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필형 씨의 手記>
행복한 재회
斷腸(단장)의 아픔으로 恨 많은 ‘동인자매중학원’의 문을 닫은 뒤, 먹고 살기 위해 1970~1980년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버스에서 가끔 나를 알아보는 ‘동인’의 제자라는 청년, 아가씨들이 인사해 오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환갑을 넘기고, 또 칠순이 넘도록 30년간 한 사람의 제자나 선생님과도 만난 적 없이 ‘동인’과는 완전히 인연이 끊어졌다. 찾아오는 사람도, 전화 한 통도 없었다. 꼭 만나야 할 일도 없었다. 1995년 1월, 내가 63세 되던 해엔 집사람과도 사별했다.
여든의 문턱에 선 2004년, 추석이 며칠 지난 뒤 운명적인, 이상한 전화가 한 통 왔다. 경찰서 경무과장인가 계장이라는 사람의 무뚝뚝한 전화였다. 다짜고짜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영진 선생을 아십니까?”라고 하는 것이다. 멀건 대낮에 이 무슨 꿈같은 말인가?
엉겁결에 “네. 네. 아는데요. 제 동인학교 제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더 물을 새도 없이 뭐라고 몇 마디 하더니 전화를 뚝 끊는 것이다. 내가 귀가 어두워 말하기가 답답한 것 같다. 아니면 내 귀가 耳鳴症(이명증)에 걸렸나?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영진이 만난 지 30년이 훨씬 넘었는데, 가슴 방아가 가슴에서 찧기 시작했다. 영진이는 학생회장을 해서 정확히 기억나는 몇 명의 제자 중 더더욱 기억이 뚜렷하게 나는 제자다.
1969년 내가 경찰을 그만두고 돈 벌기 위해 월남에 갈 때 김포공항으로 배웅 나올 때 본 뒤로 한번도 못 보았다. 편지도, 전화도 한 통 없었다. 잠시 후 서울에서 영진이한테 울면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예요! 이번 일요일에 찾아갈게요. 며칠만 기다리세요.”
며칠 후 1회 남녀 졸업생 예닐곱 명과 東인천역 앞 식당에서 만나 큰절을 받았다. 그들은 머리 희끗희끗한 완전한 장년의 어른이 됐다. 학교 다닐 적의 잔졸맹이가 아니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꿈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몽유병자가 된 것 같았다. 30여 년 만에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재회였다. 목 울음 나는 것을 참느라 애먹었다.
그때는 총동창회도 없었고, 3회 졸업생들만 유일하게 10여 년 전부터 동기 동창회를 해 왔다고 한다. 2003년 말, 서울 을지로 명동 입구 식당에서 영진이와 명영덕 둘이서 열 세 분의 선생님을 찾아 ‘미니 사은회’를 했단다. 그 자리에서 나의 소식을 물으니 돌아가셨을 거라는 말만 나돌 뿐 아무도 나의 행방을 몰랐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KBS와 MBC의 〈TV는 사랑을 싣고〉
“얘들아! 모두 모두 잘 돼라! 고맙다!”
2004년 추석이 며칠 지난 뒤, 처음으로 1회 졸업생 제자를 만났고, 또 며칠 후 38년 만에 옛 상사를 만났다. 동인학교를 개교하는데 도움을 준 당시 이수영 동인천경찰서장과 상봉한 것이다. 李 서장은 우리 일행을 엄청나게 반가워했다. 李 서장은 동인을 개교해준 뒤 승진을 거듭, 부산시경국장(現 부산지방경찰청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부산시경국장을 하면서 釜馬(부마)사태를 맞았지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그까짓! 대학생 몇 명을 왜 진압 못 하는 거야!’라고 욕설 섞인 전화 호통과 수모를 하루에도 수없이 해댔지요”. 李 서장은 부마사태의 지휘 책임을 지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기 며칠 전 시경국장을 그만뒀다고 한다. 사실상 면직당한 거라고 했다. 이후 자민련 김종필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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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동인학교 사은회 및 동창회 기념촬영 |
2005년 5월 스승의 날에 동인학교 사은회가 인천 남동구 간석동 오거리 로열호텔에서 열렸다. 30여 년 만에 많은 선생님과 1회부터 7회까지 전체 동창이 한자리에서 감격스러운 재회를 했다. 강산이 서너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보니 누가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잘 몰라 얼떨떨했다.
맨 처음 식순에 새로 만든 금빛 황홀한 ‘校旗(교기) 입장’을 하였다. ‘동인중학교’라고 쓰여 있었다. ‘동인자매중학원’이란 원래 학교 이름에서 ‘자매’라는 말이 빠졌고 ‘중학원’ 대신 그냥 중학교라고 쓰여 있었다. 동창들이 ‘자매’와 ‘중학원’ 이라는 校名(교명)이 영 거슬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교기가 단상으로 입장하여 오는데, 눈물이 울컥울컥 가슴에서부터 차올라 목이 메었다. 30년 전에 없어진 학교의 혼이 “혼 돌아오네! 혼 돌아오네! 동인이 돌아오네!” 학교가 살아 돌아오는 듯, 돌아가신 어머니의 혼이 오시는 듯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내게 校旗를 넘겨줬다. 교기를 받아 쥐고, 몇 번이고 힘껏 흔들었다. 마음속으로 “얘들아! 모두 모두 잘 돼라! 고맙다!”고 외쳤다. ‘작고한 스승과 동문에 대한 묵념’에서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혼곡의 음악 때문만은 아니다. 이 좋은 날 참석 못 하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제자가 너무 많았다. 확인된 제자만 열 명이 훨씬 넘게 죽었다. 1회 졸업생에서만 5명이나 죽었다. 자살한 제자도 여럿이다. 불쌍한 녀석들…. 지지리도 복살 머리 없는 녀석들아! 춥고 배고프고 살기 힘든 시대였지만 너무 빨리 많이 초로인생처럼 죽었구나….
“빛으로 향한 배움의 열기는…”으로 시작되는 교가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승의 은혜 노래를 목이 메어 제창하는 남녀 제자들과 선생님들의 눈이 모두 충혈됐다. 누군가 먼저 울어 버리면 떼 울음 바다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연회장을 몇 번이고 강강술래 하듯 몇 바퀴를 돌았다.
흥 많은 어느 선생님은 재밌는 뱃살 춤을 추고, 또 어느 선생님은 요즘 젊은이들이 잘하는 ‘K팝’인지 랩인지 하는 긴 노래를 몸을 흔들며 흥겹게 불렀다. 머리에 하얗게 흰서리 내린 제자들이 그 선생을 둘러싸고 춤을 추니 백 년 묵은 응어리, 천 년의 한이 속 시원히 풀어지는 듯했다.
어찌 눈물 없이 피는 꽃이 있으랴. 척박한 황무지에서 피는 꽃이 더 향기가 나고, 더 아름답다. 생명이 오래간다. 가난과 싸워 이기자고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 의리 있는 제자들아.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물은 생명수다. 우리 선생님들은 물 한 잔 정도 布施(보시)한 것뿐이다. 거창하게 무슨 은혜를 베풀자고 야학을 한 것이 아니다. 오늘 같은 행복한 재회가 있으리라고는 애당초 생각지도 못했다. ‘배워야 산다’고 너희를 가르친 것뿐이다. 고맙다. 고맙다.
요즘 같이 삭막한 인심에 참다운 스승 찾기가 별 따기고, 참다운 제자 만나기가 자갈밭에서 보석 찾기다. 정규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일이다. 이러한 일을 보고 옛날 어른들은 흔히 신문에 날 일이라고 했다. 2006년 5월14일 제3차 사은회 행사를 <조선일보>가 취재해 5월15일 스승의 날 특집으로 대서특필하였다. A9면 사회면 지면에는 ‘동인사은회’ 기사가 지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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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14일자 <조선일보> |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命이 길어 죽었다고 헛소문까지 난 내가 팔십을 넘어 보고 싶었던 제자와 선생님을 만났다. 걸레스님 중광이 죽기 전 마지막 쓴 詩에서 “괜히 왔다 간다”고 싱거운 말을 했다지만, 나는 오래 살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하였던가. 원수 지지 않고 살았기에 행복한 재회를 해 기쁘지만, 제자들에게 미안하다. 내 인생에서 그래도 좋은 일 한 것은 ‘동인 학교’를 열어 애들을 가르친 것뿐이다.
“오늘의 이 모든 영광을 선생님께 돌립니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 인천行 경인고속도로 차창가에 기대어 상념에 빠져있다. 34년 전 동인학교 야학을 경영할 때의 선생님들, 제자 몇 명과 함께 가슴 뭉클한 특별한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한 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때 가르쳤던 제자 김영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30회 노산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노산 이은상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다.
2005년 12월14일 내 생애 팔십 나이에 가장 기분 짜릿한 가슴 너울이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제자의 여섯 번째 시집인 長시집 《심청가》로 받는 문학상이다. 시인들이 받는 문학상 중 40년의 전통과 권위가 있는 상이다. 화려한 화환과 꽃다발 속에 파묻힌 가운데 짤막한 수상소감 연설을 하는 제자의 당당한 모습에 엉겁결에 “만세! 만세!”하고 부를 뻔했다.
내로라하는 시인, 소설가, 교수, 박사 등 150여 명의 인사가 장내에 가득한 데 마이크를 잡고 가열차게 거침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사주팔자가 기구하여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원까지 야간학교만 다녔습니다. 고향에서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고, 돈이 없어 입학을 못 하고, 서울 가서 고학하겠다고 혼자 상경하였습니다. 인천에서 야간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맨땅에 천막을 쳐놓고, 등불 켜고, 공짜로 가르치는, 학교라고는 할 수 없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 저를 가르쳐준 동인자매중학원 선생님들이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 모든 영광을 선생님께 돌립니다!”
뒤통수를 무엇으로 세게 두들겨 얻어맞는 충격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초혼의 나팔 소리 같았다! 이런 자리에서 30년 전에 이미 없어진 한 많은 동인자매중학원이름이 대한민국 광화문 한복판 세종문화회관 마이크를 통해 불쑥 튀어나올 줄 생각도 못 했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순간 옆자리의 ‘동인’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의 주인공을 직접 가르친 선생님들이다. 선생님 모두가 울먹이고 있지 않은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경청하던 장내에 박수 소리가 인천 앞바다의 뱃고동 소리처럼 우렁찼다.
왜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하였나…
오늘 노산 문학상 받은 제자가 선을 본 얘기가 나의 마음 들뜨게 하고, 웃음이 나고 가슴에 파도치게 했다. 경부고속도로 만들 때 서울-부산 중간지점에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 사무실인 안전가옥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와 선을 본 아가씨는 그 사무실 비서를 했다.
그후 朴 대통령이 ‘포스코’로 자리를 옮겨줬다고 한다. 포항 남구 효자동 포스코 산자락 속에 박태준 회장 사택 겸 집무실이 있고, 朴 대통령이 간간이 오시면 집무하는 ‘백악관’, ‘청송대’가 있는데 그 ‘安家’ 비서로 일하던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와 제자가 선을 본 것이다. 선보는 날, 두 사람 사이엔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봉창 두들기는 소리 같지만, 재미있다.
제자: 저는 苦學을 했어요. 중학교 때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어요. 버스를 타고 사오십 리 길 연천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최전방만 다녔어요.
아가씨: 무슨, 총메고 싸웠서예?
제자: 네, 아이스케키 통 메고 했어요.
아가씨: 진짜예요? 웃기려고 하는 얘기 아니지예? 참, 재밌서예. 중학교 국어 선생 하는 아는 언니한테, 선생님 시집을 보여 줬서예. 선볼 남잔데, 어떻겠냐고예? 그 언니가 한참, 책을 보더니 “스물셋에 처녀시집 내고, 스물여덟에 또 책 냈네. 니가 싫으면 날 소개해봐”라고 하기에 내가 “됐서예! 했서예”라고 했지예.
무섭도록 강인한 사람이다! 날쌘 결혼을 자기가 먼저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아! 이 사람이구나!’ 결심했단다. 깔깔대며 해맑게 웃던 그 아가씨가 지금의 부인이 되었다.
차는 경인고속도로를 흑백영화의 필름 돌아가듯 나무며 건물을 스치며 쏜살같이 인천으로 내려가는데, 왜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가. 왜 좀 더 ‘동인’ 애들을 사랑해주지 못하였나… 내가 애들한테 해준 게 무엇인가? 가좌 인터체인지 근방을 지나며 어슴푸레 스치는 생각… 이 근방 인천교 옆에 우리 학교가 있었지.
그런데 1970년 3월인가 4월인가 밤 10시가 넘어 야간 수업을 마치고 귀갓길에 우리 ‘동인’의 꽃다운 여학생, 생때같은 네 명이 이 근방에서 차에 치여 즉사하였다. 가좌동과 가정동에 살았던 1학년 신입생 다섯이 걸음 동무 되어 나란히 손잡고, 인도도 가로등도 없는 까막 나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데, 차가 그냥 깔아버린 것이다. 꽃도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 애들은 야간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가다가…. 한 여학생만 중상을 입고 天命(천명)처럼 살아남았다. 학교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東仁의 신화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오십 넘은 장년의 제자들을 30여 년 만에 만나보니 걱정이 앞선다. 걱정도 팔자라 했던가. 자기 사업을 잘하고, 출세하고 잘된 제자들은 고맙고 감탄스러운데, 잘 안 풀리는 애들은 자격지심, 패배의식, 염세성이 심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좀 더 밝고 맑게 낙관적으로 모든 제자들이 다 잘 풀렸으면 좋겠다.
제자 중에 배곯고, 헐벗고 불운한 운명과 싸우며, 야간 중학교부터 야간 대학까지 졸업한 끈질기게 절망과 고난을 이겨낸 옹골찬 훌륭한 제자가 여럿이다. 해당화같이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신경숙은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 만에 쉰이 넘어 방송통신대를 졸업했다. 명영덕은 철도고를 나오고 방통대 졸업하고 다시 중앙대를 야간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또다시 방통대 대학원을 50대 후반의 나이로 마친 무섭도록 당찬 제자이다. 국민은행 동대문 지점장으로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회사 중역으로 있다.
회사의 사장. 직장의 고위직에 오른 투지와 인내로 인간 승리한 제자가 많다. 불사조는 비바람 속에서도 하늘을 난다. 눈물도 슬픔도 고독도 참고 견디며 난다. 노력 없이 얻은 영광 없고, 공들이지 않고 쌓은 탑 없다. 그런데 제자 중 우리 학교에 나온 걸 창피하다고 쉬쉬하는 제자가 더러 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나 자기부정은 없었으면 좋겠다. 동창들이 모인다는 걸 알면서 아예 동창회도 사은회도 나오지 않고, 꼭꼭 숨어 버린다. 차창가에 기대어 눈감고 속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동인의 자매들 굽어 살피어 주소서
모두 잘 되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절망하는 제자에게 용기를 내려 주소서
동인의 신화창조는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 시작일 뿐 이라고 일깨워 주소서
팔십이 넘은 이 늙은이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소서!
인생은 流水(유수)와 같다더니 세월이 참 빠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는 시간밖에 안 되는 인생 여정이다. 서울 다녀오는 차창가에 기대어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들었다. 얼굴도 이름도 알듯 모를 듯한 소년 소녀적 제자들의 해맑은 눈망울이 아침이슬처럼 스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