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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24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연중 제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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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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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Hf7gh79J_w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639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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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시대 순교>
오늘 한국 순교자들의 대축일에 순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순교의 본질이자 핵심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부족한 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과분하고도 크신 사랑,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입니다.
시편 작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시편 115, 12)
이 질문에 대해 즉시 이렇게 응답합니다.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5, 13)
보십시오. 순교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구원의 잔’은 다름 아닌 가장 농축되고 전적인 봉헌, 즉 ‘순교’를 의미합니다.
신앙심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젊은 시절, 제가 늘 억울해 했던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제 마음은 순교 영성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즉시 어떻게 순교할 수 없나,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럴 기회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순교를 하려고 했지만 시대가 저를 받쳐주지 않은 것을 억울해 했습니다.
오늘 한국 순교자 대축일에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더 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 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지루함, 매일의 따분함, 끊임없이 다가오는 사소한 고민거리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빛나는 얼굴로 매일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엄동설한 한가운데서는 이 혹독한 겨울이 언제쯤 지나가려나, 힘겨워하지만 어느새 화사한 봄날이 친구처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낙뢰를 동반한 폭우 한 가운데서는 세상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지만, 기다리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푸른 하늘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결국 관건은 기다림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의 얼굴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요셉의원 고 선우 경식 원장님께서 생전에 저희 수도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입니다. 참고 또 참으십시오. 그리고 또 참고 또 참으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이 때로 견딜 수 없이 남루하고 때로 비참하다 할지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실 깜짝 선물을 기대하면서, 언젠가 우리에게 ‘잘 참고 걸어왔다’고 건네주실 표창장 수여식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걸어가는 것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요, 이 시대 우리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내가 걷는 길이 돌밭길이라 할지라도 걷다 보면 분명히 아름다운 들길, 화사한 꽃으로 만발한 꽃길도 만날 것입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줄 시원한 냇가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옛 친구, 고마운 얼굴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장 18절)
우리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입니다.
매일 견뎌야 할 몫이 너무나 힘겨울 때마다 예수님 위로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2코린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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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습의 종교인가, 실전의 종교인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fbI9UV_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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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따집니다. 저는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소극적인 선교지역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자들이 먼저 천주교를 연구하여 받아들이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지쳐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에 진저리가 나서 더 실용적인 학문을 찾다가 서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성리학보다 천주교가 더 실용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성리학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 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좀 복잡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理)는 ‘진리’를 나타내고, 기(氣)는 ‘힘’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힘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리학에서도 이와 기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학문이 실용적인 면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실용적인 면을 잃게 되는 이유는 ‘실전’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리학도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이들에게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데 이용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이 탁상공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리학이 창조와 운동, 소멸의 원리였다면 그것이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각자 안에서 실용적으로 적용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연습만 하고 실전에 쓰이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한국의 실학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천주교가 더 실천적이요, 실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여 보니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 줌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했던 이벽과 정도전과 같은 분들은 철저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수련하였고 천주교가 실전에서 매우 실용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천주교는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도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순교자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가 하나의 연습의 도구가 아니라 실전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약간은 당시 성리학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들려고 연습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은 평소에 자신과 싸우지 않고 순교 때에 한 번의 결정으로 순교하였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더 큰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작은 전투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다져왔을 것입니다. 나와 싸우지 않는 종교는 이제 실전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로 남게 됩니다. 나와 진정으로 싸우려면 내가 곧 그리스도임을 완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전이 시작되고 내가 믿는 종교는 실전의 종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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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23-26 :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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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루카 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일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추가되는 까닭입니다. 특정한 순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와 무관한 경우가 많지요. 삶의 처세를 위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엮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위하신 이웃을 향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수없이 듣고 들어 온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낯선 이들과의 연대,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겸한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서, 뜻이 달라도, 부족하고 어눌하더라도 제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점검해 보아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 처음부터 그러하였을 것입니다.원시 시대든, 인공 지능(AI)이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든 사는 것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순간순간 함께하는 삶의 이질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함께 답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와, 제 삶에만 천착하여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커녕 제 삶의 의미마저 속세의 천박한 유혹에 저당 잡힌 이들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것이겠지요. 십자가의 삶은 타인의 삶 안에서 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큰 선물을 미리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대단하다. 그들의 순교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로만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질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부러워해야겠습니다. 부러워서 나도 얼른 그 선물을 움켜쥐고 싶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설레는 기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이웃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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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박해자들은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순교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마르 3,21).> 반면에 순교자들은 허무하게 지나가버릴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배교자들과 박해자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길의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믿음을 헛된 망상으로만 생각했던 박해자들의 생각과 그 생각을 어리석은 무지몽매로 생각했던 순교자들의 생각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의 말은 무섭지 않다.”고 세속 사람들은 말하는데, 무엇이 지혜인지를 지금 깨닫지 못하고, 그 지혜의 길을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순교자들의 믿음이 옳았구나.” 라고 깨닫겠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이 될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해도 자기 삶을 바로잡을 시간도 없고, 자신에게 닥친 심판을 피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입니다. 박해자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 자체를 의심하면서 그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인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사람도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원’을 유한한 인간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증명되지 않은 일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죽을 때까지 하느님,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힘이고,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진리를 진리로 바로 아는 힘이고, 살아보지 않았어도 믿는 대로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태양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은하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심과 욕망 같은 것들입니다. 버린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인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완전히 정반대 위치에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앙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신앙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믿음 없는 자들은 중요한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갈등과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박해자가 되는 셈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신앙생활에 따르는 온갖 고난을 감수하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은 “편하고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는가?”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을 신앙인 스스로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 바로 이 길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 길로 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 보면 높은 산도 만나고 험한 고개도 만나는데, 돌아가는 길이 없으니 그냥 정면 돌파를 하는 것뿐입니다. (신앙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가시밭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다 보면 분명히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만납니다. 그럴 때에는 누구나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날 때, 목적지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내가 얻기를 바라는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일까? 나는 혹시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된 신앙인은 임종 때에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만, 세속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임종 때에 후회하고 두려워하면서 생을 마칩니다. (한 번이라도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압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살다가 또 그렇게 마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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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뉴욕의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1973년에 시작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정식으로 본당으로 인정된 것은 1974년입니다. 곧 5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본당 사무실로 들어가는 벽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사진이 제일 앞에 걸려있습니다. 퀸즈의 교우들은 지금도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로 성장한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초대 사제와 교우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시작하였고 벽에 걸려있는 후임 사제들과 공동체의 노력으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교회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유럽의 교회는 1,000년이 넘는 교회가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의 초상화가 벽에 한 가득인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인품에 오르신 분도 있고, 주교님이 되신 분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는 입구에 바오로 사도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지금 교황님은 266대 교황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266명의 교황님이 있었으니 평균 8년 정도 교황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 순교한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성인품에 오른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구교’라고 하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세대를 30년 잡으면 150년가량 됩니다. 대략 1810년가량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에 시작되었으니 교회가 시작되고 30년 가량 지나서 저의 조상들이 신앙을 시작하였습니다. 구교 집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 다녔기 때문에 재산의 기본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지역과 혈연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교우들이 모여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겨우 자리를 잡아도 박해가 시작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구교 집안은 늘 가난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앙교육이었습니다. 재산도 버리고, 벼슬도 버리고, 이웃과도 헤어져서 선택한 신앙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워야 했고, 매일 기도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주일에는 성당엘 가야 했습니다. 신자가 아닌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는 먼저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기일(忌日)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도 먼저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자녀들 중에 한명은 사제나 수도자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집도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형수도 먼저 세례를 받고 결혼하였습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였고, 교우들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심단체 및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생기는 고립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좋았던 점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교구는 영상을 이용한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사목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가진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신앙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치를 안다면, 신앙의 기쁨을 안다면 코로나19는 결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발자취를 닮기에도 멀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을까요? ‘다음에 하지 머’라는 게으름.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을 우리 삶의 액세서리로 생각한다면, 신앙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조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은 조그마한 신앙의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선택하시어 오묘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신앙 고백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자라게 하셨으니 저희도 죽기까지 복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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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나>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분과 나>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이 아니 계시면
나조차 없는 것이니
나 삶으로써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을 없앤다면
나는 살아도
없는 것이고
나 죽음으로써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을 드러낸다면
나는 죽어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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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 혹은 영원한 그것>
+찬미예수님
학교에서 윤리 과목들을 가르치다 보면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목의 특성상 윤리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되는 사건 사고들을 다뤄야 하는데, 결국 인간의 악한 성향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들을 마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 돈과 명예를 쫒는 현실, 육체적인 것에 대한 욕망. 그로 인해 희생되는 피해자들을 수업시간에 다루노라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요약하자면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나 되도록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재물을 원합니다. 그 다음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원하고 내 뜻에 맞춰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명예와 사랑 또한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싶고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저 또한 이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신자분들과 학생들에게 인기 있고 싶고, 괜찮은 신부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이 모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겨지기에 일정한 목표에 다다르면 인간은 더욱 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게 됩니다.
또한 혹시라도 이것이 사라질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더욱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 인해 질투와 미움, 열등감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러한 묵상을 하게 되면, “그렇다면 무엇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 최종 목표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첫 번째, 그 목표가 재물과 같이 변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권력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 번째, 명예 혹은 사랑과 같이 타인의 주관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결국, 변화하지 않는 가치로써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할 이것은 한가지로 귀결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모여있는 이유인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충만하게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 가치와 존재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위험도 없고 다른 이의 주관과 나에 대한 평판으로 인해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다른 민족의 선교가 아닌 자생적으로 교리를 받아들여 탄생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느님을 위해 재물, 권력, 명예, 사랑과 같은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했으며 생명을 바쳐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는 어떠한 세속적인 욕심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느님 외에 다른 목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라고 해서 어찌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순교자들의 생애를 상기하노라면 오늘 제 2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가 매우 의미있게 들립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순교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즉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질투, 원망, 미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며 그저 진리와 사랑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수많은 유혹과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신앙으로 인한 순교의 위험이 없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지도 않고 물리적인 손해를 받지도 않는 시대임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록 핍박은 없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물질의 유혹, 바쁜 일상, 봉사를 할 때 느껴지는 손실감, 성당에 나오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게으름.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의 유혹이며 박해입니다.
이 밖에도 점점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이 시대는 신앙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들은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증거 하고자 애써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충만한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이 이러한 우리가 얻게 될 결과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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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송지영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위주광영-爲主光榮)>
우리는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많은 용사들을 접하게 됩니다. 또한 ‘용사’라는 단어에서 흔히 떠올리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상의를 탈의한 채 멋진 근육을 드러내며 큰 칼을 쥐고 자신 앞에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용사의 모습과 신앙 안에서의 용사의 모습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순교자 성월에 많이 부르는 가톨릭 성가 283번인 ‘순교자 찬가’에 나오는 장한 순교자이자 주님의 용사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확연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용사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용사란 바로 성인 순교자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동료 순교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성인 순교자들은 세상의 용사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칼을 쥐거나육체적인 강인함을 택하는 대신 신앙을 선택하고 하느님 그 자체인 십자가를 몸에 새기고, 하느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 삶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으며, 온마음과 생명을 다해 십자가의 신비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인들의 모습이 장한 신앙 용사의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9월 순교자 성월 성가를 통해 다시금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용사는 상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존재이지만,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의 용사인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희생합니다. 또한 육체적인 승리를 선택하기보다 영적인 십자가의 신비 즉, 하느님의 어리석음을 택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용사는 상대에게 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하느님의 용사인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택하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것임을 전 생애를 통해 증거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 가까이 동참하기 위해 십자가 신비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포기하면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을 하느님을 자신의 편으로 둡니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로 무장하고 세상에 맞선 하느님의 용사들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자랑스럽고 장한 신앙의 순교자들이 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세상의 힘보다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위주광영-爲主光榮),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억하는 한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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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신정호 모세 신부님]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무렵 외무부에서는 골롬반 선교회에 연락하여 모든 골롬반 신부들을 전라남도에서 철수시키라고 통보했습니다. 당시 광주에는 약 20명의 골롬반 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5월 18일이 되자 광주에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시민들과 당국 간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9일에 신부들은 골롬반의 집에서 외무부의 연락과 관련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토론했고, 결국 광주에 남기로 했습니다.
그날 토론의 핵심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6·25 때에 우리 선배들이 신자들과 같이 남기로 했으니 우리가 오늘 그렇게 해야지요!”
1980년 광주의 골롬반 신부님들은 6·25 때 순교하신 신부님들을 기억했고, 그분들의 모습을 따랐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6·25 때 순교하신 분들은 그보다 앞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를 거쳐 마침내 예수님의 모범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충실히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한 분 중 일부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하지 않은 분들은 소중한 신앙을 후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까지 이겨낼 정도의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순교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잔혹한 처형의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순교자의 모범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순교자 신심은 순교의 순간이 아닌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이 증거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본받아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성인들 역시 처음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한 평범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점차 굳건히 하며 마침내는 순교에까지 이를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고 있으며,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렇게 많은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있는 것은 하느님의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순교자들을 본받으려는 열망이 얼마나 강한가? 교회 안에 그분들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범이 되는 수많은 순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이 보여주신 신앙과 삶의 모범을 잘 배우고, 생활 안에서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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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현수 마티아 신부님]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
“순교로 빛을 밝힌 103위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 안에 큰 나무되니, 님 따른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 빛 되소서.”(가톨릭 성가 285번 <103위 순교 성인> 1절)
이 성가의 가사 중에 다시 한 번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빛 되소서.”라는 1절의 마지막 가사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마땅히 103위 순교성인들을 기리며 기념해야 하겠지만, 이들과 더불어 아직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성인으로 불리지 못하는 분들과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자들 역시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록 피 흘려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평생 박해를 피해 타향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다 일생을 마친 분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삶을다 바쳐 신앙을 위해 헌신하신, 넓은 의미로서의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순교자로서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거나 그 한순간의 결단 때문만이 결코 아닙니다. 백 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또 최후의 순간에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과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복음적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라고 살고 싶은 욕망이나 출세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결국 하느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처럼,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지혜 3,5)이며,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지혜서 3,7)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이러한 굳건한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어떤 역경과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사랑을 지킬 수 있게 한 순교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복음 9,24).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은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오늘 기념하는 103위 순교성인들과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전수한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이어받아 이 시대의 빛이 되는 자랑스러운 ‘순교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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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저는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요, 살면서 무력감과 초라함도 많이 느낍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의 열등감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약간의 열등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존감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공감이 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는 상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 져야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생긴다고 해서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순교자 덕분에 지금 우리가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순교자의 삶은 끔찍해 보이기도 합니다.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얻게 되는 기쁨에 집중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만 행복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박해 시대임에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순교자들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역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지혜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순교자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긍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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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희망의 선택>
스포츠 방송 진행자인 메간 버나드(Megan Barnard)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남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소녀 시절이었던 15세에 나타난 증상으로 병원에서는 ‘림프부종’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반 친구들은 그녀를 놀렸고, 한참 민감했던 나이이기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단절의 시간을 9년 동안 보냈을 때, 그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다리를 감추는 것에서 드러내는 삶을 선택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다리를 당당히 드러내는 모델이 되어 사진 촬영을 하고, 더 나아가 스포츠 방송 진행의 영역까지 그의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미움의 선택, 절망과 좌절의 선택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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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여정>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중 절정의 날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1세기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였으니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9월에 맞는 한국 순교자 성인 대축일, 아마 주일이 아녔더라면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에서 오늘 의무기념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이날이 되면 17년전 2003년 잠시 미국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축하받았던 일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날은 독서기도 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서간이 영어로 낭독되었고, 한국 순교 성인들 기념 미사 후 여러 수도자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을 때 우리 순교성인들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늘 입당송 성가는 아쉽게도 부르지 못했지만 영성 깊으신 시인 최민순 신부 작사에 이문근 신부 작곡의 두 대표적 성가가 생각납니다. 언제 불러도 감동적인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성가, ‘순교자 찬가(283)’와 ‘병인 순교자 노래(289)’를 각각 1절씩만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시간되면 이 두 장의 성가 마지막절까지 깊이 음미하시며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무궁화야/부르자 알렐루야 서럽던 이 강산아
한목숨 내어던진 신앙의 용사들이/끝없는 영광속에 하늘에 살아있다”-
구구절절 우리에게 순교열정을 고무, 고취시키는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참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 순교 성인들입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도 이에 화답하는 듯 아름답고 깊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을 복음의 빛으로 불러 주시어,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셨으며, 그들의 갖가지 빛나는 덕행을 갖추고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마침내 아드님의 승리를 함께 누리게 하셨나이다.”
참 축복받은 한국입니다. 이건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전국에 산재한 순교성지들중 일부 성지를 방문하며 절감했던 사실입니다. 마치 한국땅 전국토가 하느님의 거룩한 땅 성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참 보물인 순교 성인들에 순교성지를 지닌 진짜 영적 부자 교회구나 하는 자부심도 들었습니다. 한국은 순교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의 가호하에 번영할 수 뿐이 없겠구나, 결코 망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핏 눈에 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하상 바오로 평신도의 생몰 연대도 충격입니다. 전 언제나 성인축일을 지낼 때마다 생몰生沒 연대를 확인해 보며 저보다 더 살았나 적게 살았나 살펴 보곤 합니다. 성 대건 안드레아는 고작 25세의 꽃다운 청춘에 순교하셨고, 성 하상 바오로는 한창 중년의 나이인 고작 44세에 순교하셨으니 우리에겐 또 충격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분발심을 갖게 하는 순교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순교 성인들의 순교 영성의 DNA를 지니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분발하면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첫구절이 명쾌하게 그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범한 성인이 아니라 누구나 결심하고 실천하면 될 수 있는 평범한 구원의 여정에 성인의 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자 보람은 우리 모두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주목할 말마디가 ‘모든 사람’, ‘누구든지’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 모두 성인들이라 믿습니다. 어느 시인의 독백같은 고백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고단한 삶의 무게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생시켜 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돌아갈 영혼의 고향집같은 교회가 있고, 돌아갈 분,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렇게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고향집같은 수도원을 찾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에 이르는 순교영성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날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영성을 일상화,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씩씩하고 기쁘게 한결같이 도반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교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제 좌우명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바로 제1독서 지혜서가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돌보신다.”
그러니 분발하여 다시 십자가의 길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샘솟는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이 참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도대체 이런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앞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힘이 우리 모두 구원의 여정에,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약속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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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순교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백여 년 동안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 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 하느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 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접하게 된 때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 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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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고 열매맺을 수 있도록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미사의 말씀은 피와 땀과 눈물로 비옥한 신앙의 터전을 일군 의인들의 신앙의 기본기를 우리에게 전수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다."(루카 9,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의 필수 요소로 십자가를 제시하십니다.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치욕스런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 피하고픈 최악의 고통을 비유하는 동시에 예수님께는 몸소 실제로 껴안게 될 죽음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실 우리는 크건 작건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가장 부족하고 약하고 못난 점일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닥친 사고나 시련일 수도 있지요. 벗어나고 싶지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자기 십자가를 어느 정도 순응하고 받아안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어떤 지향이냐에 따라 적응이거나 포기, 아니면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여정인 것이지요.
"날마다"
십자가의 특성은 "날마다" 져야한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성장을 위해 허락하신 십자가는 며칠 지다가 내팽개칠 수 있는 취미나 오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매일 십자가의 고통과 어려움을 견딘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아무리 하찮고 작은 십자가라도 나름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매일 동반되어야 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향한 '결심'은 날마다 새로이 '갱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견뎌보리라"는 다짐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 결심의 갱신을, 무겁고 성가시고 불편하고 고통스런 십자가가 은총으로 완전히 '습(습관, 익힘, 물듦)'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날마다, 은총으로 십자가와 완전히 한 몸이 되기까지 날마다 날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십자가(고통, 고난, 단련, 시험)를 통해 영원한 행복을 쟁취한 의인들의 영혼을 칭송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주님께 대한 신뢰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것은 어느 결에, 어쩌다가, 우연히, 단발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고통 중에 그들이 쌓은 "신뢰"와 "믿음", "거룩함"이 그들 존재에 "습(習)"으로 스며들어 "덕(德)"의 실체로 정착되었기에 가능한 응답이지요.
그런 의인들이 세상의 얄팍하고 얕은 눈에는 "파멸"과 "징벌", 즉 불행이나 불운으로 비치지만, 실제로 그들은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며, 은총과 자비를 받고, 주님의 돌봄을 받는 축복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그보다 더한 축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내세를 믿는 모든 이의 바람이고 희망이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확신에 찬 어조로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어떤 십자가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만만하지는 않겠지만요. 나 혼자만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 때문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십자가를 지려는 우리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그 본성상 이미 주님과 한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주어지는) 모든 십자가에는 나의 구원을 애달파 하시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계십니다. 십자가와 함께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안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동시에 부둥켜 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지요. 십자가와 주님과 나, 이 셋이 하나가 되면 넘어서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한없이 미련해 보이고 바보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의인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매일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며, 응답하고 실천한 여정을 공경하고 경외합니다. 순교는 주님의 의인들이 "날마다" 쌓아올린 부단한 인내와 헌신의 열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날마다" 지는 십자가는,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벗님을 온통 주님으로 물들이게 해 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진리 안에 거닐며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해 주고, 은총과 자비를 누리며 주님의 돌봄 안에 머물게 합니다. 날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맞이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이 멋진 순교자들의 자랑스런 후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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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려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셋째>는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바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의 길>인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다’의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의 길>인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진다’는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는 것’이기에, 죄의 용서를 소중히 맞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 날마다 죄의 용서를 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어도 안으로는 자비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의 길>인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지향이 오로지 예수님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선조 순교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지만, 살아있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순교현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곧 우리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더러 일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번 문초 때에 형리였던 사람이 다음 번 문초 때는 피고석에서 문초를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순교자들로부터 배워 알게 되고 어느덧 신자로 돌변하여 자신들이 휘두르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입니다. 곧 심문 받는 형장이 바로 전교지요, 신앙의 증거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죽음은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이미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안에서도 죽었지만 살아있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부 떼르뚤리아누스는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순교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자들 삶과 복음을 돌아다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그러기에 순교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믿음의 승리의 십자가를 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당하면서도 안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박해하는 이들마저 사랑으로 품고 벅찬 기쁨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에 희망을 걸고서 말입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바쳐야하는 순교를 강요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신의 삶은 시대와 세속정신을 거슬려 박해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으로 녹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품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흔연히 십자가의 사랑을 끌어안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빠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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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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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순교성인'을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103위 순교성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103위 순교성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순교 성인은 1839년10월 31일 14세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입니다.
유대철 베드로 성인은 아버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자, 제 발로 의금부에 찾아가 "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니 어서 잡아가세요."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이 어린 대철 베드로에게 배교의 말을 받아내려고 심한 고문을 하면서 붉게 달궈진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하자, "예, 자, 넣어주세요. 아 아!"라고 입을 벌렸고, 고문하는 포졸에게는 "저를 하늘 나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어서 하느님을 맞아들이세요."라며 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 3,1)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8.39)
장한 순교자들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장한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고 희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일상에서 겪게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으로 코로나를 이겨내는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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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IJk1ynbkS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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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우리의 목숨과
마주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와
죽는 밀알을 통해
목숨의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
되돌려
드려야할
우리의
목숨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복음의
발자국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생활의 봉헌이다.
생활의 봉헌은
버려야 할 것과
나누어야 할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순교는
신앙과 사랑을
위한 믿음의
간절한
결단이다.
신앙과 순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순교의 피는
여전히 뜨겁다.
순교는
비뚤어진
우리 시대의 믿음을
바로잡아준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간 이들의
숭고한 목숨의
승리이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신비로운 일치의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랑의 뜨거운
결정체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생명의 빛을
향해 걸어간
이들의 전적인
삶의 투신을
배워야 할 때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생활은 순교로
깊어지고
순교는 생활을
참으로
가치있게 만든다.
하느님을 위한
순교이며
목숨이다.
목숨을 위한
봉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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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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