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건은 성주 사람으로 아호는 점재(点齋), 또는 우휴수(又休叟)라 하였다.
중종 23년(1528년)에 문과승지가 되었다.
그는 중형 눌재(訥齋) 충건(忠楗)과 함께 일찍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조광조가 기묘사화의 화를 입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감히 가서 조상을 못하였는데 이문건과 그의 형 이충건, 그리고 동료 문인 한 사람이 같이 가서 장례를 모셨다.
인종이 동궁(황태자∙태자 또는 왕세자를 일컫는 말)으로 있을 때 이문건이 가깝게 옆에서 오래 모시니 가장 정중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이 하사하는 표찰이 붙은 관(冠)과 갓끈 등을 내리시고 총애하셨다.
중종이 승하하시니 이문건이 빈전도감[殯殿都監 : 빈전의 일을 맡아보던 임시 기관]의 집례관(執禮官)으로서 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과 시책[諡冊 : 시책문을 새긴 옥책(玉冊)이나 죽책(竹冊)], 신주 등을 모두 이문건의 글씨로 썼으며 그는 전자(篆字, 한자 서체)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인종이 또 승하하시고 을사사화가 일어나던 날 전에 있었던 공적을 기록한 후에 수찬직에 있는 조카 이휘(李煇)가 당한 사화에 연좌되어 성주에 귀양을 가서 퇴계 이황(李滉), 율곡 이이(李珥), 남명 조식(曹植) 등 모든 선생과 더불어 왕래하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이문건이 임종 시에 보첩(譜牒 : 족보책)을 작성할 때 자손의 이름을 미리 지었는데 10여대에 이르기까지 적손 자손들이 혹은 많고 혹은 적으며 혹은 없다는 것이 한결같이 족보와 부합하고 출생해서 일찍 요절하는 자는 이름 옆에 둥근 점을 찍어 놓으니 대개 미래사를 앞서 알고 있음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문건의 한 생애가 특이함을 잘 알지 못했다.
이문건의 아버지 정자[正字 : 홍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 속한 정구품 벼슬]공 이윤탁(李允濯)의 묘가 양주의 노원(지금의 서울 노원구)에 있었는데 그 묘갈과 그곳에 새겨진 문장이 다 이문건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후손이 멀리 있어서 오랫동안 성묘를 하지 않았으니 그 지역에 사는 어떤 사람이 그 임야를 점유한 바가 되어 그 점유자가 그 산의 나무를 벌채하니 이윤탁의 묘갈이 출현하였는데 완연히 새것과 같았다.
산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그 산을 점유한 자가 남의 묘를 무단 점유하고 어찌 묘소와 묘갈을 파괴하지 않았느냐?” 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답하기를
“그 묘갈은 영험한 비석이기 때문에 이 고장에 사는 사람들이 병에 걸려서 빌면 효험을 보았고 나무하는 아이가 혹 그 비석의 석편이라도 흠결이 나게 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었으니 그 신령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감히 훼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묘갈의 비문은 전⋅후면은 다른 일반 비문과 대개 같으나 양 측면에 아래와 같은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수백 년 전에 한글 글자를 기록한 비는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불인갈(不忍碣)
부모를 위해 이것을 세우노니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이 비석을 훼손하는 것을 어찌 참겠는가.
비석을 훼손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인즉
묘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할진대 만세의 뒤에까지도 가히 훼손을 면할 것을 알진저
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 위부모립차수무부모하인훼지석불인
犯則墓不毁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 범칙묘불훼명의만세지하가지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