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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국 강병의 논리가 아니라고 받아들여 주지 않는 무도한 임금에 실망을 느끼고, 다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새로운 임금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얼마를 가자 앞에 큰 강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일행 가운데 나루터가 어디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 저만치에 밭을 가는 두 사람이 보였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장저와 걸닉이었습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불러 그들에게 가서 나루터 가는 길을 묻도록 했습니다. 자로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루터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자 장저가 되물었습니다.
”저기 수레에 올라 앉아 점잖게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공구이십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 가는 길쯤은 알고 있을 텐테?”
장저는 더 이상 대꾸도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만 했습니다. 답답해진 자로가 이번에는 걸닉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걸닉도 자로에게 되물었습니다.
”나루터 가는 길을 묻는 너는 누구냐?” “중유입니다.”
”공구란 사람의 제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물처럼 거세게 흘러가는데 누가 감히 고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자네도 나쁜 사람이나 피해 다니는 그런 공자 같은 사람을 따라다니지 말고 차라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우리들과 같이 지내는게 어떠한가?”
걸닉도 더 이상 자로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머쓱해진 자로가 돌아와서는 공자에게 그들이 한 얘기를 전했습니다. 말을 다 듣고 나서 공자가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는 엄청난 혼란기였습니다. 그 혼란은 경제적 변화로부터 왔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주 산업인 농사에 소를 쓰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습니다. 비료를 만들어 쓰기 사작했고, 관개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 발전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농업, 공업, 상업의 분화를 활발하게 했습니다. 이 같은 경제 발전은 토지를 잠시 점유하고 이용한다는 생각에서 토지를 영원히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따라서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었고, 이 욕심을 채우는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습니다.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제도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부국 강병을 위한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민중으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는 금방 무너졌고, 신하들이 틈을 보아 제후를 쓰러뜨리고 땅을 나누어 갖기도 했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뻘건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듯 도도하게 흐르는 춘추 시대의 엄청난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여기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혼란을 보면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간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던 은사들, 바로 장저와 걸닉 같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비난도 “아침에 온 세상이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바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한 삶에서 피어난 위대함
동양에 살면서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끼던 제자가 먼저 죽었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하기도 했고, 못된 인간들에 대해서는 불같이 성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아주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매우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2500여 년에 걸쳐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심 문화였던 유가 사상의 대표자입니다. 공자는 중국 문화의 출발점이었고, 주류였습니다. 한때는 한나라에서 신격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사마천이 <사기>에 공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다시 인간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성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으며, 공자의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 관계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일흔세 해를 살았습니다.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약소국인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 해당합니다. 본래 노나라는 주나라 초기의 공신인 주공의 후손에게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공자가 꿈에도 그리돈 인물이었던 주공은 주나라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여 통치 기반을 다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곡부는 비록 작은 땅이기는 해도 상당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자사상의 성립은 이러한 문화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이 공씨이기 때문이며, 뒤에 붙은 ‘자(子)”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입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였습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흘은 하급 무사였습니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는 10명이라고도 하는 많은 누나들과 몸이 성치 못한 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중니(仲尼)인데, 중(仲)은 둘째라는 뜻이며 니(尼)는 앞에서 말한 니구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갖고 싶어서 뒤늦게 안징재라는 여자에게서 공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 숙량흘은 70세가 넘었고, 안징재는 나이 어린 소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에 대해 ‘야합해서 낳았다(野合而生)’고 하였습니다. 야합이란, 말 그대로 들에서 합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생아였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전 학자들은 차마 공자를 사생아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온갖 주장을 통해 미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생아였다고 해서 공자의 위대성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점에서 더 돋보일 것입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떤 일본 학자는 공자의 어머니가 무당이었거나 아니면 잔치 자리에서 춤추는 무녀였고, 맹인이었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행사가 있는 곳들을 찾아 다녀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공자가 맹인인 어머니 손을 잡고 잔치 자리들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공자가 어린 시절에 가난하게 자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했고,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했을 때 가축들이 살지게 잘 자랐고, 창고 출납을 맡았을 때 셈이 정확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꾸준히 독학을 했던 것 같고, 20세 무렵부터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혼란은 주나라 초기의 굳건했던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나라는 농경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 낸 강력한 가족제를 국가에 확대 적용한 봉건제 국가였습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농경 사회로 자리잡았습니다. 농사에는 씨를 뿌릴 땅이나 열매를 맺도록 돕는 비와 햇빛도 필요했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업은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집단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가족 제도가 대가족제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만 많다고 농사가 잘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농업 중심의 대가족제는 효율적인 노동력의 통제가 중요했고, 농업 노동의 효율적 통제란 사실 대가족제의 효율적 통제였습니다. 그런데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 경험이었고,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노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노인 중심의 대가족제 윤리인 종적 윤리, 즉 가부장적 윤리가 자리잡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계 사회로부터 부계 사회로의 사회 변화도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부자 중심의 종적 윤리를 국가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봉건제였습니다.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주나라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리는 종가집을 중심에 놓고서 정복한 여러 땅에 집안의 형제, 작은아버지, 조카 같은 친척이나 아니면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 식구들을 제후로 임명했습니다. 각각의 제후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서 다시 자기 집을 작은 종가집으로 놓고 자기의 형제,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통치의 꼭대기에 천자의 친족인 종가집을 두고, 다시 그 종가집과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이 있고, 또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과 혈연 관계로 연결된 귀족들을 둠으로써 통치 체계 전체가 가족 관계를 이루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가족 관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효제,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효와 형제들 사이의 공경을 의미하는 제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혈연 관계가 멀어지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땅을 처음 나누어 가진 것은 형제였지만, 200-300년 지나 10대를 내려가서는 남과 다름없는 20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혈연 관계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공자가 태어난 제후국 노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노나라는 노나라 왕실로부터 땅을 나누어 받았던 세 명의 대부 집안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인 계손씨가 자기 집 뜰에서 천자의 의식에서만 출 수 있는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하는 것을 본 공자는, 더 이상 그 무도함을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공자 나이 35세 무렵이었습니다.
제나라를 시작으로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 그 왕들이 자기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고생스러운 여행길에서 불현듯 고향 생각이 난 공자는 51세 무렵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급히 노나라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노나라가 어느 정도 질서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듯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습니다. 공자가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가 노나라는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자가 평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가 방해 책동을 해 공자는 다시 고향을 더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됩니다. 그는 68세 무렵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편찬하다가 몇 년 후 죽었습니다.
공자는 참으로 불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정말 사생아였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의 어머니는 무당이거나 춤추는 여자, 게다가 맹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하찮은 직업들을 가졌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공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공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공자의 부인이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논어 ‘향당’편에는 공자의 평소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음식이 간이 맞지 않거나 반듯하게 썰려 있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옷도 법식에 맞지 않으면 입지 않았으며, 자리도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공자의 부인이 그 까다로움을 이기지 못해 도망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공자는 무려 30여 년 동안 72명의 임금을 만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지만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도가 실현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만나기도 했고, 굶주림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자를 보고 당시 어떤 사람은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애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그가 남긴 책들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공자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3000명은 과장이겠지만 아무튼 많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여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어떤이는 공자를 비난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감복하여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자가 죽은 뒤 대부분 공자 무덤 옆에서 3년상을 지냈습니다. 그 뒤 일부가 남아서 또다시 3년상을 지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에 의해 공자의 사상이 중국 각지로 퍼져 갔습니다. 이것이 공자 사상을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힘이었습니다.
동양의 지혜
공자 이전의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틀어쥐고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뿐이었습니다. 이 점은 책도 마찬가지여서 민간에서는 책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당시의 달라진 사회적 조건에 힘입어 일정한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립 학교를 세운 셈이었고, 아울러 보통 교육, 평등 교육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자 학당의 교과서로는 주로 공자가 편찬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등이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공자는 당시 242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춘추라는 역사책을 짓기도 했습니다.
공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은 논어입니다.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논어는 ‘의논해서 편찬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진시황의 분서 갱유를 지낸 한나라 초기에는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자가 살던 옛집의 벽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는 그 가운데 제나라 본과 노나라 본을 합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편의 이름은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논어는 송나라 때 이르러 대학, 중용, 맹자와 더불어 4서라고 칭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공자의 말과 행동, 공자와 제자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제자의 말, 제자들 사이의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제자들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문으로 쓰여진 대부분의 동양 고정들이 그렇듯 논어도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논어를 읽으면 마치 인디언 추장의 말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살신 성인’이라든가 ‘극기 복례’같은 교훈적인 말들은 대부분 논어에 들어 있습니다. 논어는 도가 사상이 휩쓸던 위진 남북조 시대에도 노장, 주역과 더불어 삼현(三玄)으로 높여졌고, 예전 우리 나라 승려들도 논어를 필독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仁)입니다. 논어에는 인이라는 글자가 무려 106번이나 나옵니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그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의 뜻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인을 자비심, 인정 박애로 해석되는 Benevolenc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도 마찬가지로 공자가 말한 의미를 다 담지 못합니다.
역대 학자들은 인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맹자는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라고 했고, 주자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근대 중국의 학자 강유위는 ‘사랑의 힘’이라고 했고, 호적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밖에도 풍우란은 ‘완전한 덕’이라고 풀었고, 채원배는 ‘완성된 인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적인 어감이 아니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을 어떻게 새겨야 공자의 사상이 잘 표현될까요? 공자는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소아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만물의 본질을 자연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 같은 사람이고,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물, 불, 흙, 공기 등을 가지고 자연의 본질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같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 놓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이 만든 말은 아니었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문제의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논어 ‘선진’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에, 사람에서도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는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입니다.
논어에 보이는 인은 대부분 공자 스스로 말한 것이거나 남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철학적인 말을 쓰면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인(仁)은 두 이(二)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이상이나 사람 이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위미에서 그는 신본주의자가 아닌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고(仁者人也)풀었습니다. 이 말은 맹자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여기서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을 ‘어질다’로 풀어서는 의미가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인은 ‘사람다움’이라고 풀어야 합니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道)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가 추구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공자는 사람을 4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맨 아래가 소인이고, 그 다음이 군자입니다.
논어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로움이 될 만한 일을 보면, 먼저 그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기는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자신이 참다운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반대로 소인은 누구라도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남들과 참답게 어울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고 주체를 잃고 남에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참답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 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되려 하는 사람도 때로 사람답지 못한(不仁) 짓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소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운(仁)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자도 항상 사람다운 것은 아니며, 군자 위에 사람다운 사람(仁人)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군자가 되기도 어려울 텐데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다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한 말과 비슷합니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의 사리 사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또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용기입니다. ‘진정한 용기란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라고 ㅁ라하는 것’이라는 서양 속단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분명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해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 자리이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참다운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은 맞설 자가 없다(仁者無敵)’고 한 것입니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참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일생에 딱 한 번 죽을 뿐입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날이 정말 죽는 날입니다.
그러나 비겁한 사람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죽습니다. 그가 사람답기를 포기할 때마다 그의 존재 의미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다움이란 개인에게는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처럼 인을 실천하는 일, 즉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또한 사람다운 행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 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위에 다시 성인을 두었습니다. 사람다움의 완성이 성인인 것입니다. 논어 ‘옹야’편에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가 나옵니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사람답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목표가 성인에 있고, 성인이란 현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다움의 실천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충(忠)과 서(恕)를 말했습니다. 먼저 효와 제를 봅시다.
공자는 부모의 몸을 받드는 것을 효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짐승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재아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3년상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하면서 1년만에 상을 마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재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어도 편하겠는가?”
”예, 편할 것 같습니다.”
”군자가 상을 당했을 때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마음 편히 안락하게 거처할 수 없기 때문에 3년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편하다면 네 생각대로 해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재아는 사람답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날 수 있다. 3년상은 세상 사람이 다 지내는 것이다. 재아도 부모에게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는가?”
공자가 말하는 효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보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효와 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 실천 방법인 충과 서는 어떠한 것일까요?
어느 날 만년의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나이가 어린 제자 증삼을 불렀습니다.
”삼(參)아, 내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조금 전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증삼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증삼은 공자보다 마흔여섯 살 아래인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후에 공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충이란 무슨 뜻일까요? 충의 본래 뜻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닙니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붙인 것입니다.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속에 중심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반대는 환(患)입니다. 환(患)은 중(中)자를 두 개 겹쳐 놓고, 그 아래에 심(心)자를 쓴 것입니다. 즉 마음 속에 중심이 둘이나 되어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충은 무엇이 옳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성실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恕)는 어떤 뜻일까요? 서는 같을 여(如)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를 쓴 것입니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남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서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식이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반대로 부모가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仁), 즉 사람다움의 실천은 중서의 실천이며, 중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부모와 형제 관계입니다. 따라서 효와 제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근본이었습니다.
‘답게’하는 정치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잡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잡는 것일까요?
제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정치가 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치고는 참으로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각각이 자신의 ‘다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는 저절로 잡힐 것입니다. 실제 윗사람이 윗사람답게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은 진정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법입니다.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됨됨이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에 이에 대한 유명한 대화가 나옵니다.
위나라 임금의 초청을 받은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위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해보려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명분을 바로잡겠다.”
”선생님은 사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째서 명분 같은 것부터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할 수 없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할 수 없고,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말도 드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선생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선생님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인 사모님은 제비족들도 애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의 인플레입니다. 호칭이 바르지 못하면 그런 호칭을 가진 사람의 말이 권위가 없어집니다. 말이 권위를 잃으면 그가 한 말대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회는 문화가 건강할 수 없으며 그런 문화에 바탕을 둔 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마침내 대다수 민중이 입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법이나 힘으로 강제해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덕과 예절로 바로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공자는 정치와 형벌로 이끌면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만 피하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지만, 덕으로 이끌고 예절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벌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실정법 만능 사회에서는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닙니다. 공자는 법에 앞선 도덕을 말했으며, 실천에서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더라도 아래서 행하지만,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공자의 생각에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귀족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사상의 가치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공자는 사회 관계가 사람 사이의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했습니다.
섭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어떤 마을에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증인을 섰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 백성들의 정직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줍니다. 정직이란 바로 그 속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논어 ‘안연’편에 보이는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 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각각의 역할 다하는 사회, 이것이 공자가 바란 대동 사회였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공자 사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양에서의 영향은 한나라 때부터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등용한 정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송나라 때 성리학이 나오고, 주자가 해설을 붙인 4서와 5경이 과거 시험의 기본 교과서가 되면서부터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공자의 영향은 동양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라이히바인은 공자 사상이 18세기 서구 계몽 사상을 뒷받침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에서도 문화 혁명기 동안 비판받았던 공자가 개혁 개방과 더불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싱가폴, 대만, 홍콩처럼 유교 문화권에 들어 있는 국가들의 수준 높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보면서, 유교가 비록 전근대에서 나온 사유 체계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에도 여전히 이바지할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교 자본주의론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자 사상은 봉건제 사회의 전제 군주제를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현대에서도 계층간의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감추고 경제적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공자 사상의 가치는 인문 정신의 극치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였습니다. 공자에게는 인간다움의 회복을 통해 사회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이 있었고, 그 열정이 교육을 통해 열매맺음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의 도덕 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자 사상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데올로그들이나, 이론을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 낸 이름난 사상가들에 의해 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답게 살려고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쉼없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천이 자기 마음속의 만족 외에 달리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점에 공자 사상의 비극이 들어 있습니다. 공자 사상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따라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흉노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남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그가 지은 <사기>를 통해 유교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비그적인 면을 잘 드러내 보였습니다. 사람다움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다움을 이루었다고 공자가 극찬한 백이 숙제에 대해, 사마천은 옳은 일을 하고도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 안회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반면, 이름난 도척은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도 수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렸다고 썼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사마천은 하늘의 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유교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자 사상의 강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을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입니다. 공자 사상에는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입니다. 그 당위는 사람이 마땅히 갖는 책임이나 사명 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 당위를 따라간 많은 실천들을 굽히지 않는 비판 정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나라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학문의 정통 맥을 사림파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사림파가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 간,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말 의병 운동이나 항일 무장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현대식 화력으로 무장한 외세와 맞서 싸우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이 공자 사상의 알맹이입니다.
[출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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