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인 지관도 홀린 원주시 삼성동 마을
삼새
지관이라 하는 사람은 땅을 꿰뚫어보는 보는 직업을 가진 자라 합니다. 수맥도 보고 산세도 봅니다. 또한 글께나 아는 고수지관은 작명까지도 합니다. 지형을 보는 것을 간산이라 하는데 일명 풍수쟁이 풍쟁이라는 직업은 청산유수처럼 바람 따라 물세 따라 다닙니다.
요즘, 전자지도에 의해 실제 답사하지 않아도 지형의 형상 파악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지관은 명당자리가 있다하면 밥을 먹다가도 애인의 얼굴 한번 쳐다보기커녕 숟가락을 밥상위에 놓고 귀를 쫑긋 세울 것입니다.
직업은 못 속인다는 것은 거기서 나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느 옛날 지관은 방방곡곡 길을 누비다가 길가는 길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웁니다.
“저기 저산 넘어 좋은 자리가....”
직업은 못 속이지. 지관은 패철을 쳐다보다가 길손을 바라보며,
“여보시오, 길을 가는 길손님들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시오?”
“저 모퉁이 동산을 돌아 널 부러지고 둥글 넙적한 너럭바위가 나타납니다. 그곳을 지나서 저 능선을 얼구렁 설그렁 넘어가면 됩니다. 거기서 계곡을 끼고 돌아 내려가면 거북이처럼 생긴 동그란 모퉁이 산자락이 반길 것입니다. 거기서 물방개들이 헛 다리 잡듯 넓적한 활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개울이 보이고 코앞에 보이는 마을이라고 하던데요. 직접 가보지는 못했습니다요”
하는 것이다.
“아하 그러하십니까요! 고맙습니다.”
“이 이야기는 질러가는 길이고요,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소리 없이 짚신을 신고가려면 평탄한 길은 저기 저 물새 따라 내려가다가 삼각지 모래사장이 나타나면 왼쪽 편을 돌아 물길 따라 올라가면 되옵니다. 거기서 한숨을 돌리고 개울을 건너서 마을 어귀 산자락 바위아래에 성황당이 있다고 합니다요. 그곳을 지나면 우측 편으로 마을이 한 눈에 다가온다고 하는데요, 소문에 꼬리를 물어 진짜 봉을 잡았는지 큰 산에는 봉황이 붕장어가 붕붕 거리듯 붕붕 울었다나 그러던데요!”
‘ ㅎㅎㅎㅎ 봉황이라! 봉황이 왜 울었을까! 사랑하다가 아내봉황이 가출을 했냐! 서방님봉황이 바람이라도 났나! 그것은 아닐 터이고 벌을 키우는 주인이 떠나면 벌들이 띠를 두른다고 하는데 그 옛날 고을 장님이 북망산천을 갈 적에 붕붕 통곡 했나! 가봐야지 봉황이면 열일을 제쳐놓고라도 가야지 암 가보고말고!,
지관은 길손이 이야기한데로 물줄기를 따라 걸어간다. 고생하지 않고 얻는 것이 어디에 있던가! 아니지 길은 멀어도 돌아서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똥이 무서워서 피해 가는가! 말이여. 저 능선을 질러서 갈 수 있지만 생고생할 수 도 있지!
세월은 청산유수 인생도 청산유수 발병이 나면 누가 알아주나 쉬엄쉬엄 가는 것이다.
개울가에 물새들이 물고기를 잡느라고 푸닥거리하고 뱀에 놀랐을까! 장기판에 훈수를 두는가! 꾀꼬리 소리에 추임새를 넣는가! 요산 조산에 꿩들은 푸닥거리를 하는지 여기서 꿩! 꿩! 꿩! 거린다. 무시기 꼴뚜기가 뛰니까 망둥이가 껍적거린다고 길조인가 흉조인가 성은 같은데 흥부에 놀부 심보 까치가 울으니 까마귀가 울어 제친다.
배를 부른다, 배부릉산! 개울가에 모래가 많아 언덕을 이루어 사제울이요. 삼각지를 지나 왼쪽 골짜기를 획 돌아가니 물이 와글와글 흘러내린다.
동산 줄기 아래 네 채의 집이 보이는 마을, 소는 개울가 숲속에서 풀을 뜯어 되새김질을 하고 안산 입구 어귀 바위 위에 걸터 앉아 낚시를 하는 어린 아이 삼돌이는 귀한 손님이 오는 줄 아는가, 낚시를 거두고 소의 등에 올라타고는 내를 건너간다.
누가 돌다리를 놓았을까! 아고 고마워라! 그래도 짚신은 벗어야지 짚신을 개나리 봇짐에 매달고 개울을 건너려는 지관의 엉덩이 모습은 오리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얼씨구씨구 건너간다. 작년에 갔던 각설이 엉덩이를 삐죽삐죽 거리며 건너가네! 흥이 앞 질러가는지 앞질러 물을 건너가려는 심사 심상치 않다.
그럼 그렇지! 청포가 낀 돌다리는 매우 미끄러워서...... 바늘이 달린 고슴도치도 미끄럼을 탈 것이다.
돌다리에 한 발을 올려 몸무게를 한쪽으로 싣는 차 단박에 미끄러져 개울 속에서 허부적리는데.... 지관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웃음보가 도야지 오줌보가 되었다.
겁을 먹었는지 지관은 물세를 바라보다가, ‘과연 심상치 않은 동네이로구나!’ 물세를 따라 올라가는데, 저만지 워낭소리와 함께 소를 몰고 어린 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삼돌이가 누구여! 영특한 아이는 마을로 오는 손님인 줄 알아차리고 소의 등에 올라타라고 하는데, 참나 장단지에 소똥이 덕지덕지 묻어 있지 아니한가! 한참 매스꺼운지 킁킁 쿵따리 샤뱌샤바 거리다가, ‘인생사 체면 차릴 것이 뭐 있소. 로마에 가면 로마법 따르라고 하던데..... 때론 어린 손자한테도 배울 것이 있지 아니한가!’
소는 말을 잘 듣는다. 왕방울 눈에 뿔은 사팔뜨기, 어린아이가 워워 앉아 하니까 앉고, 가자가자 하니 덩치 큰 누렁이 소는 저벅저벅 걸어간다. 고 참 신기하도다. 덩치 큰 소가 어린 아이 말을 잘 듣다니. 아이가 먼저 소등을 올라타고 고수지관이 올라타자 지관의 몸이 허풍선 무게인 듯 벌떡 일어서 착 늘어진 왕 불알을 덜렁거리며 간다. 딸랑딸랑 워낭소리 이따금 쇠파리가 달려드는지 꽁지로 자신의 장 단지를 채찍을 한다.
소를 타고 개울을 건너가는 심정은 용마 타는 것보다 기분이 짱하였으리라! 소다리는 유속이 없는 물속에 들어가고 소머리와 소 등만 보이는데 지관은 겁이 많은지 어린 아이 허리를 꼭 잡고는 눈초리를 설설 맨다.
“어린 아이는 이름이 무엇인가?”
“돌다리를 건 널 때는 필히 세 번 살펴보라! 해서 삼돌이라 합니다.”
“하하 그런가! 그럼 이 마을도 세 번은 살펴보아야 하겠구먼!”
“ㅋㅋㅋㅋㅋㅋ ”
마을 어귀 서낭당 길목에 다가오자 아이의 워워 소리에 소의 발길을 멈춘다. 지관은 소등에서 내려와, “고생하였네!” 소를 쓰다듬고는, “마을에 왔으면 인사는 해야지!” 바위가 있는 성황당 돌탑 위에 돌을 올려놓고 절을 하고는 눈을 돌려 마을을 쳐다본다.
산세를 보아하니 별 다름 없는데 분명 길조인가 싶으이. 좌청룡 우백호 왼손 짜기 높은 산이 봉황이 울었다는 산인가 싶으이. 그럼 저 아래가 봉황새 꼬리 날개 끝 봉미, 그럼 저산을 올라가보자 안산은 어떻고 백호가 잘 생겼구먼! 학자나 교육자 관장 터는 분명한 것 같은데...... 세 번은 살펴봐야 할 것 같도다.
마을 뒷동산 위에 서서 바라보니 한눈에 안산이 들어온다. 대안백천에다가 오봉과 사린이라.
어허 안산이 신비롭구나! 더 올라가 보자.
역시나 다를까! 저 멀리 치악산 시루 봉이 보이도 그 아래 넓은 읍내가 보이고 우측 편으로는 문필 삼봉이 보이는구나! 안산이 춤을 추는구나! 그러나 봉황은 분명 환희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물줄기를 보니 북쪽으로 흘러가는구나!
인생은 삼박자 삼 세 번 세 번 살피고 결정하라. 이 마을이 그런 마을인가 싶으 이!
마을 어느 울타리 굴뚝새는 하루해가 넘어가는 것을 아는지 둥지 찾아 굴뚝굴뚝 거리며 날아다닌다.
지관은 뼈가 없는 오징어 목처럼 고개를 흐느적거리더니, “세 번은 살펴봐야 알 것 같은 "석 삼(三)에 살필 성(省) 삼성이 동네이구나!” 하면서, 크고 모두 편안한 내는 귀하게 다가오는 울타리 물이요, 다섯 개의 봉우리와 네 개의 이웃은 클 보배로울 물이로다. 지관은 떠나려 하는데 저녁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다가온다. 잘 가라는 소리인지, 호랑이 내려온다고 발길을 재촉하라는 것인지 고목나무 가지위에 바짝 붙어서 부엉이 붕붕 거리니, 고수지관은 더 더욱 달빛 속에 윗마을 주막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이 석 삼(三)에 살필 성(省)이 되면서 동자 동자 내 동자야, 금동이야, 은동이야, 옥동이야 하면서 자식을 길러 결국 면장과 샌님이 탄생하였으니 예사로운 지명은 지인을 탄생시킨다는 이야기 오늘날 과히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고수지관이 바로 풍수지리 대가 신라말 승려 도선국사(827-898)라 하는데....... 속성은 금씨요, 김천 청암사 창건 15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도 눈에 가시가 씌었는지홀렸을 법한 세 번을 살핀 동네 삼성동이라 전한다.
지명은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조 25년 己巳1749년 사제면 삼성동이 등장한다. 그런데 석 삼(三)에 별 성(星)이 등장한다. 어느 족보에도 등장하지만 영조 36년에 발행한 여지도서에도 등장한다. 금물산면 지금의 거무산 마을이라 하는데 대안리에 있는 거무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지금의 흥업면이 되고 삼성동은 사제면에 흡수되어 있다. 사제면(沙堤面) 삼성동(三星洞)이다. 도선국사의 석 삼(三)에 살필 성(省) 전래이야기로 보아 지명의 연대는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오늘 날 삼성동에 "성" 자가 논란이 많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살필 성(省)이라 하고 영조 25년 기사년에는 별 성(星)자 족보와 함께 등장 하는 것이다. 1910년에는 삼셩이가 등장한다. 이때도 삼성이 석 삼(三) 별 성(星)이 등장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어린 시절 마을을 부르기를 “삼새, 또는 삼새마을” 이라 하였다.
'삼새에는 누구네 장가 가던데요. 삼새에는 누가 돌아가셨다는데요."
마을 들판에 억새가 많았다하여 새, 삼새라는 구전이 있었을 법 하나 오리무중이고 삼성동이란 마을은 1980년 대 와서 활성화되었지만 지금도 어르신들께서는 아직까지도 삼새 마을이라고 한다.
살필 성(省)이 맞을까요, 별 성(星)이 맞을 까요. 별이 등장 하지말라고 일제시대에 살필 성(省)으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선시대 영조 시대에 등장하는 별 성(星)이 맞는지, 아니면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 승려이자 지관으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살았을 때 전해오는 원래 지명 석 삼(三) 살필 성(省)으로 1910년 이후에 원래 지명으로 회복 되었는지 자료상 부족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현재는 살필 성(省)으로 되어있다. 마을에서 내려오는 유래를 참작하여 설화형식을 유용하였다.
삼성동이라는 마을은 선비나, 도선이나 지관이나 모든 전래로 보아 도선국사로 향하고 있다. 세 개의 별이 문안골 동그란 산, 신배미골 앞산이라 하는데 이것도 역시 도선국사에 집중되고 있다. 도선국사가 패철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으면 지관으로 보았을 것이고, 선비 갓을 쓴 모습이었으면 선비로 보았을 것이다. 머리는 스님에 상스러운 지팡이들 들고 행보하였으면 백성들은 국사로 보았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원주 삼성동은 풍수지리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마을 방문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물줄기는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다. 정상적인 물의 흐름은 동에서 서로 향하는 것이 정설이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목은 나무 동쪽 춘동이고, 화는 불 남향 여름이다. 토는 흙 남서향 초가을이고, 금은 늦가을 서북이고, 수는 겨울 물로 북향을 관장한다. 자연의 순리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순환으로 보아서 물줄기는 동에서 남서에 서로 흘러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것을 역행하면 풍파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풍수는 바람과 물로 물의 흐름 물세와 산의 형상 산세가 중요한 자리를 찾이하고 있다.
인생 삶의 의미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 자연이 인생을 가르친다. 물길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물은 곧 바로 흘러가기도 하고 웅덩이를 만나면 물을 채우느라 쉬었다가 넘치면 흘러서 간다. 때로는 돌고 돌아서 가기도 하고 막다른 물길을 만나면 돌아서 되돌아간다. 역시 인생도 세 가지 물길과 흡사하며 삼 세 판이다. 일보후퇴 이보 전진을 위해 진퇴양난 속에서도 모질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길이다. 때에 따라서 질러가기, 돌아가기, 실패하면 되돌아가기다. 질러갈 때는 질러가야 하고 돌아갈 때는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막다른 길목이 나타나면 되돌아가기를 해야 한다.
보잘 곳 없는 곳이지만 고수지관 도선국사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세 번을 살피던 삼셩, 삼성이, 삼새, 별 성(星)인가 살필 성(省)인가 삼성동 마을, 살아있는 인생이라면 한번쯤은 찾아와 간산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시대에 따라서 바뀌는 지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 지명이 담긴 마을로 마을의 전래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마음이 융화되고 새로운 지혜 발상전환의 인생 기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맺음말
도선국사의 행보를 알아야 한다. 질러가는 길이 있지만 승려이자 풍수가로 유명했던 도선국사는 바람따라 물따라 간산을 했을 것이다.
원주에서 삼성동으로 오려면 산을 넘어와야 한다. 지금은 차가 다닌다. 옛날 도선국사는매지천과 서곡천이 모여 사제리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갔을 법 하다. 모래언덕이 있는 사제리에서 산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 대안백천의 물줄기를 따라 올라왔을 것이다.
大安百川은 來落公이요, 대안백천은 래락공이요,
크고 모두 안락한 내는 귀하게 다가오는 울타리요,
五峰四隣은 巨寶水라. 오봉사린은 거보수라!
다섯 개의 봉우리와 네 개의 이웃은 클 보배물이라!
대안백천이란! 지명을 표현했을 수도 있겠으나 대안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크고 모두 안락한 물줄기를 표현한 냇가를 짐작할 수 있다. 래락공 여기서 락은 떨어질 락의 의미도 있지만 울타리 락이다.
오봉은 삼성동의 안산에 해당된다. 마을에서 가까운 산이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고 동남간 동쪽 삼봉이 다섯 개 봉우리 앞에 약간 높이 형성되어 있다. 다 섯개의 봉우리는 눈높이에 위치하며 모나지도 않고 너울 너울 춤을 추고 있다. 야심에 감상해 보면 뚜렷하게 오봉이 나타난다.
현재 개발로 왜곽순환도로가 개설되고 낮은 고개가 형성되어 차가 다닌다.
삼봉은 대게 문필 삼봉의 의미를 부여한다. 문필봉이 잘 생기면 그 주위에 학자나 샌님, 문필가가 나온다는데.......... 안산 아래는 마을 어귀 바위 서낭당 자리가 있었다.
네 개의 이웃은 크게 나누면 동덜미와 새말, 돼니와 삼새 삼성이 삼성동을 부여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게는 삼성동내 통골. 아랫담, 윗담, 안산 안골, 네 채의 집이 존재했을 법 하다.
이웃 隣(린)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마을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이나 동덜미와 새말, 돼니와 삼새 삼성이 삼성동 마을에 각각 한 채가 존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웃 린의 의미는 가까이 살아가는 이웃을 표현했을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줄기와 지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한다. 개발과 정치 정권 권력이 깔려있다.
신라의 도승이자 풍수가로 알려진 도선국사는 세 번 살펴본 동네 삼셩, 삼성이 三省洞이란 마을이 탄생된다. 그 이후 조선 영조 25년 살필 省(성)에서 별 星(성)으로 개명한다. 족보에도 등장하지만 또 다른 문헌에도 표기된다. 아마 그 지방 후손들이 잘 되라고 별 星으로 개명한 것이 분명하다.
1910년까지 三星洞으로 사용하다가 일정시대에 원래 상태 三省洞으로 개명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일본지식인들은 좋아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의 말살정책인 산에 비수를 꽂고 개명한 사례들이 대한민국 국토에 산재되어 있다. 쇠말뚝과 태전을 대전, 무릉도원인 덕도원에서 덕두원으로 개명하였다.
남이 잘 않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 아직도 전래되어 한국민들의 일부는 그 습성을 가지고 있어 대단히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힘 없는 백성은 자유가 없는 일개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젠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 이번 기회에 지명의 유래를 통하여 각 지명들이 제자리 찾기를 기원해 본다.
지명과 물세들이 바뀌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산세는 변함이 없는데 물세와 지명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뀐다.
즉, 시대에 따라서 숭배되는 사상과 배척과 말살정치, 개혁과 개발에 의해 지명은 물론 물세들이 변화되고 있다.
원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 비로봉이다. 자애로움을 상징하는 비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별과 태양, 겨레는 물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광명과 숭배사상이 시대의 상황에 따라 적용이 되어왔다.
원주 삼성동이란 마을 지명도 이에 해당이 된다. 영조 25년 (己巳年)에 별 성(星)이 등장한다. 원래는 삼성동의 “성” 자가, “살필 성(省)”이었는데 영조시대에 광명사상으로 “별 성(星)” 개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족보에도 나타나고 있다. 마을에서 최고로 가까운 3개의 안산 봉오리가 존재하고 있는데 하나는 개발이 되어 사라졌다.
이어서 태양과 북두칠성인 별의 숭배 사상으로 이름에도 등장된다.
어머니께서 동생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 적에 몸이 하도 아프시고 별나서 별선이란 이름을 지었는데, "엄마, 엄마!" 하는 어린 나이에 죽어 오봉산 어느 자락에 묻었다고 한다. 소인배가 늘 넘나드는 곳으로 친동생의 넋을 새기게 된다. 태산이란 선조와 별나다해서 별선 별 星을 따라갈 예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으로 자료 글과 사진은 퇴고와 업그레이드 합니다.
훗날 문필가가 탄생한다는 문필봉 또는 삼봉 동남쪽에 펼쳐진다. 고향에서 본 좌향은 소설가 박경리문학관 매지리 회촌방향이다. 맨 오른쪽 삼봉이래 한라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동북방향에 배부릉산 그 아래 봉현과 개울 건너 사제리 수용소, 우측 기슭에 등골, 좌측아래가 봉미 만종이 된다. 사제리 수용소--홍가의 친구가 있었다. 사제리 수용소는 6, 25 당시 난민을 수용하여 배급하고 교육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사제리 수용소라는 지명이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방앗간이 운영 되었으며 지금은 퇴색되었다. 지금도 사제리 수용소라 한다. 이 근방에는 육민관 중학교 자리가 있었다. 흥업 농업 기술원 자리는 밤나무들이 많아서 밤들 밤들수용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2013년 현재 원주외곽순환공중도로가 마을 앞에 펼쳐지고 있다. 저 멀리 배부릉산 봉현과 등골이 보이고 무실 양지마을이 우측으로 펼쳐진다. 앞산에 다락논들 넘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치악산 비로봉과 향로봉이 가물가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