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동 최씨 고택 (慶州 校洞 崔氏 古宅)』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만석꾼 경주최씨의 고가옥. 경주 최부자옥(慶州 崔富者屋)으로도 불림>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 수량; 1곽 | 지정일; 1971. 05. 27.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교촌안길 27-40 (교동 69번지) | 시대; 조선시대 | 소유자/관리자; 학교법인 영남학원 / 영남대학교박물관 답사일; 2014. 08. 20(수), 아들과 함께 수학여행 추억 더듬기
400여 년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켜냈던 경주 최부자의 고택 「경주 교동 최씨 고택」 2년 전 오월 사랑채 옆 화단에 자목련이 곱게 피었을 때 아내와 함께 찾았었는데,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 다시 찾았습니다.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 째 진사를 배출한 최부자의 고택은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이 여전하였고 우린 「경주 교동 최씨 고택」에 숨어 있는 부(富)에 대한 철학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 경주 교동 최씨고택, http://blog.naver.com/jcjkks/70137352171, 2012. 05. 04. 포스트.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의 안채, 마당 한쪽 장독대 옆에 굴뚝이 세워져 있는 'ㅁ'자형 건물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의 솟을 대문, 2박3일 경주여행의 첫날, 대릉원 → 첨성대 → 계림 → 월성과 석빙고에 이어 교동으로 이동하여 99칸 경주 최부자 집을 찾았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 안내문, 현재 사랑채는 복원되었는데 '주춧돌만 남았다.'는 안내문의 내용은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채와 별당에 화재가 발생한 해가 1970년이라고 쓰여 있는데 <두산백과>에서는 1969년에 화재가 발생 되었다고 하여 서로 다른데 사실 확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에 자리한 고택, 경주 사는 사람치고 이 '최 부잣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본래는 원효대사와 정을 나눠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터였다고 한다. 최씨 집안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 10대 300년 동안 만석꾼이었을 정도로 부유했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했으니,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명문가이다.
그뿐인가!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말도 이 집과는 인연이 없는 듯.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온 가훈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거론할 때마다 모범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원래 99칸 집에 대지만도 약 6천 6백㎡, 후원은 약 3만 3천㎡에 달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ㅁ자 안채와 대문채, 사당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70년 화재 이후 원형 복원이 미루어져 오다 최근 복원되었다.
이곳에서 빚은 교동법주는 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씨고택의 바로 옆은 최 부잣집의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요석궁'이라는 전통 한식집이 있다. 이 자리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의 궁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경주시청>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경주 교동 최씨 고택」의 사랑채, 1970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습니다.
▲ 경북 교동 최씨고택 전경, <사진; 문화재청> 사진 속에 주춧돌만 보이는 사랑채 터에는 현재 'ㄱ'자형 사랑채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경북 교동 경주최씨고택】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출처; 문화재청>
▲ 사랑채의 주춧돌만 남아 있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 <사진; 두산백과>
【경주 교동 최씨 고택】……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최부잣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했다.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동안 머물면서 최준(崔浚 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재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재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행랑·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고방·안채·사당·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 <출처; 두산백과>
▲ 경주 교동 최씨고택의 솟을대문, 사랑채, 전경, 안채, 곳간채, 사당, <사진; 경주시청>
사랑채, 마당에 있는 석연지(石蓮池)에는 수생 화초를 기르고 있습니다.
사랑채에는 3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한없이 겸손한 뜻을 담은 '大愚軒(대우헌)'과 '鈍次(둔차)' 현판에서 경주 최씨 가문의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용암고택(龍庵古宅)이라고 쓴 댁호 현판, 龍庵古宅(용암고택)의 글씨는 최진립 장군의 14대 종손인 우산(愚山) 최채량의 글씨랍니다. 현판의 작은 글씨로 보아 사랑채를 복원하고 나서 2006년(丙戌, 병술) 가을에 쓴 것입니다.
대우헌(大愚軒) 편액, 大愚軒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호입니다. 大愚(대우, 크게 어리석음)에서 따 온 것이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함으로써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라(大愚)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鈍次(둔차) 현판, 鈍次(둔차)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호로 '재주가 둔해 으뜸 가지 못함'이란 뜻입니다. '대우헌'처럼 '둔차' 역시 만석꾼 부를 지켜온 철학이 담겨 있는 호입니다.
경주 최 부잣집에 걸린 현판 '둔차(鈍次)'는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이란 뜻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1등의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또 다른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런 도전 등을 덜 받기에 여유롭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이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富)의 비밀이다. <퍼온 글>
아래는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家訓)입니다.
가거십훈(家居十訓) 1. 明人倫 (명인륜) 인륜을 밝힌다. 2. 事親孝 (사친효)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 3. 愛君忠 (애군충)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을 다한다. 4. 宜室家 (의실가) 가정을 잘 다스린다. 5. 友兄弟 (우형제)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다. 6. 信朋友 (신붕우) 친구 사이에 신의가 있다. 7. 遠女色 (원여색) 여색을 멀리 한다. 8. 戒醉酒 (계취주) 술에 취함을 경계한다. 9. 課農桑 (과농상) 농업과 잠업에 힘쓴다. 10. 講經學 (강경학) 경학을 익힌다.
사랑채 뒷쪽에 있는 단정한 모습의 사당입니다. 사당 앞은 수목이 우거진 정원입니다.
사당 오른쪽은 안채,
사당 앞에서 바라본 사랑채 뒷모습,
사당 앞에서 바라본 안채 후원과 협문,
사당 앞 정원에 세워져 있는 석탑,
비에 축촉한게 젖어 있는 사랑채 앞에 있는 화단,
경주 최부자집의 7개 곳간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간채입니다. 곳간채 앞에는 경주 최부자집을 소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육훈, 육연, 가훈과 가옥배치도가 놓여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의 육훈과 육연, 12대 만석지기와 9대 진사의 철학이 녹아 있는 내용입니다.
[출처] 『경주 교동 최씨 고택 (慶州 校洞 崔氏 古宅)』|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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