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화가의 작품 모사
무리요 다음으로 모사 요청이 많았던 화가는 벨라스케스였다. 이렇게 보면 벨라스케스가 무리요보다 인기가 적은 작가로 보이지만 사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무리요의 작품보다 훨씬 적은 세 점에 대한 요청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었음을 알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겠다고 요청한 사람은 97명이었다. 이 중 43명이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모사했고, 37명이 <수도승의 초상>을 모사했는데, 훗날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그리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작가미상의 작품을 대가의 것으로 알고 모사한 것이다. 나머지 17명이 모사한 작품은 <신사들의 회합>으로 훗날 마네도 이 작품을 모사했다. 이것은 1859~60년 벨라스케스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명되었으므로 벨라스케스가 손수 완성시킨 작품은 당시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한 점뿐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화가로는 장-밥티스트 그뢰즈가 가장 인기 있었다. 일화적인 풍속화의 선구자로서 그뢰즈는 풍속적인 정경에 도덕적·사회적인 의미를 불어넣었고 시골의 순박한 미덕과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철학자이자 비평가 디드로는 그의 작품을 “회화로 나타낸 도덕”이라고 칭송했으며 루브르에 소장된 <시골 약혼녀>, <탕아의 귀환> 등을 가리켜서 당대 회화의 최고 이상을 대표한다고 했다. 그뢰즈는 역사화 <카라칼라를 질책하는 셉티무스 세베루스>(1769)로 왕립 미술원에 입회하기를 바랐으나 왕립 미술원은 그를 풍속화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화가들은 신고전주의에 등을 돌리고 무리요·그뢰즈·프뤼동, 그리고 루벤스의 양식에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무리요의 <걸인 소년>과 그뢰즈의 <부서진 주전자>에서와 같은 감상주의와 사실주의가 혼용된 회화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1871년 말 대가들의 작품에 대한 모사의 요청이 늘어나자 에콜 데 보자르의 디렉터 샤를 블랑은 화가들로 하여금 국제적인 미술에 대한 취향을 갖게 하기 위해 모사 뮤지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유럽 뮤지엄으로도 불렸다. 블랑은 보자르의 컬렉션이 화가들에게 필요한 유럽 양식을 골고루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화가들로 하여금 유럽의 유명 화랑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게 한 후 그 모사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이때도 스페인의 회화가 서른 점 이상 모사되어 프랑스인의 스페인 취향이 컸음을 알게 해준다. 파리의 샹젤리제 궁에서도 1874년 말 앙리 레뇰이 모사해온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을 포함하여 벨라스케스의 모사품 19점을 전시했다. 이에 앞서 샤를 포리옹이 1853년과 1855년 사이에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모사했으며 이 모사품은 1864년과 1870년 사이에 일곱 군데에서 선보여 당시 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블랑은 무리요의 작품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당시 정치적인 상황이 스페인에서 작품을 모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몹시 아쉬워했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
출처: 소와달에스키스 원문보기 글쓴이: 소와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