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서재(秋日書齋)
추석 연휴 나흘째로 이어진 시월 첫날이다. 가끔 들리는 교육단지 도서관에서는 엿새간 연휴 가운데 다른 날은 휴관임에도 일요일이지만 고맙게도 문을 열었다. 흐렸던 날씨가 개어 하늘은 가을 본색을 드러내고 산야로 길을 나서면 제철 피어난 야생화들이 반겨주겠지만 후일로 미루고 도서관 걸음이 우선순위였다. 아침 식후 집으로 빌려와 읽은 책을 배낭에 챙겨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 꽃밭으로 가니 꽃대감은 보이질 않고 밀양댁 안 씨 할머니가 내려와 있어 추석을 쇤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와 헤어져 반송 소하천을 따라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 후문에서 캠퍼스를 관통해 지났다. 평소에도 이른 시간이면 인적이 드물었는데 며칠 연휴이다 보니 고요하기가 산중 사찰 같았다. 교육단지 찻길 보도를 따라 걸어 올림픽 공원으로 향했다.
고목이 된 벚나무 가로수는 낙엽이 져 나목이 되어갔다. 집에서 일찍 나와 도서관 업무가 시작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해 올림픽공원 안에 딸린 국화공원으로 갔다. 테니스장과 축구장에서는 동호인들이 취향 따라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당국에서는 몇 해 전 국화공원 꽃밭을 잘 가꾸었는데 담당자가 바뀌었는지 여름을 지나 가을이 오도록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아쉬움을 느꼈다.
국화공원에는 다양한 색상의 소국이 탐스럽게 꽃을 피우는데 올해는 잡초 속에 잎줄기와 꽃봉오리 생육이 부진했다. 대신 야생에서 절로 자라듯 버림받은 구절초는 하얀 꽃잎을 화사하게 펼쳐 보였다. 도심 속 공원에서 핀 구절초꽃을 보니 반가움이 더했다. 국화공원을 둘러보고 초중학교와 인접한 창원도서관으로 가니 업무가 시작된 즈음으로 청소 아주머니가 먼저 수고를 했다.
서가를 겸한 2층 열람실로 올라가 내가 앉는 지정석을 차지했다. 넓은 유리의 북향 창밖으로 정원과 함께 대상공원의 대나무와 솔숲 전경이 펼쳐진 명당이다. 집에서 가져간 다섯 권 책 가운데 못다 읽었던 변현단의 ‘씨앗, 깊게 심은 미래’를 펼쳐 살폈다. 저자는 전남 곡성으로 귀농한 중년 여성으로 ‘토종씨드림’이라는 단체를 이끌면서 토종 씨앗에 관심이 많은 귀촌 농부였다.
저자는 농업 육종학에 대한 학문적 체계는 갖추지 못했지만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전국을 누벼 토종 씨앗을 찾아 보급하며 맥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농부가 가꾸는 곡식과 채소에서 토종 씨앗이 우리의 건강한 삶을 이어준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농사에서 토종 씨앗 운동은 다양성과 지속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도 생물 다양성에 대한 협약을 선언했다.
토종 씨앗 운동 책을 읽고 점심때가 되어 휴게실로 가 준비한 컵라면과 삶은 고구마로 한 끼 때웠다. 비록 자판기였지만 원두를 간 진한 커피까지 곁들이니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았다. 식후 열람실로 건너오면서 쳐다본 하늘은 무척 파랗고 높았는데 한 점 구름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침 아까 휴게실로 가기 전 오후에 읽으려고 뽑아둔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가 떠올랐다.
위 책을 쓴 이희인은 오랜 여행 경험을 통해 문화사적 측면에서 남긴 유럽을 비롯한 여러 국가 묘지 기행의 해외 편에 이어 쓴 국내 편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에서 문제 인물들을 찾아 떠난 역사 기행이었다. 정약용 형제와 동학군 전봉준이 나오고 현대 시인 김수영과 봉하마을 노무현까지 언급했다. ‘무덤 앞에서 삶의 의미를 배우다’의 들어가는 말만 읽고 다른 책을 먼저 독파했다.
오후에는 시월의 책으로 고른 다섯 권 가운데 김점식의 ‘지적인 어휘 생활’을 읽었다. 저자는 철학을 전공했는데 곁가지로 한자와 한문 공부를 틈틈이 해 이 책이 관련 분야에서 세 번째였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어휘 가운데 본래 의미와 다르게 쓰는 사례 140여 가지를 뽑아 이해 쉽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못다 읽은 책들은 대출받아 배낭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