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대가리
글-장경운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23가길 20, 101동 1001호(본동 유원강변@)
고등학교시절 스파르타식으로 독일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 은사님께서 빡빡머리를 하고 다니셨고, 엄격한 교육방식에 딱 맞는 백대가리라는 별명으로 선배님들로 부터 불려 내려 온다. 내가 오늘 쓰고자 하는 것은 백대가리 은사님도 아니고, 일학년 같은 반에 있던 시골에서 유학 온 동기 동창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다.
두 명의 친구였다. 한 친구는 홍천군에서 다른 친구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유학 온 친구다.
그 당시 중,고등생들은 일제 강점기 때의 잔재인 빡빡머리를 하고 다녔다. 두 친구는 빡빡머리 인데도 새치가 많아서 두상이 허옇게 보여 나 혼자 두 놈을 홍천 백대가리, 가정리 백대가리하며 부르곤 했다.
흔히 부르는 닉네임, 별명이었던 두 친구들-.
홍천 백대가리 장형은 우리 형님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 때문에 그 빽으로 자취하면서 우리 집 김치,고추장등을 무상으로 퍼갔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때 배운 태권도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논산 육군 신병 훈련소에서 잡았던 것 같다. 헌병 병과를 받아 주 특기인 태권도를 앞 세워 훈련소 정문을 장악한 것이다.
그 후로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고등학교 동기들이나 선, 후배들은 부탁을 안해도 늘상 면회나 외출시 선착순이 아닌 '0'순위가 되었다. 특히 월남 파병에 지원된 친구및 선후배는 홍천 백대가리 한테 후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홍천 백대가리는 제대 후 외항선을 탔고, 나는 중동지역에서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귀국 후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결혼해서 대구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마침 그 당시 내가 대구에서 근무) 수소문 끝에 홍천백대가리를 찾았다. 얼마나 반가운가! 육두문자를 해가며 고추장, 김치값 내라고 엄포를 놓으며 한잔 술을 들었다. 그런 연유로 몇 개월 만에 한번 씩 국내로 입항하면 우선 나에게로 달려온다. 그 동안 외국에서 입항했던 곳의 특산물을 선물하곤 했었다( 물론 입국 환영식비는 온전히 내차지 였지만).
특히 칠레에서 '로즈오일'을 마누라한테 선물하면 내가 중동지역을 들락거리며 사온 프랑스 화장품 보다 월등히 좋다고 좋아한다. 아니 은근히 홍천백대가리가 언제 귀국하느냐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그 것보다 외항선내 PX에 면세로 살 수 있는 양주가 훨씬 더 기다려졌는데...
지금은 몇 올 안되는 대머리 신세지만 그 마져도 하얗다 보니 고교시절 그 친구 놀렸던 댓가를 톡톡히 치루는 것 같다. 그 후, 홍천 백대가리는 배타는 일을 그만두고 이벤트 회사에서 행사 요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생각나면 하시라도 만날 수 있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가면서 입에 힘이 빠져 썅소리도 안 나오고, 목구멍으로 알콜이라는 영양제도 제대로 넘기기를 못하고 있으니 자연히 만남이 뜸해질 수 밖에-.
그리움에 스마트 폰을 열어 보지만 귀가 잘 안들리니 언성만 높이다가 끊고 나면 뭔 얘기를 했는지 기억력까지 떨어지고 치매끼까지 겹쳐지는 꼴이 되다니-,
그 친구 만나 소주 한 잔으로 회포를 즐기고 싶어도 마누라 눈치 때문에 그것마저 못하는 신세다.
이제 잊혀지기 전에 가정리 백대가리에 대한 소식을 석류알처럼 와르르 쏟아놓아야 할 것 같다.
고1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으면 해서 부모님께 부탁을 해, 나와 함께 방을 쓰기로 허락을 받고 무상으로 하숙을 시작. 책가방에 교과서와 요,이불 한 채만 가지고 왔다.
내가 학교생활 중 오후에는 전국체전에 출전하기 위해 수업은 접고 운동연습을 하다보니, 같이 6개월 동안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 되는 건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이면 구내 매점과 식당을 함께 휩쓸려 다니며 찹쌀떡과 자장면을 자주 사주었고, 운동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면 기다렸다가 시장에서 간식거리를 자주 사 줬다. 내 생각에는 하숙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미안해 나에게 잘해 주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월남을 하셨기에 남한에 일가 친척이 없어 방학 때면 친구들이 외가댁에 놀러 가는 것이 당시 얼마나 부러웠는지...
가정리 백대가리가 나의 그 소원을 풀어 장본인이다. 일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마치 어제일 같이 기억된다.
그 친구 집에 가기위해 기차를 타고 가평역에 내려 꽁꽁 언 북한강을 건너 가정리까지 걸어갔다.
부모님이 고마웠다. 아침 저녁으로 우리가 자는 방 아궁이에 군불 때실 때 들어오는 연기의 때문에 눈물 흘렸던 기억.감자,고구마,옥수수 등을 굽고 찌고 해서 만들어 주신 주전부리, 떠나올 때 이것 저것 바리바리 싸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정리 백대가리가 살던 곳은 종친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당시도 넉넉한 삶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낮에는 여인네들이, 밤에는 형님분들과 또래들이 마실 와서 화투도 하고 막걸리 추렴도 하다보니 일주일이란 시간이 어찌 빨리도 흘러 갔던지-. 가정리를 떠나올 때 하숙비를 쌀로 보내서 미안하다는 백대가리 어머님의 말씀-. 나혼자 만에 비밀로 간직해야만 했다.
몇 개월 동안 그 친구한테 얻어 먹은 것만 해도 하숙비로 충분하다는 생각하고, 부모님께 그 친구의 신의를 지켜 줌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는데도 이불 보따리만 남겨 놓은채 소식이 없는 게 아닌가! 타 학교로 전학을 했는지 자퇴를 했는지...그 이후의 고교 학창시절 가정리 백대가리는 나의 기억 속에서 훌쩍 사라지고 말았다.
아! 그러나 잊었던 가정리 백대가리를 꿈같이 만난 것은 언제였나? 몇 년이 지난 군 제대 말년 휴가 때였다. 이사한 서울 집으로 찾아 온 것이 아닌가!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에 부모님께 대충 인사를 드리고, 종로 통 단골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그만 군,경 합동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이유는 사병이 장발에 장교 잠바를 입었다는 것이다.
- 1.21사태(북한군 124특수부대요원이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를 침투)후 대한민국 전 군인의 근무기간이 연장되어 사병들이 대부분 제대 말년에는 머리를 길렸었다.-
그 친구는 다행히 사복을 하고 있어 나 혼자 걸린 셈이다. 임시 군경합동단속 사무실에 들어가 조서를 작성하고, 제대 말년이라 훈방조치 한다며 공군장교 잠바가 탐났던지 벗어 놓고 가란다. ㅎ
한참 있다온 그 친구와 막걸리집에서 회포를 즐기고 집에가서 자고 가라고 해도 전방 사단장님을 모시고 나와 관사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헤어진 것이 마지막일 줄이야!
아침에 어머니께서 그 친구를 찾으셨다. 어디 갔냐고 물으시기에 부대에 사단장님을 모시고 가야하기 때문에 관사로 갔다고 했더니 돈이 부족하지 않았냐고 하기에 잘 해결 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안심하시는 눈치로 더 이상 묻지를 않으셨다.
그 친구가 나와 어머니 사이에 하숙비와 단속 해결비용에 대한 비밀의 강을 만들어 놓았다. 고희(古稀)가 되고 보니 하얀 미소 짓던 모습이한층 더 보고 싶다. 가을이다. 머문자를 떠나게 하는 계절, 나는 떠난 자를 그린다.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행여 이 글을 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미련을 갖고 기다려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