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7 장
베푸는 미덕에 대하여(2)
「그대들은 스스로 희생자와 선물이 되고자 갈망하고,
그래서 그대들은 자신의 영혼 안에 모든 풍족함을 쌓고자 갈망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영혼은 온갖 보물과 보석을 끝없이 열망한다.
그대들의 미덕이 끝없이 베풀고자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노력들, 영적인 순례,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들은 모두가 단 하나의 이유를 갖고 있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나눠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나눠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을 알게 되는 순간 나눠주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은 발전과 함께 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행해 소리치고 싶어진다.
“나는 삶의 샘물을 발견했으니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저 너머 세계의 뭔가를 경험할 때마다 자기 안에 담아둘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불가능한 일이고 삶의 본성도 아니다.
내적인 성취가 클수록 나누고 싶은 열망은 더욱 커진다.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삶의 생명수를 찾기 위한 목마름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이제 그것을 나누고 싶은 열망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더 많이 나눠줄수록 더 많이 받게 된다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적게 나눠줄수록 덜 얻게 된다.
나눠주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나눔을 통해서, 즉 그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나눠주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 존재계가 그대를 돌봐주게 된다.
그대가 비움으로써 존재계는 삶의 알려지지 않았던 샘물로부터 더 신선한 생명수와 풍요로움을 채워주게 되고 그대는 절대로 텅 비지 않게 된다.
오직 무한히 나눠줌으로써 무한한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
「만물을 자신에게로, 자신의 안으로 집어넣으며, 그것들은 그대의 샘에서 그대의 사랑이라는 선물로서 흘러나온다.」
세상에 특별한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는 가짜이며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한 대용품에 불과하다.
진정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종교뿐이다.
내면의 무한한 샘물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자 한다.
사랑은 차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가난한 사람만이 차별을 한다.
영혼이 픙요롭다면 차별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 받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받아주는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 반대가 아니다.
그대가 상대에게 뭔가를 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대에게 감사함을 느끼기를 바라지 않는다.
동양에는 아주 기이한 전통이 있다.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는 모두 인도에서 태동한 종교이며 동양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승려에게 음식이나 옷을 줄 때, 승려들은 거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한 것이면 모두 구걸한다.
태양이 질 무렵이면 그들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내일은 내일이 알아서 돌볼 것이다.
지금까지 삶이 자신을 돌보아왔다면, 내일의 삶이 자신을 돌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저녁이 되면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필요한 것을 구걸하면 된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기이한 전통이란, 승려에게 뭔가를 줄 때 뭔가를 추가로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승려가 선물을 받아주기 때문에 더 많이 주게 되는 추가적인 부분은 그대의 감사함의 표현이다.
승려가 거절할 수도 있다.
그는 그대의 음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대는 그에게 감사함을 표현할 뭔가를 더 주어야 한다.
‘당신이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음식을 구걸했고, 당신은 내 음식을 받아 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특별히 뭔가를 주기에 충분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당신은 감사하게도 내 음식을 받아주었으니 내 감사함의 표시로 이것을 더 받아주기 바란다.’
내가 처음에 이런 전통을 접했을 때,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다.
보통의 논리라면 승려가 감사해야 한다.
그대가 나에게 음식과 약을 주었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그대가 감사해야 하고, 말뿐만이 아니라 그대의 감사함을 표현할 상징적인 뭔가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전통적인 사상이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연관이 있다.
그대는 자신을 나누고, 자신의 사랑을 나눈다.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과연 누구를 차별하겠는가?
《존재계는 차별하지 않는다.》
그대는 존재계보다 더 똑똑한 척해서는 안된다.
그 승려는 그대가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그대의 비구름이 그에게 비를 뿌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기 때문에 그대 역시 감사함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목마른 대지, 메마른 장미덩굴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나눔을 받아주었고 그대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샘물로부터 나누어줌으로써 새로운 샘물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잔을 채우게 되기 때문에 그 잔은 절대로 마르는 법이 없다.
「진정으로 베푸는 사랑은 모든 미덕을 훔쳐내겠지만, 나는 이러한 이기심을 건강하고 신성하다고 부르노라.」
차라투스트라 이후로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기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영성의 기초라고 말한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무욕selflessness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마도 얼마나 사심이 없는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는 심지어 그대의 자기self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대는 자기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들 가운데 스탠리 존슨은 주기적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매년 인도에서 6개월을 보내고, 서양에서 6개월을 보냈다.
그는 내가 가르치던 대학에서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산책 중에 몇 번 마주치곤 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늘 존재하던 의문점이 있었다.
“기독교와 비교했을 때 동양의 모든 종교는 명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기적이다.
명상이 내면으로 들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의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인 반면, 기독교는 가난한 자에게 다가가라고 가르친다.
명상에 들어가면, 가난한 사람들을 찾을 수 없고 병원도 열지도 않을 것이다.
고아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고아원을 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 일들은 외부에 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이 있고, 고아와 창녀가 존재하고, 수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이런 문제들이 산적해있는데, 사람들에게 명상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기심이다.”
그가 처음에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나는 그냥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가 물었다.
“문제가 무엇인가?
왜 당신은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가?
당신은 내 의견에 동의하는가, 반대하는가?”
내가 말했다.
“동의 여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고요하게 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불쌍해 보인다.”
그가 말했다.
“내가 불쌍해 보인다니 무슨 뜻인가?”
내가 말했다.
“그렇다.
당신이 이타적이라고 부르는 무료봉사는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 자체가 고아이다.
영적인 개념에서의 고아를 말한다.
아직 존재계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지 못하고 육체에 갇힌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영원한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보물을 알지 못하면, 다른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
명심하라.
절대로 명상이 이기적이라고 말하지 말라.
명상이 유일한 길이다.
이기심을 통해서 당신의 삶 전체가 무욕의 것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자기 자신의 중심에 존재할 때에만 당신은 연민과 사랑을 갖게 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아가 존재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우선 당신 자신을 구하라.
당신 자신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으면서 남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진정한 종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헛소리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이기심은 건강하고 신성하다.”
오직 이기심을 통해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창조적이고 사랑스럽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천국이나 낙원이나 신을 바라지 않게 된다.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게 된다.
그것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삶이 그 자체로 대가가 되지 못하면,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바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다.
삶 자체가 대가가 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건강하고 신성하다.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