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달 / 이정록
식 올린 지 이 년
삼 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데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 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자장면을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 이정록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1994
아내의 등 / 하재영
어느 날부턴가 잠에서 깨면 아내는 등을 보이고 있다
내 바람을 눈치 챈 것은 아닐까
함께 이부자리 들어 신혼을 보낸 지 십년이 넘었어도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숨결에
으레 내 쪽을 향해 잠을 자던 아내
거웃도 자란 자식들 키우며
눈가 주름 잡히도록 눈물 흘리며 인생살이 터득해 가는데
며칠 전 내 어느 애인이랑 바람이 지난 길 따라
오래 묵은 은행나무 푸른 그늘 아래서
나뭇잎 흔들리게 책장을 넘겼는데
그 때 그 바람 아내가 눈치 챈 것 아닐까
아니면 오래 전 산 넘고 강 건너
꽃길 펴 놓았으니 오라는 전갈 받고
자동차 몰고 찾아가 외박하며 끌어안은
꽃향기와 바람소리와 별
그 불륜이 아내의 귀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어느 날부턴가 잠에서 깨면
아내는 등을 보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쪽으로 가고
나는 아내를 자꾸 쫓아가며
아내의 등에 붙어 있는 검은 점도 새롭게 발견하고
등 돌린 아내
슬며시 나를 향해 돌아눕게 하는데
돌아눕는 사이 늘어난 새치도 눈에 띠고
화장하지 않은 이마 주름도 살아온 길처럼 보여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아내를
아내의 등 뒤에서 넓은 아내를 본다
빗나가는 예의 / 오명선
화장은 여자의 기본 예의라고 하는데
한쪽 눈을 감아야 하는 아이라인,
나로선 엄두도 못 낼 일
20년째 내 예의는
어린 아들 허벅지에 덮친 국그릇이고 자지러지는 울음을 받아낸 밥상이고
시시때때로 욱신거리는 2도 火傷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
늘 비껴가는 인사에
싸가지가 없어, 싹수없어, 나를 오독했고
예의바른 두 눈의 너와
한쪽 눈밖에 없는 나의 거리가
언제나 어긋나는 사랑처럼 멀기만 하다
차단된 내 오른쪽 길,
거울 앞에 앉아 아이라이너 펜슬을 든다
번번이 빗나가는 예의가 캄캄하다
- 오명선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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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선 시인의 첫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에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서 그 상실로 인한 아픔을
소재로 쓴 시가 이것 말고도 두 편이 더 있다.
<당신은 약관에 맞지 않습니다>에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춰진 약관’에 의거 보험가입자체가
거부당하는 현실의 가혹함을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인지 눈이 침침해지는 것인지’라며
비탄했다.
젊었을 때 ‘아이를 갖고 임신중독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20년간이나 ‘무탈한 내 기록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다섯 개 보험회사’는 하나같이
일방적으로 시인의 내일을 ‘부적합판정’하고,
미래는 ‘적신호’라면서 ‘남은 왼쪽 눈마저 캄캄한
벼랑으로’ 밀어 넣었다. (중략) 이미지와 시각정보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혼란스럽고 집중하기 힘들
때, 시인의 ‘차단된 오른쪽 길’은 ‘번번이 빗나가는
예의’의 책임소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을
적극적으로 보기 위한 포커스 동작은 아닐까.
비록 아이라인으로 예의 차리는 일이 버겁고,
비켜가는 인사에 싸가지 없다는 오독의 소리를
듣긴 해도 시인은 누구보다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줄 아는 예의 반듯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리고 그의 시집엔 빗나감 없는 건강하고 솔직한
마음의 무늬들로 가득 환하다.
/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