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전> 채윤미 / 송동철 / 서해문집 (2024)
[My Review MDCCLXXXVIII / 서해문집 12번째 리뷰] '같은 작품'을 여러 번 감상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같은 여행지를 반복해서 가도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경험은 없었던가? 같은 음식점을 가서 같은 음식을 주문했는데, 평소와 '다른 맛'을 경험한 적은 없었나? 내가 <운영전>을 세 번째 리뷰하는데 '같은 리뷰'를 쓰지 않는 까닭도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생긴단 말이다. 이번에 주목한 내용은 바로 '궁녀들의 이유 있는 저항'이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삶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면이 있음에도 '유교적 가부장, 신분제도'에 얽매인 처량한 신세라는 점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허나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여성인권의 향상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현대에도 시댁에선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며느리로 살아야 한다. 남성은 낮에는 회사업무에 전념을 하더라도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달콤한 휴식이 허용되는 분위기인데 반해, 여성은 낮에는 회사업무, 밤에는 가사, 육아 노동까지 전담해야 하는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려야 한다. 근래 들어서 '핵가족화'된 가정에서는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가정의 전반적인 노동을 서로 분담해서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녀가 할 수 있는 '분리된 영역(출산, 육아 따위)'에서는 남성이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가사와 양육'등에서 더 많은 부담을 하는 것으로 보편화되는 추세다. 허나 조선시대 궁녀들은 이런 꿈조차 꿀 수가 없었다. 왜냐면 전문직을 가진 커리어우먼이 되었으나 그러한 경력을 갖추고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임금의 여자'가 되었기에 궁궐밖으로 나가는 일이 금지되었고, 궁궐밖의 남자와 교제할 수도 없었으며, 운이 좋아 '후궁'이 되고, '아들(왕자)'까지 낳게 되면 '또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삶조차 '궁궐안'에서 이루어지는 한정된 삶이기에 갇혀지내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운명에 당당히 도전한 여성이 있다. 바로 안평대군의 수성궁에 살고 있는 궁녀 '운영'이다. 그녀는 '안평대군의 여자'로 평생을 살아야하는 운명에서 당당히 벗어나 '김진사의 여인'이 되고자 궁을 벗어날 꿈을 꾸었으며, 그 꿈이 실현되지 못하자 현실(궁녀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선택'에 부끄럼이 없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는 일을 실현시키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폐쇄적인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틀 안에서 이토록 놀라운 일을 벌인 여성이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영'이란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더 놀라운 점은 수성궁에서 '운영'과 목숨을 함께하겠다는 '아홉 명의 궁녀'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소옥', '부용', '비경', '비취', '옥녀', '금련', '은섬', '자란', '보련'이다. 이 궁녀들은 운영과 함께 글과 시를 배운 '동문'이면서 '궁녀의 삶'에 문제의식을 공유한 '동지'였던 셈이다. 궁녀의 삶에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던가? 그건 바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가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궁녀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궁밖을 나서기만 해도 사형, 외갓남자에게 존재를 들키는 것만으로도 사형,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도 혼인조차 할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간 수많은 궁녀들이 '이유'도 모른채 궁궐에 갇혀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하찮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홉 명의 궁녀들'은 운영이 김진사와 사랑에 빠지는 범죄를 보고도 눈 감아주었고, 심지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운영의 죄가 안평대군에게 들통이 나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두가 나서서 운영을 살려주십사 구명운동을 나선 것이다. 왜냐면 저들도 같은 궁녀로서 운영의 사랑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기회'가 닿았다면 운영처럼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사랑하는 님과 한가정을 이루는 꿈을 꾸었을 테고, 그 사랑과 꿈이 죽을 죄인 것을 알았다고해도 기꺼이 죽을 각오를 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당찬 여성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헌데도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한 까닭은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담아 듣는 남정네들이 없었던 탓이고, '여성, 자신들의 의견'을 스스로 기록하지 못해서 발생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운영전>은 더욱 소중하다. 그런 몇 안 되는 '조선여인들의 한맺힌 절규'가 아니겠느냔 말이다.
<운영전>에는 '금지된 사랑'의 애달픔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도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목숨을 걸고 증명한 이야기다. 이러한 한맺힌 절규조차 당당히 이름을 밝혀지 못할 정도로 조선사회는 견고했다. 그래서 한맺힌 이야기를 '사랑'으로 한꺼풀 발림했고,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라는 '몽유록'으로 또 한겹 포장을 덧붙였다. 그래도 조심스러워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유영'이라는 사람조차 속세를 버리고 훌쩍 피안의 세계로 떠나버리는 '결말'로 마무리 지었다. 어쩌면 이런 장치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아닐까? 만약에 '궁녀의 저항정신'만을 강조한 글귀로 남겨졌다면 조선시대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불살라졌을지도 모르며, '금지된 사랑'이라는 불경스런 내용으로 전해졌다면 풍기문란하다는 이유로 소설의 내용이 왜곡되거나 윤색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겹겹히 싸여진 채로 온전히 그 내용이 전해진 탓에 읽는 이의 눈썰미가 더욱 필요해진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단단한 껍질을 깨고 '이야기의 진면목'을 꺼내는 대단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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