적인 민요의 운율은 아니지만,신경림의 시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어느새 민요가 되고 울음이 되고 노래가 된다.
충북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시인의 생가. 면사무소 앞에서 「궁전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시인의 오래된 동갑내기 친구 김영수씨가 반갑게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다. 한 시절 금광 덕분에 유난히 타지역에 비해 북적거렸을 노은면 중심 가로는 이제는 오히려 지난 시대의 영화세트처럼 퇴락한 상가들이 줄지어 서 있는 6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그 가로를 지나 시인의 생가는 채 10분 거리도 되지 않는다. 시인의 생가는 외풍을 막기 위해 툇마루 앞으로 쳐놓은 비닐막들로 인해 썰렁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문을 들치고 들어선 툇마루 앞에서 소리쳐 불러도 주인은 기척이 없다. 댓돌에는 털신,구두,남빛 고무신,슬리퍼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장방형의 안방 창살문 위편의 한지에 붓글씨로 써넣은 「하눌뜻 받들고」가 붙어 있다. 시인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손승민씨가 소유한 집이라는데,제법 시인의 체면을 세워주는 멋들어진 글씨다.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고향길」중에서)
빛바랜 벽지와 너덜거리는 창살문이 시인의 시편들을 그대로 연상케 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비록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여지없이 변형될 불안한 미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시대의 뛰어난 시인의 정서적 원형질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정취 넘치는 옛집이다.
그 생가를 나서 동구로 나서면 삼백년은 족히 됨직한 느티나무가 넉넉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 고샅을 지나 면사무소까지 걷다가 노은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면 신경림의 대표작 「농무」는 정감 있는 목소리의 배경음으로 귓전에 실감나게 재생된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낄낄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농무」전문)
1956년 「문학예술」지에 「갈대」가 추천돼 문단에 나온 신경림은 난해한 관념시가 주종을 이루던 당시의 문단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이후 10여년간 광산촌과 소읍을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가 되어」 떠도는 떠돌이로 젊은 시절을 보낸다. 그의 질박한 삶의 기행은 이후 70년대 초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삶의 냄새를 그대로 시에 투영해내면서도 끈끈한 서정과 슬픔과 사회과학적 안목이 배합된 우리시대의 대표작 「농무」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의 새 지평을 개척하면서 문단의 중심에 직격해 들어왔다.
신경림의 장시 「새재」 중에서 노래가 된 시는 「돌아가리라」다. 연작장시 「새재」와 「남한강」과 「쇠무지벌」을 합쳐서 「남한강」이라는 대하장시를 완성시킨 게 80년대. 그 연대의 말미에 그가 민요운동을 주도하던 단체 「민요연구회」에서 민요판굿으로 재현해낸 뮤지컬 「남한강」 중에 삽입된 곡이었다. 남한강가에 살았던 민초들의 사랑과 설움과 항쟁의 역사를 유장한 민요가락으로 절창한 장시였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처럼 산천을 헤매는 늑대처럼 울부짖다가 종래는 구한말 외세와 결탁한 정참판집 곳간을 부수고 분연히 의병의 길을 택했던 돌배와 그의 연인 연이의 순정한 사랑을 신경림은 남한강물에 새겼다. 새재 아래 쇠전 높은 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연인의 모가지를 바라보며 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처없이 산야를 헤매던 여인 연이. 그 연이가 당차게 눈물 훔치고 주막을 차려 일제시대를 견뎌내며 마을사람들과 웃고 울던 그 서러운 역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모내기 전에 돌아가야지 / 황새떼 오기 전에 돌아가야지 / 정참판네 하인들 눈 뒤집고 / 우릴 찾는다 해도, / 헌병 보조원 몰려와 /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닦달한다 해도, / 찔레꽃이 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 새우젖배 오기 전에 돌아가야지 / 물난리 전엔 돌아가야지 // (중략) // 두견새 피 토하는 신새벽에 / 새삼 두 손을 움켜잡았다 / 물난리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 우리는 넷이 아니다 열이 아니다 / 새우젓배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 두 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새재」중에서)
노래가 된 「돌아가리라」는 이 시가 그대로 가사가 된 건 아니고 부분을 발췌해 개작한 것이지만 문홍주씨가 작곡한 이 노래는 80년대 젊은 가슴들을 대변하는 노래가 되었다. 민요판굿 「남한강」에 삽입된 노래 중에서 KBS국악관현악단의 타악기주자로 있는 김석천 작곡의 「우리 것이다」도 있다.
이밖에도 노래가 된 신경림의 시편들은 「강」 「민주」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등이 있다. 신경림 시인의 시들은 아직도 쉽게 노래로 만들 만한 시편들이 무수하게 널려 있다. 다만 그것을 대중의 정서에 그대로 들어맞는 곡과 신명으로 꿰어낼 만한 작곡자들이 나서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시인의 벗은 말한다.
『우리 유년기처럼 재미졌던 때도 없을 것이네. 신경림 시에 나오는 겨울밤 묵내기 화투,협동조합,방아간,보리밭 가로질러 신랑 다루러가는 얘기들 따위가 전부 우리들 생활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지. 삶을 그대로 읊기만 하면 시가 된다는 것을 나는 그 친구를 통해 비로소 알았네. 그런데 우리가 읊으면 시가 안되고 그 친구가 읊으면 참,내가 봐도 절절한 울림이 되는게 신기할 따름이지』
시인의 가슴에 젖줄을 댄 남한강 줄기 합수머리에서 김영수씨는 이렇게 시인을 은연중 추켜세우며 불콰한 얼굴로 문학이야기를 두서 없이 꺼낸다. 남한강물에 진눈개비가 내리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일어섰다. 그의 시 「겨울밤」을 속으로 되뇌면서.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 묵내기 화투를 치고 /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 펑펑 쏟아지는데 /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 연애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겨울밤」전문)〈조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