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종영된 “모범택시 2”는, 시청률 21%로 절찬리에 상영되어 드라마 부분 1위를 차지하고, 후속으로 모범택시 3가 방영되기를 많은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네플릭스에서 방영을 준비하는 드라마 “돌풍”은, 재벌과 결탁한 대통령을 심판하고 정치판을 바꾸고 싶은 국무총리를 대적하는 경제부총리는 날카로운 지성과 담대한 소신을 가진 자입니다. 그들이, 정치의 정점에서 치열한 정쟁을 하는 것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전개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대에 있어서 인기를 끌었거나 인기를 끄는 드라마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슴에 품은 소망이나 한을 풀어준다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신 묵시록이지만, 그 전개를 보면, 마치, 최고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 미래의 상황을 읽는 자에게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서 본문 당시의 시대상황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자료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 성도들은 로마의 네로황제로 인해 핍박을 받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와의 접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끌려가서 콜로세움이라 불리는 원형 경기장등 건축하는 장소에 동원되었습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은 왜? 성도들과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로마의 미치광이 황제라고 불렸던 네로의 행위를 중지시키지 않고, 그로 인해 비참하게 죽게 했을까요? 이것은, 오늘의 우리 뿐 아니라, 당시의 성도들이나 유대인들이 동감하는 의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가서,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축복을 바라는 생각 속에서 믿음과 삶을 나누는 이원론적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어찌하여 성도들과 유대인들이 참혹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겁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당시에 많은 교회들이 곳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교회만을 수신자로 정했다는 겁니다. 여기서의 “일곱”은 성경에서 상징하는 완전수이며, 전체를 상징하는 보편수를 말합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드로아”, “골로새”, “히에라볼리”등 각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선택된 일곱 교회는 세상 모든 교회의 대표성을 갖고 있기에, 그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계시는 세상 모든 교회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시록을 읽으며, 세상 종말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고, 지적하시는 상황들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인 우리의 삶을 “오직 예수!” 영원불변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아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성도인 우리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불변합니다.
세월은 빠르게 변하고 발전합니다. 자동차 타이어 광고에서, “타이어는 어디까지 왔나?”라는 물음에, “넥센까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월이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자동차 타이어 뿐이겠습니까? 하지만,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서신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가 누구이며,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이러한 본서를 사도 바울의 서신서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의 인사가 길며,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가 본문 이하의 8절까지 이어짐으로, 매우 장황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발신자에 대한 소개가 없다면, 본서는 당시의 일곱 교회만을 위한 서신으로, 여기에 기록된 많은 상징적이고, 묵시적인 표현들은, 당시의 수신자들에게만 국한된 내용이 될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한 계시록은, 과거의 사실만을 밝히는 역사서가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앞의 1절의 시작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며, 서신이 기록된 목적을 정확하게 밝힙니다. 또, 본문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함으로, 이 서신의 내용이 사도 요한 당시로 국한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제각기의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나름대로 이해할 것이 아님을 명명백백하게 밝힙니다. 이러한 기록은,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죽은 신앙이 아니며, 성경 속의 이야기가 되는 그 배경은 당시의 시대상황이지만, 그 의미는 말씀이 기록될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과 앞으로의 미래까지도 언급되는 진리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어제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내일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구약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도,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이 있는 곳에 함께 계셨습니다. 또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살며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곳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갈 때나 육체의 나약함에 있을 때에나, 언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역사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어제도 나와 함께 하셨고, 내일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전에도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심으로, 삶 속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합니다.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한결같이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난과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된 증인”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나사렛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성으로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언약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딤후 4: 7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이 또한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께 충성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행한 충성은, 어떤 것입니까?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을 지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개종하기 전, 유대인으로 있을 때도 믿음이 굳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충성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 9: 15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맡겼습니다. 곧, 사도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이라는 위탁물을 받았고, 그 위탁물을 평생동안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당시, 주변에서 사도 바울의 생명을 위협했고, 또,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서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 구원받음을 전했고, 또, 영지주의라는 철학사상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위탁받은 복음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께 위탁받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은 당연한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어찌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감언이설과 궤변으로 우리가 나사렛 예수께 받은 복음을 깨뜨리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논리적이고 이미지적인 활동으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복음을 위협합니다. 이러한 상황이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도 바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한 것과 같이, 우리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함에 있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약 1: 15을 보시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허무맹랑한 말로 현혹시키는 말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이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며, “은혜와 평강”을 빌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망각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 이유가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중간을 보시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십자가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을 믿고 고백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으레껏 목회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제사장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틀린 겁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를 중보하는 직분인 것처럼, 성도인 우리는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보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벧전 2: 9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만이 누리는 종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사도 바울과 같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그분이 메시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이러한 경험이 없이, 어떻게 세상을 향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잘 이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불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불변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를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와 그 사랑에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성도된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