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에 관한 시모음 20)
송년의 파도 /이원문
기다려 찾아 왔나
보내서 떠났나
찾아 오고 가는 세월
누가 밀고 당겼나
가는 해에 싣는 마음
또 한해가 그 한해
오는 해에 싣는 마음
무엇이 얹어질까
큰 욕심 작은 욕심
오는 세월 기다리고
가는 해에 잃은 욕심
부딪쳐 부서진다
섣달그믐 /송주은
섣달그믐 아침
범어사
어제 그제
흐린 하늘 비가 왔고
오늘은 청명하다
겨울인지 봄인지
떨어진 동백꽃 꽃잎
무색할 만치
포근하다
올라갈 땐 대나무 숲 옆길로
돌아 올라가고
나오는 길에는
일주문을 지나서
곧바로 나온다
풍경 소리 잔잔히
울린다
한 해를 보내면서 /藝香 도지현
찰나가 모여서
겁의 세월을 만든다고 하더니
새해 원단 당긴 시위가 쏜 살은
눈 깜짝할 사이 세월 지나
한 해의 끝자락이란 과녁을 맞힌다
과녁은 맞히었건만
쏜 살을 뽑아 보니 텅 비어
두드리면 댕댕하고 울릴 것 같은
빈 항아리뿐이라
채우지 못한 삶이 회한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 가벼운 입으로
뱉어 놓은 말이 독을 묻히지 않았나
누구의 가슴에 그 독이 아픔이 되어
눈물을 쏟지는 않았을까
스스로 깊은 성찰을 해보는데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다음 해에는 튼실한 씨앗을 뿌려
정성스럽게 가꾸어 아름다운 꽃 피우고
토실한 열매를 맺어야겠다, 다짐하곤
스스로 지키지 못해 늘 후회하는데
묵은 해를 보내며 /진향 윤춘순
묵은 해를 보낼 때면
새해를
새롭게 품겠다고 마음이 먼저 앞서진다
기도가 모여드는 그곳에서
고개를 들고 神을 찾다가도
눈을 감고 감사 기도드리다가도
가슴에 손 얹고 염원하다가도
괜히 코끝이 시큼 거리면
마음 열고 다가갈 수 있는 神이 있기에
언제나 강물처럼 심신은 평화롭다
문뜩,
인파 속으로 눈길 돌리다 눈에 체인 신靴 신靴, 신靴
무수히 많은 신靴이
가지각색의 신靴이
행렬을 지어 나서는 신靴이
神을 영할까 행렬 지어 나아가는 신靴이
神에게로 인도하는
각자의 신靴과 동행한 체
집을 나서서 전동차를 타고
남산 백년의 길, 향수의 길을 지나
기도가 모이는 그곳으로
거룩한 神을 찾는 자 마음속으로 오는
神에게 감읍 되어 뭉클한 가슴으로
묵은 해를 보내면서
새해 새날을 전지전능한 神께 의탁하며
내 안에 온 神과 하나 되어
거룩히 닳아질 내 신靴은
꽃신신고 하늘을 걸어 神을 만나니 좋다.
세모 이야기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 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에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을 다듬고 계실 눈 어둔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일까
문경 새재 산막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그 소년의 염원이 멎어 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 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 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은 소생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에 어느 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끼리 인천바다 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 끼던 그 말없는 표정들처럼
나도 먼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한 해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한 해를 돌아보며 /최영복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한 해를 살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 없는 데가 없더군요
모르고 지나간 건지
이 정도쯤이야 외면한 건지
군데군데 멍들고 상처로
너 덜리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리 바쁜 일도
서두를 시간도 아닌데 빠듯하게
살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한 템포 쉬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렇다고 후회할 일은 아니고요
그 상처들이 나를 더욱더 성숙하게
만들었거든요 때문에 희망은 항상
덤으로 챙겨 두었습니다
올 한해 마지막 장 달력의
숫자가 하나둘 털려 나가고
외로움의 숫자 삼십일 하나 남았습니다
이제 인생의 포인트는 그동안의
계획했던 일들을 잘 정리해서
내 마음의 책장 속에 가지런히
잘 정돈해 두는 일입니다
잘 정돈된 마무리는 인생의 꽃입니다 삶의 향기를 피우는 일입니다
송구영신 /은파 오애숙
그 모든 잡생각들 오늘밤 정리하려
산재된 쾌쾌묵은 낡은것 모두 함께
세월강 앉아 보내며 새론 다짐 하누나
서녘 창 해걸음이 살랑여 여울질 때
단번에 토설하여 그 모든 찌꺼기들
뒤돌아 보지 않고서 새 계획만 보누나
실패의 전차 타지 않으려 도전의 창
보면서 날개치네 새로운 각오 갖고
새아침 찬란한 동녘 창을 보며 웃네요
새소망 희망날개 활짝 펼 새꿈 갖고
기지개 펴 나르샤 하려던 그 모든 것
새해는 내것 만들려 날개펼쳐 봅니다
송년의 깃발 /임영준
길은 하나뿐이지만
쉼터도 제법 있었고
지칠 만 하면
숨 돌리고 때론
주저앉기도 했지만
꾸역꾸역
집찰구에 다다른 거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좌절의 칼날을 피해
또 하나의 깃발을 꽂은 거야
흐릿한 새벽종소리
차갑게 식어버린
열망의 찌꺼기를 토해낸다
덜 깬 잠 탓인지
혼미한 의식이 촛불에 흔들리고
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
지난 밤 꿈의 흔적을 더듬는다
메모 한 줄 벽에 걸어놓고
기어이 떠났구나
하늘의 은총으로 주신
삼백예순 날
이제 마지막 남은
조촐한 식탁
차마 접기 아쉬워, 아쉬워
창문 두드리는
아침 햇살
문 밖에 세워둔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찬란한 새날이
내 고향 왜목마을 갯벌에서
잉태하고 있는데
빛으로 오실
새 주인을 위하여
기꺼이 자리를 비워야겠다
또 한 해의 행복을 꿈꾸며 /이채
들꽃 피는 언덕의 노을빛처럼
또 한 해가 아득히 저물어 갑니다
아침에 걸어둔 장밋빛 소망은
아직 가슴에 남아 싱그러운데
12월, 한 장 남은 달력이
눈 덮인 겨울 나무의 마지막 잎새처럼
사람의 생각을 고요히 잠기게 합니다
신천지처럼 펼쳐질 새 희망 새해에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삶의 집을 짓고
고이고이 간직해온 소망의 꽃씨를 뿌리며
꽃잎 가득 웃음 짓는 행복의 뜰을 가꾸고 싶습니다
정성스레 보살핀 향기로운 꽃밭으로
나비와 벌, 온갖 새들도 불러모아야겠지요
구름처럼 포근한 사람들과 손에 손을 잡고
화창한 봄날의 꽃길을 걷고 싶습니다
분홍빛 향긋한 꽃가슴을 지니고
소박한 하루하루의 꿈빛을 색칠하며
설령 이루지 못할 꿈일지라도
아담한 삶의 정원을 가꾸고 싶습니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길을 걸을 때는
지나온 과오를 거울삼아
똑바른 길로 반듯하게 걷고 싶습니다
지름길보다 정직한 길을 찾아 헤매이며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날을 고뇌할까요
그래도 미움과 불만은 멀리하고
사랑과 배려를 가까이해야겠다고
마음은 넓게, 생각은 깊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겠다고
밝아오는 또 한 해의 삶은
별빛 이슬처럼 맑고 깨끗해야겠다고
하얀 겨울산을 거쳐온 눈꽃 같은 햇살이
시린 볼을 부비며, 생긋 웃으며 일러주는 말,
계절은 얼어도
마음마저 얼지는 말라고
추운 대지 속에서도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은
언젠가는 봄이 오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세모 /엄원태
한 해가 저문다
파도 같은 날들이 철썩이며 지나갔다
지금, 또 누가
남은 하루마저 밀어내고 있다
가고픈 곳 가지 못했고
보고픈 사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생활이란 게 그렇다
다만, 밥물처럼 끓어 넘치는 그리움 있다
막 돋아난 초저녁별에 묻는다
왜 평화가 상처와 고통을 거쳐서야
이윽고 오는지를 ...
지금은 세상 바람이 별에 가 닿는 시간
초승달이 먼저 눈 떠,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송년 풍경 /손병흥
아쉬움이 교차하는 뒤돌아보는 발걸음에
각종 모임들을 갖게끔 만드는 마지막 무렵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며칠 남지 않은 연말
숨 가쁜 세모 나름 잘 마무리하고픈 송년의 밤
다들 상대방에 대한 감사와 노고의 뜻을 표시하고
그동안의 보살펴 주심과 수고하심에 대한 송년인사
조촐한 자리 노을처럼 물들어가고픈 길지 않은 시간
멋진 마무리가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가 된 송년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