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기는 했지만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려니 전에 써 두었던 글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지금은 내가 제사를 모시면서 그 순서를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순서가 바뀌거나 아예 한 두가지 절차를 빼 먹기도 한다.
그래서 기준을 삼고자 자료를 만들면서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배웠던 내용을 보태어 써 둔 글이다.
혹시 앞으로도 필요로 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 늦게나마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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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사 론
1. 제삿날
아무리 전통예절이라고는 하나 예법은 세월에 따라 빠른 속도로 변한다.
나의 조부모 사망 시에는 우리 아버지는 불편한 굴건제복에 3일간을 잠 한숨 못 주무시고 시신을 모신 방문 밖에서 지팡이를 짚고 곡을 하셨다.
이후 삼년간(실지로는 만 2년) 집안에 제청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밥을 떠다 놓았으며,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 보름날 아침마다 부모님이 상복을 입고 제청 앞에서 곡을 하셨다.
나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오는 사람 없는 새벽 1시경 잠들었다가 5시경 일어났다. 옛날 같으면 집안 어른들께 많을 꾸중을 들을 일이다.
또, 제사 관련하여서는 종교문제, 가치관 문제 등으로 집집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떠나서 일반 가정에서 전해 내려오는 제사문제를 다뤄볼까 한다.
우선 내가 제사 관련하여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삿날에 관한 것이다.
먼저 퀴즈 문제 하나!
1. 제사는 돌아가신 날짜에 지내는 것이다.
2. 제사는 돌아가시기 전날 즉, 마지막 살아계셨던 날짜에 지내는 것이다.
-제삿날은 당연히 돌아가시기 전날 지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2번이 맞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답은 1번이다. 나는 이 부분을 말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전통예절에 관하여 교육도 받아보고 여러 책을 찾아 읽어본 바에 의하면 본래 제삿날은 돌아가시기 전날이 아니고 돌아가신 날이 맞다.
단, 그 시간이 돌아가신 날을 기준하여 가장 신성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그날이 시작되는 첫 시간이 옛 시간 기준으로 자시(子時)이며, '자시'는 오늘날의 시간으로는 '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 사이' 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전날 음식준비 등을 하고 기다렸다가 자시인 밤 11시를 넘긴 늦은 시간에 제사를 지냈으므로 돌아가신 날의 바로 전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국민의 대부분이 한 마을에 살며 농경산업에 종사하던 옛날과 달리 사회가 복잡해진 요즘에는 밤 11시 이후에 제사를 지냈다가는 먼 곳에서 온 가족들은 돌아가기 어렵고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많다.
그래서 조금 일찍 지내기를 바라다보니 10시, 9시로 빨라지던 제사 시간이 요즘에는 아예 저녁밥 먹을 시간에 맞추어 지내고 식사 후 일찍 해산을 하는 가문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많은 전통예절 학자들이 지적을 한다.
생활의 편의상 시간을 앞당기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렇다고 전날 일찍 지내는 것은 제삿날이 아닌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이므로 돌아가신 조상은 제삿밥을 못 얻어 잡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 얘기가 어차피 시간을 못 지킬 것이라면 날짜라도 제 날짜를 지키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몇 번 듣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여 몇 년 전부터 가족들을 설득하여 돌아가신 날 저녁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2. 다양한 제사
먼 옛날 보통의 백성들은 아침 일찍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여 어두워 일하기 곤란할 때까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하루 세끼 밥 먹고 살기 힘들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 한들 복잡하고도 형식적인 여러 가지 예법에 따라 장례 모시기 어려웠다, 아니 힘드는 게 아니고 할 수가 없었다. 제사도 마찬가지이다.
일 안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제왕이라든가 귀족 등 최상류층 지배계급이나 되어야 부모 돌아가시면 산에 묘를 만들고 움막을 지어 시묘살이가 가능했다. -아마 시묘살이도 극 상류층에선 남을 시키고 직접 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일반 백성이 삼년간 시묘살이를 했다면 삼년 후 집에 돌아와 보면 가족들은 모두 굶어죽고 한사람도 살아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민초(民草)들은 가족이 죽으면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가서 마을 외진 곳에 있는 특정장소에 가져다 버리고 오면 되었다.(예전에 ‘전설따라 삼천리’에 종종 등장하는 곳.)
일반 백성들조차 모두 산소를 만들고 장례를 치렀다면 유구한 역사 많은 인구에 좁은 땅은 전 국토가 묘지로 빈틈이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장례를 모실 시간과 손님접대에 필요한 음식 준비, 산소 조성에 필요한 노동력을 도저히 동원할 수가 없다.
차츰 사회가 발달하여 어느 정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상류 문화가 하향 평준화되어 지금은 누구나 장례, 제례를 모시게 된 것이다.
제사를 모시는 범위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봉사이고 그 윗대는 5대조, 6대조 이렇게 올라가는데 5대조 이상은 숫자가 너무 많아 일일이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일년 중 추수가 끝난 가을에 하루 날을 잡아 산에 가서 산소를 돌며 시제로 모신다.
이런 풍습도 통치이념인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조선시대부터라고 한다.
현재는 국가에서 이런 문제를 전혀 통제를 하지 않지만, 한 때 박정희 정권 초기에 관혼상제에 너무 많은 돈을 들여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 경제에 부담이 된다고 보아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홍보를 통하여 권장을 한 적이 있었다.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관혼상제 부분이 다 얘기가 되었지만, 제례 부분만 살펴보면 대부분 어려서 부터 얼굴을 본적이 있는 부모, 조부모 까지 2대봉사를 하도록 되어있다. 나는 이것이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다른 방법으로 제사를 모시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예를 들면
1. 일년에 한번 한식날 간단한 음식을 차려 산소에 가서 성묘를 겸하여 절하고 끝내기
2. 설날과 추석에 지방을 죽 써서 붙여놓고 차례만 지내기
3, 연 중 첫 번째 조상 제삿날(또는 아버지 제삿날) 모두 같이 한꺼번에 지내기
4. 제삿날 근처의 주말로 앞당기거나 뒤로 미뤄 지내기
5. 명절 연휴나 휴가철에 휴양림이나 콘도 빌려서 모여 제사지내고 즐기기
6. 아예 지내지 않기
등등 종교관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풍습은 빠르게 변한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소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 알고나 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3. 문상예절
십여년 전만 해도 조상이 돌아가시면 집으로 모셔서 장례를 치르는 가정이 많았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장례식장으로 모셔서 지내는 것으로 정착되어있는 것 같다.
집에서 장례를 모시면 음식 장만, 손님 접대 등에 넓은 장소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요즘은 시골에도 절대적으로 일을 거들어 줄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문상절차를 보면
1. 방명록이나 조의록 기록 후 외투와 모자를 벗음.
2. 조문(=문상)-원칙적으로는 망인의 염이 끝나고 상주가 상복을 갖춰 입은 후 문상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 한다(옛날에는 흰 두루마기의 한쪽 팔을 빼고 입어 돌아가신 후 얼마되지 않아 옷을 제대로 입을 경황이 없음을 나타내어 아직 염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지금은 장례식장에 모시자마자 조문을 할 수 있으나 염이나 종교의식 등을 하는 동안에는 끝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선 상주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 향을 하나 집어 불을 붙여 머리 위로 들었다가 향로에 꽂고 잠시 묵념(옛날에는 곡을 하였음)을 하고 천천히 두 번 절한다.
-흰 국화꽃이 준비되어있는 경우는 꽃 한송이를 들어 꽃이 나를 향하게 영정 앞에 놓는 것이 원칙이나 이미 놓여있을 것이므로 선례에 준하면 될 것임- (분향과 헌화는 고인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
다음엔 상주를 향하여 한번 절하는데 문상객이나 상주 모두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그냥 나오기 어색하면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드릴 말씀 없습니다.’ ‘망극하시겠습니다.’ 정도로 간단히 짧게 말하며 가까운 집안간이 아니면 돌아가실 때의 상황 등을 자세하게 캐 묻는 것은 실례.
3. 조의금 전달 - 보통 마련된 부의함에 넣지만, 상주가 여럿이고 친목회 등 단체의 큰돈일 경우는 따로 불러 소속 상주에게 직접 주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칫 음식만 먹고 조의금 전달을 잊어서 집에 왔다가 뒤늦게 다시 가야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일!
4. 음식-문상 후 미리 준비된 음식을 먹고 나오는 것이 예의다. 다만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거나 웃고 떠드는 것은 곤란하며, 특히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거나 ‘위하여!’를 외치는 것은 상가에 큰 실례가 된다.
5. 귀가-상주는 바쁘고 피로한 상태이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알리지 말고 조용히 그냥 나오는 것이 좋다.
4. 제사상 차리기
보통 5줄을 권장하고 있다. 과, 채, 탕, 육, 술잔과 메(밥)
앞으로부터 ‘과’는 과일과 과자류로 왼쪽부터 조(대추), 율(밤), 시(감), 리(배), 사과, 약과, 산자 등이고, --가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 가문은 조율시리로 하나 다른 가문에선 조율이시로 감과 배가 순서 바뀌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아예 제상위에 놓는 순서를 오른쪽부터 시작하는 가문도 있다. 과일 순서를 외우기 어려우면 씨의 숫자를 생각하면 아주 쉽다. 대추-1왕, 밤-3정승, 감-6판서, 배-8도 관찰사 또는 여러 신하, 사과는 옛날에는 없던 과일로 그 다음으로 치며 바나나, 수박, 파인애플 등은 놓기 편한대로 놓으면 된다. 제사상 밑에 놓아도 됨. 구태어 순서를 정하자면 나무에 달리는 과일 우선--
‘채’는 채소로 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를 놓고 가운데에 삼색나물(도라지-뿌리, 시금치-잎, 고사리-줄기)을 기본으로 물김치.
‘탕’은 육탕(왼쪽), 소탕(두부 가운데), 김, 간장, 어탕(오른쪽) 등
‘육’은 쇠고기나 돼지고기(산적), 조기, 육전, 어전, 채전 등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술잔과 밥, 국그릇을 놓고 그 뒤에 영정이나 지방을 모신다.
(모든 제물의 육류는 항상 왼쪽, 어류는 오른쪽이며 가운데는 채소, 두부 등)
물론 이 외에도 촛대, 시접(수저그릇), 향로, 향합, 모사, 퇴주그릇, 술병 등 수도 없이 많다.
제사상을 아무리 많이 차린들 실지로는 돌아가신 분이 드실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 먹는 것이다. 돌아가신 후 진수성찬은 별 의미가 없고 살아계실 때 좋아하시는 반찬 한 두가지가 더 효도를 하는 것이다.
생전에 대접한 적이 없는 진귀한 음식을 구하여 사후 제사상에 넘치게 차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가 산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고인의 제사상에도 술을 올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제사는 지나친 형식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살만해진 요즘은 그 많은 음식을 차려놓을 상도 구하기 쉽지 않다. 기본 예의는 정성된 마음이며 밥과 술(또는 차)을 대접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먹을 것도 생각하여 검소하게 차릴 일이다.
제사상의 구성을 제사절차와 견주어 살펴보면 처음에는 약주 대접, 그 다음 식사 대접, 그리고 후식이다. 그래서 맨 안쪽에 술안주가 될 만한 고기, 전, 등이 배열되고 다음에는 밥 반찬인 채소와 탕류가 진열되고 가장 먼 맨 앞쪽이 후식에 해당하는 과일과 과자류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제사상은 밥과 반찬, 술(차)과 안주, 과일류만 있으면 기본 형식은 갖춰진 것이다. 앞으로 제사상은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중심으로 밥상 하나에 오를 만큼 더욱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풍습도 따라 변한다. 내가 먼저 남에 앞서 물에 뛰어드는 펭귄이 되어보자. 결국 망설이기만 하던 모든 펭귄도 따라 물에 뛰어든다. 물이 무섭다고 뛰어들지 않으면 굶어 죽고 말지!
거기다가 앞으로 불과 몇십년 안에 제사 지내는 풍습은 거의 다 사라질 것으로 본다.
한자녀 가정이나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 가정이 많은데 오는 사람 없이 자기 혼자 제사 지내려고 여러가지 음식 준비를 하고 혼자 제사를 지내기는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깝다. 집안이 모두 한 마을에 모여 살던 농경사회에서 잘 유지되던 제례 풍습이 농촌이 와해되면서 제례 풍습도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 어릴 때만해도 제사 준비에 한달 전부터 모두 집에서 술을 담그고, 두부를 하고, 식혜와 떡을 하며 송화가루를 모아 다식을 박고 집안 어른들 몇십명이 모여서 지내던 제사가 지금은 많이 변하지 않았는가?
<제사 관련 용어>
기본적으로 제상은 북쪽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택 구조상 제상을 어느 방향으로 놓았던지 병풍이 있는 쪽을 북쪽으로 보고, 병풍을 바라보고 왼쪽을 서쪽, 오른쪽을 동쪽으로 보며 왼쪽이 우선 서열이다.
ㅇ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두라는 것이나 조율시리의
순서를 따르면 무시 됨.
ㅇ 조율시리(이시)(棗栗枾梨) : 왼쪽부터 대추, 밤, 감, 배(배, 감)의 순서로 한다.
ㅇ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것(김치)는 동쪽에, 익힌것(나물)은 서쪽에 둔다.
ㅇ 좌포우혜(左脯右醯) :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둔다.
ㅇ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으로, 고기는 서쪽에 둔다.
ㅇ 두동미서(頭東尾西) :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한다.
ㅇ 건좌습우(乾左濕右) :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쪽에 둔다.
ㅇ 면서병동(麪西餠東) : 국수는 서쪽에 떡은 동쪽에 둔다.
ㅇ 반서갱동(飯西羹東) : 메(밥)은 서쪽에, 국은 동쪽에 둔다.
ㅇ 남좌여우(男左女右) :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선다.
5. 기제사 지내기
기제사는 애사일까, 경사일까? 당연히 돌아가신 분과 연관된 문제이니 애사일 것 같은데, 전통학자들 견해로는 애사는 아니라고 한다.
돌아가신 후 장례 관련한 모든 제례로부터 탈상 시기까지는 애사로 보지만 그 이후는 경사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애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위기를 가볍게 하여 농담도 해가면서 가족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분을 기리고 웃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제사를 올릴 일이다.
자칫 어린이들이 숨도 크게 못 쉴 만큼 너무 엄숙하여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로 흘러서 기피하고 싶은 제사를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얘기이다.
(* 단설과 합설 : 단설은 돌아가신 분 한분만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함이고, 합설은 그 배우자까지 두분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분분하여 율곡 이이 같은 분도 단설을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체로 합설을 하고 있다.)
기제사의 그 대략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 진설 : 제상에 음식을 올리고 마지막에 지방이나 영정을 모시고 촛불을 켬. 제상 앞에 작은 상을 놓고 그 위에 축문, 향로와 향합을 놓으며 작은상 앞에 모사그릇, 퇴주그릇을 그 오른쪽에 주전자를 놓는 것이나 모사그릇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을 시는 퇴주그릇을 같이 사용함.(모사그릇을 작은상 위 오른쪽에 놓기도 함.)
※ 모사그릇 - 그릇에 흙과 풀을 조금 담아서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산소에서 제사를 올릴 시에는 직접 땅에 술을 부으면 되므로 필요 없음.
※ 제상의 방향 - 북향이 원칙이나 아파트나 집의 구조상 곤란할 시는 어른을 모시는 자리를 생각하여 편한 방향으로 하면 될 것임.
(1) 분향재배 : 제주가 제상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분향을 한 뒤 재배
(향을 피우는 것은 혼백(魂魄)이 떠도는 위(하늘)에 고하는 것이라 함.)
(2) 강신재배 : 신위(神位=조상)께서 강림하시어 음식 드시기를 청하는 것으로 제주가 제상 앞에 나아가 좌집사로부터 술잔을 하나 받아 우집사가 술을 술잔에 차지 않게 따라주면 제주는 이를 모사그릇에 3번에 나누어 붓고 빈잔을 좌집사에게 돌려주고 잔이 제자리에 간 후 재배함. (술을 모사그릇에 붓는 것은 체백(體魄)을 모신 아래(땅)에 고하는 것이라 함)
* 모사그릇 - 땅을 상징하므로 별도의 그릇에 흙을 담아 놓고 써야 하나 번거로운 탓인지 퇴주그릇(술잔에 부었던 술을 쏟는 그릇)에 같이 사용
(3) 참신재배 : 이제 조상신을 모셨으므로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參祀者)가 재배함.
※ 참신재배 후 ‘진찬’이라 해서 메와 갱 등 더운 음식을 이때 올리기도 하나 번거로운 탓인지 요즘은 미리 음식을 모두 차려놓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
(4) 초헌 : 제주가 처음으로 술잔을 올림. (이때 술잔에 술을 채우고 향로 위에 술잔을 세 번 돌린 후 좌집사에게 술잔을 넘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어느 책에도 근거가 나와 있지 않은 잘못된 예법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함.) 요즘은 종부와 둘이 같이 잔을 올리기도 함(이때는 집사 대신 종부가 술을 따라도 무방함)
※ 술잔을 올린 후 예전에는 여자는 필히 4번 절하였으나 요즘은 남녀평등 시대에 맞춰 남자와 같이 2번 절하는 사람이 많음.
(5) 계반삽시 : 메(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동쪽을 향하게 하여 꽂음.
(이때 젓가락을 적(=구운고기)이나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위에 놓아두기도 함.)
※ 항상 수저에 손을 댈 때에는 제상 위에서 수저를 가볍게 세 번 가지런히(=정저)한 후 놓음
※ 가문에 따라 더운 음식인 메와 갱을 이때 올리기도 하고 계반삽시를 ‘유식’ 후에 하기도 함.(고인의 생전 음주 습관이 반주형이면 ‘초헌’ 후 계반삽시, 음주 후 식사형이면 ‘유식’ 후 계반삽시를 하면 어떨지?)
(6) 독축 : 제주이하 모든 참사자가 엎드리고 축관이 축을 읽는 것인데, 요즘 한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무슨 뜻인지도 잘 몰라서 한글 축을 읽거나 모두 엎드려 묵념으로 대신하기도 함.(독축 대신 ‘어머니 마음’ 노래를 녹음하여 듣거나 자손 중 한 사람이 망자에게 편지를 써서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독축이 끝나면 제주는 재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