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子)로는 장자 판사 덕홍(德弘), 차자 청계 덕의(德毅), 삼자 운암 덕관(德寬), 사자 호조판서 덕화(德和), 오자 안항 덕후(德厚)이다.
손(孫)은 정망(廷望), 정첨(廷瞻)은 덕홍(德弘)의 출(出)이며, 정헌(廷獻)은 덕의(德毅)출(出)이며, 정호(廷灝), 정봉(廷鳳)은 덕관(德寬)의 출(出)이며, 정철(廷喆), 정혁(廷赫)은 덕화(德和)의 출(出)이며, 정훈(廷勳), 정렬(廷烈), 정명(廷鳴)은 덕후(德厚)의 출(出)이다.
이후 후손들은 관산읍 방촌, 당동, 옥산, 옥동, 용전, 부산면 기동, 대덕읍 초당·도청, 용산면 모산, 안양면 당암, 기산, 월암, 비동, 동촌, 유치면 단산 등 장흥군 일원을 중심으로 번손하였다. 이밖에 여수시 개도, 보성군 회천면 도강, 웅치면 유산리, 김제시 월현, 경북 상주, 예천 명봉리, 효갈리 지역에도 후손들이 정착하여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장흥위씨 중, 60% 이상이 당곡 진사의 후손에 해당된다.
公의 유장비(遺庄碑)는 1979년 6월에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 입구에 세웠다. 근찬(謹撰)은 문학박사 이가원, 전면서(書) 김창동, 후면서(書) 위용철, 근수(謹竪) 위계효, 위계천, 시공자는 보성석물공장 대표 김남모 이다.
이중, 근찬(謹撰)한 문학박사 이가원(진성人 1917~2000) 선생은 1987년 장흥읍 평화 회주사(懷州祠) 앞 "장흥위씨 시조공 사적비" 근찬과 "1999년 기묘대동보 서문(序文)"을 썼다.
전면서(書)한 김창동(1947년생) 선생은 장흥위문과 연(緣)이 각별한 고당(顧堂) 김규태(1902~1966) 선생의 일곱째 아들이다. 당시 33세 연령으로 다른 성씨 문중의 비(碑) 전면 글을 쓴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후면서(書)한 춘사(春史) 위용철(1922~2008)은 방촌리 계춘동 태생으로 안항공 10대손이자 다암(茶嵓) 위영복 선생의 증손(曾孫)으로 1999년 기묘대동보 편찬시 도유사 중책을 맡아 서(序)를 썼다.
근수(謹竪)한 계헌(溪軒) 위계효(1917~2004)는 당동 태생으로 청계공 10대손이자 성균관 고문 의재(毅齋) 위석한 선생의 장자(長子)이다.
관포(冠圃) 위계천(1923~ )은 방촌리 태생으로 안항공 10대손이다. 2003년~2005년 하산도문계장을 맡아 문중사를 이끌었다. 위계효는 청계공 10대손, 위계천은 안항공 10대손이다. 각 11대손 기록은 오기(誤記)로 사료된다.
公의 묘소인 회진면 대리는 손(孫) 병조참판공 위정철(1583~1657)이 41년간 봉직하고, 1644년 마직막 관직인 함경도 만포진첨절제사를 퇴임하여 귀향하였다. 이후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 웅천현감공 위정렬(1580~1656) 두 종형(從兄 4촌)과 함께 당대 국풍(國風) 이의신를 대동하고 천관산에 올라 조부(祖父)인 公과 부(父) 호조판서 위덕화의 이장(移葬) 묘(墓) 자리를 잡았다. 또한 두 종형의 집터인 현재의 근암고택과 존재고택을 잡았다고 傳해진다.
휼륭하신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문중사에 대해 공부하고 갑니다.
비가 우람합니다.
오덕을 낳은 위문의 거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