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시모음 33)
가을은 붉다 /김경희
가까이하기에
먼 거리를 두는 것은
다 가질 수 없는
공평함이라
가시적인 사랑으로
추풍낙엽 운을 띄우면 계절의
가사 노래가 된다
단풍나무 화산처럼
햇살이 좋아 그런지
넌 저 시
그리울 거라며
가을 마음 /이원문
산과 들이 알리는 마음
오늘도 아니고
어제의 마음도 아니다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도 아니다
그저 텅빈 가슴 한곳
채워야 할 그리움만 가득
무엇을 잃었는지
잃은 것만 같고
흐려진 기억만 스쳐 간다
그 옛날을 잃었는지
어제를 잊었는지
무엇을 찾으려
바라보는 하늘인가
걷는 길 코스모스
또 한 걸음 더 멀어진다
어느새 가을인가요? /박종영
아주 작은 기쁨의 들꽃들이
문득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어
푸른 가을을 조몰락거리고 있을 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여인이
불쑥 앞을 가로막고
구절초 향기 한 아름 가슴에 안길 때,
산동백 꽃 진자리 부끄러워
풋내나는 열매 추스르다
허리춤 드러내 보일 때,
어느새 거기도 가을인가요?
가을의 선율 /(宵火)고은영
그 흔한 표현 속에 나는 어떤 시편으로도
어떤 잠언으로도 어떤 언어로도
너를 황홀하게 하지는 못한다
경험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명백한 추억으로 각인되는 일이다
너는 어찌하여 길을 잃었느냐
아무도 찾아 올 수 없는 변방에서
참신한 사랑을 기다리느냐
고독의 푸른 수의를 입고 누구를 기다리느냐
종족 보존을 위한 오로지 사랑이냐
아니면 이 가을의 정점을 구애하느냐
가난한 노래라 하여 그리움을 모르겠느냐
풀들이 짙은 향기를 내뿜고
휘영청 달이 밝은 들녘이거나
저 갈숲이 결빙된 겨울로 가기까지
너는 너의 넋을 뽑아 사랑을 일궈야 하는 것이었다
벌써 닷새가 넘도록 음습한 세탁실
그 어디쯤 내공을 틀고 앉아 이 가을
처연한 풍경 속에 난파된 현실을 쓰다듬고
구원을 기다리느냐
불쌍하도다 귀뚜라미야
초라한 내 집에 숨어든 그날부터
오랜 시간의 공복을 견디며
그토록 맑은소리로
그리움을 부르는 것이냐
사랑을 부르는 것이냐
가을을 부르는 것이냐
만추(晩秋) /정재영
하늘을 받치던 산이 힘에 부쳐
감추어둔 붉은 마음 속살 드러내는 날
희미한 당신은
천연색 그림으로 하늘에 걸린다
사랑은
속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을
오늘처럼 후회한 일 없다
시간도 바보라서
숨어 있던 영원한 색을 보이려
겉에 칠한 순간의 색을 걷어내
횃불로 함성을 지르는가 보다
희미한 젖빛 유리창에
화려해서 아픈 상처들이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당신에게 들킨 마음 붙들고
언젠가 깊이 잠드는 날 오면
당신도 오늘처럼 다시 깨어
나를 바라보고 계실 것인가.
가을 나그네 /정병옥
계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고
철따라 나는 새들의 전쟁이 시작이 되니
샘터의 목마름에 벌컥 벌컥 마시는 한모금의 물이
달싹 지근하여 먹구름을 씻겨 내린다.
갈잎에 날개를 달고
천상으로 오르는 천사의 모습처럼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날개옷으로 덮고
명지바람이 울며 자리를 떠나니
따뜻했던 햇살 한 자락이 서릿바람에 눈치를 본다.
붉은 노을이 어둠속으로 헤엄치고
찬 그림자가 뜰 위로 올라오며
철새의 방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기우 찬 달이 하품하며 눈을 비빈다.
길 위에 뒹굴던 가을이
스산한 바람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냉랭한 별빛사이로 바람이 휘젓고 다니는데
입술 파랜 가을나그네 길을 잃고
처마 밑 쉬어가는 계절의 숨소리가
심장사이에 쿵쿵 울린다.
혼자만의 외사랑에 고백이라도 하는 듯
고고한 달빛사랑을 나누는 달맞이꽃이
어둑한 새벽이 올 때까지 밀어를 속삭이는데
새벽이슬에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린다.
하얗게 내린 서리사이로
낯선 발자국이 지나가고
나그네 봇짐 속에 든 햇살의 휘파람을 따라
가을이 성큼성큼 따라가고 있다.
가을 타는 남자 /주명옥
옛사랑 기다리다
새가 된 가슴
투명한 그리움
붉은 기다림 앉히고
취기의 동공을 잡아보지만
아득히 멀어진 사랑의 그리움
체념과 방황의 선택을 남기고
가을 맞는 아픔이 그런가봅니다
몸부림 그 잔해의
심연 속에서
남자는 혼자서
울 수도 없나봅니다
두 눈에 응어리진 인연의 설움
쇠진 흔적을 새기며
저 남자 분명
무엇을 잊은듯합니다
이름이며 , 나이며
멀리서 바람이 희롱하는 소리
가열되는 심장을 안고
하얀 거품에 보고픔을 떨구는
가을은 분명
남자의 계절이 맞나봅니다
긴 호흡
심장 삭히는 소리
가을서정 /草岩 나상국
먼산 바라보며 걷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것 같은 어지럼증으로
가을이 왔다
푸른 숲이 멀게만 느껴지더니
울긋불긋붉은색 저고리에
노란색 치마를 입고
배가 잔뜩 부른 모습으로
가을이 가까이 왔다
고추잠자리
양떼들이 뛰어노는
높은 호숫가 뱅글뱅글 맴돌고
살살이꽃 하늘하늘 산들산들
하늘을 흔들면
가을이 오는 창가에서성이며
멀리 떠나보낸
짝 잃은 기러기 아빠처럼
내 마음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문을 당하듯
심한 가을 앓이를 해야만 한다
초로의 가을 /고송 정종명
농익은 가을 서산 노을빛같이 붉게
사랑하며 맞잡은 손 시리다
한치 가슴에 그리움 그리고 보고픔
여진처럼 떨림으로 남았다
시린 계절은 초로의 독백을 남기고
아래 목 같은 온기를 찾아 헤매는데
어제 같았던 사랑의 여운 빨랫줄처럼
팽팽한데 이제 지워야 할 기억들
돌고 돌아가는 시간 따라 만남과 헤어지는
인생사 같은 만추의 계절
내 추억의 노트에 무엇으로 메울까
새벽 뭇별이 내 가슴에 우수수 떨어지는 날
초로의 가을은 절정을 이루겠지.
가을 들꽃 /오보영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던
네가
먼데서도 금방
눈에 확 들어오고
전엔
별 볼 폼 없어보이던
네 모습이 유난히
곱게 보이는 건
아무래도
가을 이어서라
딱이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괜히
마음이 허전해지고
쓸쓸해지는
가을 분위기 덕이라
가을풍경 /양현주
집 밖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새댁으로 불리다가
아무개 엄마로 불리다가
마흔 넘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아무도 불러주지 안았던
내 이름을 동네방네 부르는 그녀는 누굴까
창밖을 보았다
연분홍 원피스 입은 그녀가 길거리에 서 있다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한다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출렁거려
서로 바라만 보다, 무안하게 배시시 웃다가
하얀 박동이
뛴다
훤하게 웃고 있는 그녀
소시 적 코흘리개 친구처럼 정겹다
바람이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탱고 춤추는 가냘픈,
그녀의 직업은 가을댄서다
벼 익어가는 마을
큰 간판을 붙여놓고 호객 행위를 한다
내 이름이 코스모스라는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가을 속에 축복하고픈 그대 /은파 오애숙
낙엽 태우는 향긋함
하늬바람 불어올 때면
코끝에 스미며 가을 속에
그리움의 향그롬 피어납니다
이른 아침 지지배배
새들의 노랫소리에 잠 깨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서야
모처럼 커피 한 잔 음미합니다
오랫동안 건강 위해
뒤 편에 두었던 모카커피
왠지 오늘은 그 향에 취하고파
이삼십대 먹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카향
그 향기 속에 어리는 얼굴들
예닐곱 어린 시절 풋풋한 그리움
커피잔 속에 떠 오르며 일렁입니다
내 삶의 획을 그었던 그 애
오늘따라 가슴에서 뭉클하게
살랑이며 피어나는 감사의 노래에
고옵게 물든 단풍잎으로 연서 띄웁니다
허나 생사 몰라 옛 그림자 보며
백세시대 살아가도 만날 수 없기에
그 시절의 변치 않는 풋풋함 되새기는 맘
가을에 취했었더니 /김길남
가을이 너무 아름다워
엎드려
향을 맡아 봅니다
가을 속에 숨어 꿀을 훔치던
호박벌이 밖으로 나와
내 얼굴위에 앉았습니다
찬란한 가을이 그리 좋아
그냥 취해 있었더니
벌이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이거 참 죽을 맛입니다
가을이 부른다 /기영석
높고 파란 하늘엔
새털구름 한 조각
외롭게 떠서 사라진다
아침 찬 이슬에
채색된 삼라만상이
곱게 치장을 하고
언덕 위 가녀린 들국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은빛 억새는 춤을 춘다
낙엽 지는 잎새의 슬픔도
연모의 긴 사연도 버리고
단풍 든 곳으로 오라 하네
가을 여행 스케치 /정세일
오늘은 그대와 둘이서
가을 여행을 떠나면서 가을을 스케치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을을 담기 위하여
아침 거미가 비단실로 솔가지에 짜놓은
커다란 화폭을 미리 준비하였답니다.
오늘은 그대와 둘이서
가을여행을 떠날 수만 있다면
나는 가을의 소리를 담아오기 위해
때늦은 봄의 소리로 울어대는
뻐국기의 항아리를 닮은 새의 둥지를
준비하였답니다.
당신과 둘이서 가을여행을 간다면
나는 그 항아리 속에 당신의 가을 같은 소리를
차곡차곡 잘 접어서 넣어두겠습니다
언제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는 당신과 둘이서 가을 여행을 간다면
나는 나의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랑의 고백을
단풍이 들려고 하는 오색 색색의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있는 크레파스를 꺼내어
가져온 화폭에 당신의 산같이 물드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오늘 당신과 같이 가을 여행을 떠나면서
당신의 얼굴을 부끄럼 없이 바라볼 수만 있다면
가을 교감 /서봉석
먼 산
어느 숲에서 단풍잎 돋는지
간지럽다고 잇몸을 보이며 웃는 햇빛
화 하니 눈부시다
낙엽 하나 져도 부산해지는 바람에
간 자리 사람 그리움만 남아서
기웃거리게 되는 여기 저기
가을 나눠 준다고 서성이는 구름이
일몰 든 갈대숲에
다발, 다발 적막 피어 낸 그늘을
신발 소리만 끌고 다니는 가랑잎
어쩜 저 소리는
내용을 잃어버린 소식이 주소 찾아 헤매는 기척
낯 선 바람에게 읽히는 구구절절
속은 타는데
느닷없이 단풍 보러 오라고 부르는
풀벌레 소리
어둠이 별빛으로 화장 하는 기척
가을을 눈처럼 낙엽지면서
환장하게 되는 바람의 부스러기들
무슨 약을 먹고서야 이 그리움 고쳐질까
가을은 조용하게 깊어 가는데
마음 혼자 시끄럽다
가을에 우는 새 /최영희
아파트 숲에서 우는
새야
너도 나처럼
정情이 그리워
우는가 보다
잎을 지운 나뭇가지 끝 시린 햇살
오늘아침
네 우는 소리는
더욱 애닯다
늦은 가을
하늘이
높구나