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10일 [음력 : 2006년(丙戌年) 5월(丙辰) 15일(庚午)]
오늘의 관심뉴스는 중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피를 이어받은 조선족 학생의 선행에 관한 기사라 올립니다.
역사적으로 외침만을 받으면서도 항상 선한 마음, 은근과 끈기로 이어 온
한민족의 피는 못속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하다! 광춘아!~
-----오-늘-의--관-심-뉴-스------------------------------------
강도잡다 중상 중국조선족 학생에 온정 '밀물'
지난달 초 소매치기 강도를 뒤쫓다 격투 중 흉기에 찔려 쓰러진 뒤 9일 현재까지 병원에 입원중인 중국 지린(吉林)시 조선족중학교 류광춘(16) 학생을 돕기 위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류 군은 지난 5월5일 저녁 오후 11시께 친구 김 건 군과 함께 시내를 걷다 왕모(여)씨가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곧바로 뒤따라 가 강도를 붙잡았고, 이 과정에서 격투 중 강도가 휘두른 칼에 찔려 병원으로 후송됐다. 강도 4명은 이들과 함께 교통방송을 들은 택시기사 100여명,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병원에 실려간 류 군은 응급수술을 받았고, 이 소식을 접한 피해자 왕씨는 1천200위안(14만2천원)을 들고 달려왔으며 강도를 잡는 데 도움을 준 택시기사 100여명도 수술 중 피가 모자란다는 방송을 듣고 달려와 앞다퉈 헌혈했다.
택시기사와 시각장애인, 중학생 등이 병원을 찾아 ’어서 건강을 회복하세요’란 메모와 함께 성금을 놓고 간다는 보도가 현지 길림신문에 소개되면서 중국 지린시를 비롯한 전역이 이 조선족 학생에 감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원중인 류 군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1만위안(118만원)의 병원비를 체불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그를 돕기 위한 온정은 다시 밀물처럼 몰렸다.
중국 ’정의용사’(정부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 13명은 지난 6일 류군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 위로했고, 중화정의용사기금회는 류 군에게 기금 3만위안(356만원)을 전달했다. 친구와 함께 강도와 싸운 김 건 학생에게도 5천위안(59만4천원)이 주어졌다.
창춘(長春)의 조선족기업가 박모씨는 길림신문에 5천위안을 보내면서 “류 군의 건강이 회복돼 복학하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00명이 넘는 익명의 독지가들도 ’사회 풍기가 더욱 좋아지기를 희망한다’ 등의 메시지와 후원금을 전하는 등 온정이 이어졌다.
지린성 공안국은 2명의 학생에게 ’정의수호자(見義勇爲)’ 칭호를 신청했다.
길림신문 관계자는 “중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필리핀 등으로부터 성금 문의전화와 e-메일이 쉴새없이 들어오고 있어 따뜻한 인간애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중국)431-761-9812. 서울=연합뉴스/입력 : 2006.06.09 11:12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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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화폐속의 인물 보든(캐나다) 세상떠남
보든(Sir Robert Laird Borden) 1854. 6. 26 ~ 1937. 6. 10
캐나다의 제8대 총리(1911~1920년)겸 보수당 당수(1901~20년)역임
보든은 국제연맹에 캐나다가 별도의 회원국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캐나다의 위상을 식민지에서 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191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노바스코샤의 작은 마을 그랑프레에서 태어났고 사립학교의 조교직을 맡아, 1874년에 교사 생활을 마치고 핼리팩스에 있는 한 법률사무소의 수습생이 되었다. 1878년 노바스코샤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법조계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올랐으며, 1889년 법률사무소를 설립하여 후에 연해주(沿海州)들에서 최대 규모의 사무소가 되었다. 1911년 미국과의 호혜무역협정을 수락하기로 한 자유당의 결정을 호재로 이용하여 총선에서 로리어를 꺾고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과 캐나다의 관계에서, 제국의 정책 수립에서 캐나다의 발언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온 보든의 보수당 정부가 1917년의 선거에서 연방주의 지지세력이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보든은 전쟁 노력에의 완전참여와 캐나다의 국제적 역할을 골자로한 정책들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보든의 첫 번째 내각은 무능과 매관매직과 전쟁모리에 대한 비난의 화살들이 보든의 행정부에 쏠리면서 보든에 대한 국민의 신임이 떨어졌으나, 징병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내각을 개편하고 유능한 동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정책을 지지했으며, 거기에 캐나다군이 참가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3,000명 규모의 캐나다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그 군대가 장차 무역상의 이권을 얻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지만, 여론의 압력으로 인하여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든은 1919년의 위니펙 총파업의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형법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의회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법률의 선동에 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그들을 기소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적의를 사게 되어, 1920년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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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화폐속의 인물 운세트(노르웨이) 세상떠남
노르웨이 1999년 발행/노르웨이의 소설가.
운세트(Sigrid Undset) 1882. 5. 20 ~ 1949. 6. 10
그녀의 작품은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며 192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고고학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그녀의 집안은 전설, 민속, 노르웨이 역사로 가득했다. 여기서 받은 영향과 자신이 겪은 인생 이야기가, 어린시절에 관한 소설 〈11년 Elleve aar〉(1934)에서부터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노르웨이를 탈출하는 이야기로 원래 영어로 출판된 〈미래로 돌아가라 Return to the Future〉(1942)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작품 속에 나타난다. 그녀는 10년 동안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소설은 현대의 중하류계층의 낭만 없는 세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루었으며, 〈거울 속의 영상 Splinten av troldspeilet〉(1917)?〈제니 Jenny〉(1911)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그후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3부작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 Kristin Lavransdatter〉(1920~22)를 썼다. 놀라울 정도로 중세적인 분위기를 띠면서도 여전히 여성의 운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자부심과 독립심이 강한 크리스틴이 매력적이지만 책임감 없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강하지만 겸손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과 4권으로 된 역사소설 〈올라브 오이둔쇤 Olav Audunssøn〉(1925~27)에서는 종교문제가 두드러지면서 작가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1924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당대의 주제로 돌아온 후기 소설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큰 역할을 한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 탈출하여, 남은 전쟁기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전쟁으로 지친 고국과 망명정부에 관해 강연하고 글을 쓰면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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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 화폐속의 인물 카몽스(앙골라) 세상떠남
카몽스(Luis (Vaz) de Camoes)포르투갈의 위대한 국민시인.
(영)Luis Vaz de Camoeos(Camoens). 1524 ∼ 1580. 6. 10.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우스 루시아다스 Os Lusiadas〉(1572)라는 대서사시를 썼다. 카몽스는 그의 위대한 서사시와 사후 출간된 서정시로 인해 포르투갈 문학과 브라질 문학에 불멸의 영향력을 끼친 대시인이다.
카몽스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별로 많지 않지만 대별하면 17세기 전기작가들이 그에 대해 남겨놓은 자료, 19세기와 그후의 몇 가지 후속 작업에 의해 발굴된 몇 안 되는 문서,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 아주 불분명하게 언급된 자신의 생애 등 대체로 3가지로 나누어진다. 일부 성공한 전기작가들은 그에 대한 많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하고 세밀한 전기를 만들어냈지만 그 대부분이 구체적 문서에 의해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카몽스는 1524년 아니면 1525년에 리스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포르투갈의 국력이 한창 동방으로 뻗어나가던 때였다. 연구조사 결과 그의 가문은 몰락한 귀족 집안이었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공(大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카몽스가 쿠임브라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든지 또는 정규학업을 쌓았다든지 하는 전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대의 시인치고 그처럼 고전과 당시 문화와 철학에 대한 소양을 갖춘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포르투갈령 모로코에서 한동안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추방을 당해 그곳으로 갔는지 아니면 당시의 젊은 귀족 자제들처럼 군 경력을 시작하여 왕의 호의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리스본에서 보낸 청년 시절도 그리 착실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1553년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그 싸움에서 왕의 근위대 장교가 다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해 체포되었으나 주앙 3세가 그를 사면해주었다. 이같은 사면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는 인도로 갔다. 그러나 그뒤 17년 동안 무슨 일을 하면서 그 지역을 방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 이 지방의 사회환경을 잘 묘사한 부분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그곳에 갔던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가 자주 시 속에서 자신의 불운과 불공평한 처우를 불평한 것을 보면 인도에서 큰 돈을 벌지는 못한 것 같다. 동방에 나가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서사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상의 전투에도 한두 번 참가했으나 메콩 강의 델타 지역에서 배가 난파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방에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의 전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천 명의 포르투갈인들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포르투갈인들의 목숨과 행운은 신의 가호 하나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르투갈의 동방 개척사를 쓴 디오구 두 코투는 16세기의 역사가는 그가 목격한 여러 전투를 꼼꼼하게 자신의 역사서에 기술했으나 카몽스가 전투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는 쓰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이며 위대한 시인인 카몽스가 돈 한 푼 없이 모잠비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리스본으로 돌아가는 배삯을 물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적고 있다.
카몽스는 1570년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1572년초 〈우스 루시아다스〉를 발간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인도에서 복무한 사실과 이 서사시를 써냈다는 점이 감안되어 왕으로부터 특별 연금을 받았다.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 이 연금을 그녀의 명의로 변경시켜 계속 혜택을 받았다. 그당시의 연금 수령 사실과 어머니로의 명의 변경에 관련된 서류가 남아 있어 카몽스의 사망연도가 1580년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질병과 고생으로 인해 일찍 죽은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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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화폐속의 인물 가비 (자메이카) 세상떠남
가비(Marcus (Moziah) Garvey)1887. 8. 17 ~ 1940. 6. 10.
뉴욕 시 할렘에 기반을 둔 미국 최초의 주요 흑인민족운동을 조직한 흑인 지도자.
14세까지 자메이카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그뒤에는 주로 독학했다. 중앙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1912~14년 런던에서 살았으며 그뒤 자메이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세계흑인인권개선보호협회와 아프리카 공동체연맹(Universal Negro Improvement and Conservation Association and African Communities League)을 설립했다(1914. 8. 1). 이 단체는 보통 세계흑인지위향상협회(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UNIA)로 부르며, 아프리카에 흑인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가비는 자메이카에서 추종자를 얻는 데 실패하자 1916년 미국으로 가 뉴욕의 할렘과 북부의 주요 슬럼가 몇 군데에 UNIA 지부를 설치함으로써 '흑인 모세'로 떠올랐다. 협회에 가입한 회원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비는 1919년에 추종자가 약 2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뉴욕 시 할렘에 있는 협회의 리버티 홀에서 그는 '새로운 흑인'(New Negro)이라는 제목으로 흑인임이 자랑스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그가 펴낸 신문 〈니그로 월드 Negro World〉는 흑인 영웅들의 공적과 아프리카 문화의 탁월함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흑인들의 지위가 경제적으로 향상되어야만 존경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백인 자본주의 틀 안에서 독립적인 흑인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음식점?식료품점?세탁소 등을 여러 개 세우고 호텔?인쇄소를 하나씩 세웠으며 흑인공장법인과 블랙스타운수회사를 설립했다(1919).
1920년에 리버티 홀에서 25개국의 대표들이 참가한 국제회의를 이끌었는데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이 집회는 가비가 5만 명의 군중을 이끌고 할렘 거리에서 화려한 시가행진을 할 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가 사업을 잘못 운영하고 백인 인종차별주의자 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KKK)까지 인정하는 등 인종적 순수성과 인종분리주의를 방침으로 내세우자 노동운동 지도자 A. 필립 랜돌프나 '유색인종의 향상을 위한 전국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NAACP)의 회장인 W. E. B.뒤 부아 같은 유력한 흑인 지도자의 심한 반발을 받게 되었다. 가비는 1922년 UNIA의 회원들과 함께 블랙스타운수회사의 주식판매와 연관된 우편사기죄로 구속되면서 급속히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5년형의 선고를 받고 2년 복역한 뒤 1927년에 캘빈 쿨리지 대통령으로부터 사면받았으나 탐탁치 않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추방당했다. 외국에서는 흑인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없었고 죽은 뒤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에드먼드 데이비드 크로넌이 쓴 가비의 전기 〈흑인 모세 Black Moses〉가 1955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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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10), 전차에 치어 세상 떠남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카사밀라'는 가우디의 1910년 작품으로 지금도 주민들은 90년된 아파트에 자부심을 갖고 거주하고 있다.
1883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도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가우디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바르셀로나의 모든 사람이 울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바르셀로나의 주거 문화와 풍경을 바꾼, 그 도시 이미지를 만든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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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 만세운동[병인만세사건(丙寅萬歲事件)이라고도 한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는데, 순종은 일본의 압력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일본이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내정 간섭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기유각서는 1907년 7월 12일 조선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이 조약은 조선의 사법권과 감옥사무를 일본에 넘겨준 것으로서 조선의 사법부와 재판소는 폐지되고, 그 사무는 조선통감부의 사법청이 맡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소네 아라스케 사이에 맺어졌다.)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갔다.
그리고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으로 구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1910년 8월 29일 일·한병합조약을 성립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창덕궁에서 16년 동안 살다가 1926년 4월 25일에 53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1926년 6월 10일, 이 날은 순종의 장례를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3·1만세운동 때처럼 만세 시위를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 학생들에 의해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1920년대는 우리 민족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의 일환으로 추진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이 일제의 교묘한 문화정책에 말려 부진한 상태였고, 상해에 마련된 임시정부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과 반목으로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한 채 표류하였으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의 무장투쟁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반전되어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에 계속 밀리는 상태였다.
이렇듯 3·1운동 이후 움텄던 독립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는 상황에서 1920년대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은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참가한 학생은 대략 24.000여 명. 이들은 돈화문에서 장지인 홍릉까지 도열하고 있다가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무렵인 오전 8시 30분쯤 중앙고보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리자, 이를 기화로 서울 각지에서 만세 시위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의 구절이 들어 있는 격문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어 순창·정주(定州)·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에서도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때 호되게 당했던 일제는 이날 전 경찰과 조선군사령부 휘하 일본군 5,000명을 동원해서 경비하고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을 체포·투옥하였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침체되어 있던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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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ㆍ10 민주화항쟁`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5공 정권은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로 맞서 학생시위를 잠재우려 했으나 민심은 오히려 정권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간선제 선거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 대표가 선출됐다. 같은 시각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서울의 시위대들 중 일부는 최루탄에 쫓기다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을 이끌어냈다. ‘6ㆍ10 민주화항쟁’ 결과 집권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8개항의 ‘6ㆍ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4ㆍ13 호헌조치‘ 또한 철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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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 최초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 별세
한국 최초의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58)씨가 1997년 6월 10일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사망 10개월 전 간암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씨는 한국 프로복싱사를 일궈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였다. 그는 국내 프로복싱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얻었고 착실한 인생여정 속에 부를 쌓아 가장 성공한 체육인이라는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였다. 태어나기 3일 전에 아버지가 사망해 유복자로 세상의 빛을 보았고 6ㆍ25때 월남, 이 사회의 밑바닥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 2학년 때 동경아시안게임 웰터급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인 그가 아마 때 남긴 기록은 87승 1패. 프로 데뷔 후 그는 동양챔피언을 거치며 착실히 전적을 쌓다가 1966년 6월 25일 벤베누티(이탈리아)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등정했다. 마징기(이탈리아)에게 챔피언자리를 내준 후 조용히 링에서 물러난 그는 링에서 얻어맞으며 번 돈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명동서 챔피언다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어 빌딩을 소유하는 등 탄탄한 재력을 축적했다. 그는 1996년 말 간암선고를 받기까지 골프 싱글수준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병마와의 마지막 승부에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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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7년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출생
1580년 루이스 바즈 데 카모엔스(Luis Vaz de Camoens), 포르투갈 시인 세상떠남
1654년 알레산드로 알가르디(Alessandro Algardi), 이탈리아 조각가 세상떠남
1682년 코네티컷 식민지의 뉴헤븐(New Haven) 부근에서, 미대륙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토네이도(tornado) 발생.
1688년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 영국 왕 제임스 2세의 아들(the Old Pretender)
1692년 '세일럼(Salem) 마녀 재판' 중 마녀로 몰린 브리짓 비숍(Bridget Bishop)의 교수형 집행. 메사추세츠 세일럼 마을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이 마녀 사냥에서 브리짓 비숍을 시작으로 불과 7개월 사이에 남자 7명과 여자 13명이 마녀와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게 됨.
1706년 존 돌런드(John Dollond), 영국 광학자 출생
1819년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프랑스 화가 출생
1836년 앙드레 앙페르(Andre Ampere), 프랑스 물리학자 세상떠남
1840년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미국 저널리스트, 탐험가 출생
1868년 미국의 제15대 대통령(1857-61 재임) 뷰캐넌 사망
1871년 (조선 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시 미군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점령.
1894년 동학군, 전주성에서 퇴거.
1898년 친위기병대 창설
1901년 중국의 손문, 일본으로 망명
1902년 시인 정지용 태어남
1903년 세르비아 군대 혁명
1907년 북경-파리간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레이스 스타트
1907년 프랑스 류미엘 형제, 칼라사진방식을 발표
1907년 프랑스 일본 조약 조인(중국의 영토보전)
1909년 영국 기선 슬라보니아호 조난중 최초로 SOS발신
1914년 박용만(朴容萬),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 조직
1914년 총독부, 각급학교에 교련과목 신설
1915년 사울 벨로우(Saul Bellow), 미국 소설가 출생
1915년 영국, 독일식민지 카메룬을 점령
1922년 주디 갈란드(Judy Garland), 미국 영화배우, 가수 출생
1923년 피에르 로티(Pierre Loti), 프랑스 소설가 세상떠남
1925년 일제 한국서 치안유지법 실시
1926년 6.10 만세운동.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국장일에 청년학생들이 서울에서 인쇄물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제창함
1926년 건축가 가우디 사망
1932년 장개석, 여산회의에서 제4차 소공전(掃共戰)을 결정
1934년 프레드릭 딜리어스(Frederick Delius), 영국 작곡가 세상떠남
1935년 미국 알코올 중독 방지회(Alcoholics Anonymous : A.A.) 설립.
1940년 노르웨이 독일에 항복
1940년 이탈리아,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
1942년 체코의 리디체(Lidice)마을에서 독일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 마을 파괴. 나치군 장교 리하르트 하이드리히(Richard Heydrich)가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 남자들이 몰살되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마을 전체가 완전히 파괴됨.
1943년 미국에서 볼펜(ball-point pen)이 발명됨
1943년 코민테른 해산
1946년 이탈리아, 공화제 선언
1948년 국회법 국회 통과, 초대국회의장에 이승만 뽑힘
1949년 권농일 제정
1949년 노르웨이의 소설가 운세트 사망 - 1928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50년 북한, 조만식선생과 간첩 김상용 교환 제의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진압
1957년 캐나다 총선거, 22년 만에 정권교체
1959년 잡지 `야화` 7월호. `하와이근성(根性)시비` 필화로 판금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공포
1961년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2년 10환을 1원으로…2차 화폐개혁
1967년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ey), 미국 영화배우 세상떠남
1967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3차 중동전쟁인 6일전쟁(The Six-Day War)이 종결되고 소련이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함.
1967년 서울대 법대생 6.8부정선거 규탄 데모
1969년 교황 바오로6세, 5세기만에 신교 연합체인 세계교회회의에 참석
1973년 북한, 휴전선에서 대남확성기방송 시작
1974년 닉슨, 중동5개국 순방 등정
1975년 남대문시장 화재 8백여점포 전소
1975년 박동명 사건
1976년 Lebanon 전투 재개.
1980년 종신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옥중에서 쓴 글들이 출판됨
1982년 독일의 영화감독 파스빈더 사망
1982년 이라크, 대 이란전에 일방적 휴전 선언
1983년 중국항로, 한국비행구역 통과 허용 발표
1984년 미국 국방성 ICBM을 대기권 밖에서 파괴하는 실험성공 발표
1984년 미국 육군 요격기, 태평양 상공서 목표 미사일 격추
1984년 비구니 1천2백여명, 영화 비구니 제작 중지 요구
1984년 인도, 시크교 군인 무장 반란
1985년 이스라엘군 3년만에 레바논 철수완료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987년 전두환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강압적인 통제에 대한 국민의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 발발.
1989년 건설부, 일산 등 전국 22곳 738만평을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고시
199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당선
1991년 한국-루마니아, 뉴스교환협정 체결
1992년 IAEA 관계자, "북한이 대형 핵재처리 시설 건설", "핵무기 개발 곳곳 의혹" 밝혀.
1992년 아난 판야라춘, 태국 신임 총리에 선임
1993년 權寧海 국방부장관, 漣川 에비군훈련중 발생한(19명 사망) 폭발사고와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 발표
1993년 북한, 동해안에서 사정거리 1,000km 미사일발사실험 실시
1994년 강택민(江澤民), "대북(對北)제재(制裁) 반대". 남-북한, 미국 IAEA 회담 제의.
1994년 옛 육군본부 위치에 전쟁기념관 개관
1994년 체코, 평양주재 대사관 폐쇄.
1995년 방미중인 이등휘(李登輝) 대만총통 "대-중 정상회담" 제의. 중국, 즉각 거부.
1996년 기아자동차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 `엘란` 시판
1997년 공안당국,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 탈퇴 안하면 사법처리.
1997년 악명높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지도자 손 센(Son Sen)과 그의 가족들이 라이벌이었던 폴 포트(Pol Pot)측에 살해됨.
1997년 한국 최초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 별세
1998년 국방부, 국민의 재산권행사 및 편익증진을 위해 전국 10개 지역 327만여坪의 군사시설 보호구역을 해제
1998년 제16회 프랑스월드컵 개막
1999년 북한 경비정 6척, 북방한계선(NLL) 침범
1999년 유고 연방군 코소보서 철군
2000년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al-Assad), 시리아 대통령, 30년동안 통치 세상떠남
2003년 `전설의 섬`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 완공
2003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선 ‘스피릿(Spirit)’ 발사
200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 50주년, 천안서 ‘새역사 희년대회’ 개최
2004년 식약청,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명단 발표
2004년 흑인 음악의 거장 레이 찰스 사망
2005년 한미 정상회담(한국시간 6월 11일) 워싱턴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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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조선족 류광춘 학생-의인에 대한 온정은 사회에서의 보답입니다, 동북3국 중에서 유독 한국인들 의인이 많습니다. 가우디가 전차로 사망, 천재 건축가가무얼 생각하다가.. 6.10 만세, 6.10 민주화 항쟁이 일어납니다. 한민족은 또한 정의사회를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이 강합니다, 중앙고보는 4.19혁명 때도 앞장서구요.
조선족학생의 기사는 얼마전 TV에서도 방영이 되었는데 안타깝더군요... 그리고 같이 있던 친구의 인터뷰도 있었는데 예상외로 한국말도 잘 하구요... 건강히 괘유되었으면 합니다... 6.10민주화 항쟁은 제가 초등학교때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과 최루탄연기가 떠오르네요... 저는 요즘도 가끔 명동성당쪽을 지나칠땐 항상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떠오릅니다.
지금 우리가 매일 보는 원화가 44년 전에 등장했군요~~ 또 가우디의 대성당이 완성될 날은 언제일까요? 이제 월드컵이 시작된만큼 우리도 끝까지 그 열기 속에 빠져야겠습니다^^
회원님 건강이 최고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죄송합니다.
1962년 10환을 1원으로 2차 화폐개혁이 있은 날이군요.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화폐개혁이 오늘 이군요... 박동명로비사건도 오늘이구요.. 6.10민주화운동도 오늘인군요....여러가지사건이 많이일어 난네요...건강하게요...
오늘도 변함없이 오늘의 소사를 올려 주시는 한글도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자주 찾아 뵙지도 못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